9. 천국백성의 회개와 열매 (눅13-14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 13-14장의 배경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시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다. 예수님은 앞에 놓인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다. 그 여정은 험난하다. 수많은 군중들은 모여들어 현세의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시를 원한다. 종교지도자들은 거세게 달려들어 영적 구원의 길을 방해한다. 이제는 정치지도자까지도 합세하여 위협을 가하여 온다. 눅13:31을 보면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라는 보고를 하여온다. 본능적이고 야성적으로 적대심을 나타낼 수 있는 위협적인 상항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32). “여우”란 동물을 유대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밤중에 돌아다니며 자기 먹이를 사냥하는 어두움을 따르는 동물이다. 어두움의 자식인 헤롯은 낮에 빛 가운데로 다니시는 예수님을 해칠 수 없다. 예수님은 “낮에 하나님의 일을 하셨고”(요9:4) “사람이 빛 가운데로 다니면 결코 실족하지 않는다”(요11:9)고 가르쳐주셨다.
1. 예수님은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13:22)라고 기록한 대로 여행을 감행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선포와 말씀 사역을 계속 진행하신다. 예루살렘의 수난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여행 중의 말씀”(traveling discourse)은 계속 연결되어 기록된다. 예수님의 말씀사역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시는 사역”이 언제나 수반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인하여 기성 종교지도자들과의 마찰이 더욱 거세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2. 예수님은 헤롯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헤롯은 이미 세례요한을 살해한 음침하고 교활한 정치인이었다. 혹시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기적을 베풀고 다니지 않을가 착각하며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려고도 하였으나 그러한 초청을 이미 거부하셨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13:33). “오늘과 내일과 모래”란 3일간의 구체적인 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할 것을 아시고 계시므로 반드시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길을 가야만 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정치적 위협도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3. 이러한 상항 아래에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이 12장의 내용들이며 이제 1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12:54)라는 기록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 누가복음 13:1-9;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회개와 열매”의 삶이 요구된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1. 눅13:1-3에서 예수님은 정치적인 질문으로 위기를 마지하게 되신다. 총독으로 파견 나온 로마인 빌라도가 자기의 정치적인 계획을 반대하는 갈릴리 사람들(유대인) 몇 명을 죽이고는 그들의 피를 로마인들의 성전 제물에 섞어버렸다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빌라도가 유대인 종교의 위신과 품격을 떨어뜨리므로 반기를 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만일 이런 사실에 대하여 냉담하고 무관심을 보이면 반민족적 유대인으로 고발할 수 있고 만일 예수님이 빌라도의 처사를 비판하면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고소할 수 있는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으셨다. 빌라도의 실수나 죄악을 취급하기 전에 인간의 죽음 자체의 원인을 규명하셨다.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겠는가?” 죽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직결되지 않는다.
3. 예수님은 다른 예를 드셨다. “실로암 망대에서 일하다가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겠는가?” “빌라도 때문에 죽었는가, 하나님이 벌을 내려서 죽었는가, 자기들의 죄악으로 참변을 당했는가?”
4. 예수님을 고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교훈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죽음의 형태는 다르나 모두는 똑같은 멸망의 저주 아래에 있다. “죽음”이라는 결과를 볼 때마다 죽음의 원인(=죄와 허물)을 놓고 그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5). 예수님은 이 말씀을 똑같이 빌라도의 정치적인 사건과 실로암의 작업상의 사건에 적용하셨다. 이 적용은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왜 죽었느냐 또는 누구의 책임으로 죽었느냐를 묻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고요히 엎드려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하여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당하시더라도 우리들을 살려주시기 위한 관심과 사랑 때문에 구원의 길과 방법을 제시하여 주시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천국백성은 늘 회개 하므로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7. 예수님은 아울러 “열매 맺는 삶의 중요성”을 비유(눅13:6-9)로 말씀하여 주셨다.
가.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다.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9). 개방적 결론을 가진 비유다. 비유를 듣는 청중 스스로가 어떤 중요한 결론을 스스로 내리도록 유도한다. 1) 포도원 관리인이 어떻게 무화과 나무를 다시 잘 관리하였는가? 2)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었는가 또는 안 맺었는가? 3) 무화과나무는 찍혀졌는가 또는 안 찍혀졌는가? 이 비유를 청중이 자기의 생활에 직결하여 생각하면 각자가 자기 행위의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비유의 초점은 무화과나무에 있지 않고 비유를 듣는 청중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자는 자기를 돌보면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하라는 것이다.
나.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졌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문제가 된다. 순수성과 청결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한 밭에 두 가지 식물을 심을 수 없게 규정하였으나 흔히 그렇게 하였다.
레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신22: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11.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다.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졌다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서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로 비교하며 또 열매 없는 포도나 포도원으로 비교한다.
미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렘8: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 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 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 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 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 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 졌도다
사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막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 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 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 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 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라. 눅13:7에서 포도원 주인은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고 말한다. 레19:23을 보면 열매 맺는 과목은 3년 동안 잘 키운 후에 그 다음 해부터 열매를 거둔다. 그런데 주인은 3년간 열매를 얻지 못하였으니 6년간을 참고 기다린 것이다.
레19: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마. 눅13:8-9에서 포도원 지기는 주인의 인내와 기다림을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던지 민족이던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의 열매”를 “오래 기다리신다.”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고 하여서 사람들은 방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때와 시간을 측량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간”을 성경원어에서는 “기회”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회는 지금(현재) 잡아야 하며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회개하고” 오늘 “열매 맺으라”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고후6:1-2)고 선포하고 있다.
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은 찍어버리겠다는 위협과 협박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기회를 주어서 사랑과 은혜를 먼저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4:17)고 하셨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시면서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셨다. 성도의 성화는 회개의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회개는 열매를 맺게 하는 통로다.
* 눅13:10-17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18년 동안 병들어 몸을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주신다. 이것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 고침에 대하여 분을 내고 다른 날에 병 고침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에게 직접 항의할 용기가 없었고 회중과 여인을 꾸중하였다. 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참 뜻을 모르고 오해하고 있었고 전통과 유전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1. 예수님은 회당장의 위선적인 행위를 지적하시고 안식일의 참 뜻을 가르치셨다. 안식일에도 매어놓은 동물을 풀어서 물을 먹이는 것은 상례인데 하물며 사단에게 매여 있는 환자를 풀어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은 합당하며 안식을 더욱 잘 지키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2. 안식일의 참뜻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고 하였고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고 하였다. 하나님은 6일 동안에는 창조를 완성하셨으며 제7일에는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창조는 완성되었고 복되고 거룩한 운행(다스림, 온전케 하심, 거룩하신 사역)은 제7일에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12:12)고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것이 안식이며 화평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영적성장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안식이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마12:8)고 하시면서 친히 일평생 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일을 계속하신다.
3.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아의 때에 안식의 생활을 누리라고 예언한 말씀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히4:9), “그러므로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히4:11)고 권고하고 있다. 우리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안식의 때에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은혜 받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4. 예수님은 18년간 몸을 펴지 못하고 있는 여인을 따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셨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13:12). 모든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으로 선포된다. 그리고 말씀 후에 안수하여 주셨다. 안수는 동일체를 이루는 행위다. 예수님의 신성하고 거룩하신 손(몰)이 여인의 몸과 일체를 이룰 때에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의 몸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여인의 몸에도 있을 수 없었다. 여자는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5. 예수님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16)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자녀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단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그 육체는 얼마든지 사단의 영향권 아리에서 괴롬을 당할 수 있다. 사단은 그 여인을 장기간 육체적으로 괴롭혔으나 그 여인의 영혼은 해할 수 없었다. 성도는 신앙이 성숙할수록 부딪히는 육체의 고난을 감수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고 극복하기도 한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에 사단을 욥의 육체에 질병을 가져왔으나 욥의 영혼은 건드릴 수 없었던 것과 같다.
6. 바울도 자기 육체에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 기도하였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응답을 받고 일평생 자기 육체의 가시와 연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믿음으로 살았다. 우리들이 분명히 믿는 것은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서 끊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7. 이와 같이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천국백성(시민)의 삶을 여러 가지 형태로 방해하고 있으므로 생활 속에 숨어있는 작은 악들을 청산하도록 간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매우 작은 겨자씨 한 알과 적은 누룩의 비유를 들려주시게 된다.
* 눅13:18-19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 겨자씨는 자라서 채소(vegetables) 또는 나물(plant)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었다고 하였다. 만일 나무(tree)와 같이 크게 자란다면 ”비정상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부적으로 비정상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겨자씨는 나물이나 풀 종류이지 결코 나무 종류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의하면(창1:11-12) 각기 종류를 따라서 풀에서는 풀이 나게 하신 것이며 풀에서 나무가 나오게 하지 않으셨다.
2. 성경말씀에서 “나무”라는 것은 바벨론 왕국이나 앗수루 제국과 같은 세상 나라의 정치적 권력을 상징한다. 또 "새“라는 것은 사단이 저지르는 죄악을 상징한다. 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나무 밑을 오물로 더럽힌다. 계시록 18:2에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3. 교회나 성도가 성장하여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어떤 힘과 세력을 과시하려는 것은 교마의 죄악이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의 비정상적 성장에 의하여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겨자씨 자체는 찌르고 쏘는 맛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천국은 성도들이 가진 찌르고 쏘는 능력에 의하여 확장되는 것이다.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 능력 있는 성도다. 교회나 성도는 외형적 성장을 보이려는 욕심이나 위선을 버려야 하며 오히려 보이지 않는 복음의 영향력을 있는 처소에서 나타내며 살아야 한다.
* 눅13:20-21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밀가루 속에 들어있는 누룩과 같다는 비유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 누룩은 밀가루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게 만든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사단이 들어와서 거짓교훈을 퍼뜨려 진리의 견고한 터를 흔들어 놓고 진리를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맺기 위하여 소제(meal offering)의 제물을 드렸다. 이때 드리는 제물이 바로 밀가루 서 말이었다. 그런데 이 밀가루 속에는 누룩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였다. 누룩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결속을 흩트리는 악의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3.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방문한 하나님의 천사를 밀가루 서 말로 대접하였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천사를 대면하였을 때 누룩 없는 밀가루 서 말을 드렸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예배드리러 성전에 올라가서 누룩 없는 가루 서 말을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맞이할 때마다 집안에 누룩이 없도록 깨끗이 청소한 후에 누룩 없는 떡을 만들어 먹었다.
4.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눅12:1)고 말씀하시면서 위선적인 태도를 버리도록 요구하셨고,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고 말씀하시면서 감각적이고 현세적인 이상주의를 경계하셨고,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말8:15)고 말씀하시면서 세속적인 권력과 물질적 부요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쳐 주셨다. 고린도전서 5:6에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음행의 성적 타락과 비도덕적 행위를 내어 쫓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5. 누룩의 비유에서 나오는 여인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여자는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가족의 건강과 생명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절대적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주부는 음식물 속에 불순물이나 독소를 절대로 집어넣지 않는다.
6.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패요소가 들어가 있는 말씀을 먹고 바르게 살 수 없다. 우리들은 위선과 부도덕, 교만과 거짓과 같은 누룩의 부패요소를 버려야 건강한 천국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 형식주의, 의식주의, 율법주의, 권위주의, 낙천주의, 자유주의 등을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살아야”(고전5:8) 할 것이다.
* 눅13:22-30에는 구원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23) 하며 질문을 하였다. 이러한 질문은 유대인 서기관들의 관심사였으며 자주 거론되는 토론의 중심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질문 중에는 좋은 질문도 있고 무가치한 질문도 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에 속한 내용으로써 그 대답을 들을 수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1. 예수님은 잘못된 질문을 따라서 “구원 얻은 자의 많고 적은 것”에 대하여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구원의 중요성과 방법론”에 대하여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 여기에서 먼저 구원에 관한 통계적인 수자에 대한 관심에서 자기 구원의 관심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천국과 구원의 진리를 늘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비유”(29)로 말씀하셖다. 천국백성의 구원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일”이 우선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 문은 예수님이시다(요10:7, 9). 예수님에게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힘쓰라”는 것은 목표(좁은 문)를 향한 방법의 제시이다. “힘쓰라”는 것은 “힘쓰고 기도하라”는 구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힘쓰다”라는 성경원어는 “운동선수들이 보여주는 땀 흘리는 노력”과 “괴로워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노력과 괴로움이 동반되는 영적 기도생활은 구원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필수사항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의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 “구원의 때를 놓치지 말라.” 천국잔치는 먼저 문을 닫아놓고 시작한다. 시작된 후에는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다. 구원의 문은 좁은데 “넓은 길과 넓은 문”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좁은 길, 좁은 문”을 찾을 기회는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 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둘째, “바른 믿음을 가지라.” 좁은 문(예수님)으로 들어가는 방법 중의 하나는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좁은 문(예수님)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잔치의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고 말한다. 나는 주님을 아는데 주님은 왜 나를 모른다고 하실까? 여기에서 주님을 믿는 믿음이 바른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들었어도 자기중심의 사고구조에 의하여 생활을 하면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기 생각을 따라서 살았을 뿐이며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재정리 하여보자. “믿음”에는 “faith”와 “belief"의 두 가지가 있다. "faith"는 머리와 마음속에 내재한 ”믿음“이다. 정보나 지식의 영향을 받고 갖게 된 ”믿음, 확신“등이다. ”belief"는 “행동화 된 믿음”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4, 26). 입과 손발로 예수님을 시인하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는 삶이 곧 “belief"의 ”믿음“이다. 따라서 바른 ”faith"에 바른 “belief"가 연결되어야 한다.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떤다“(약2:19)고 하면서 귀신의 행위가 악한 것임을 염두에 두고 바른 믿음(faith)이 나쁜 행위를 보이는 예를 들었다.
셋째, “자만심을 버리라.” 자기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앞장서서 천국을 향한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 같으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만심과 교만은 스스로 도취되어 살아가게 만든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30). 자기의 신앙(faith)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엄한 경고다. 먼저 된 자는 이미 천국잔치에 들어갔으며 나중 된 자는 문이 닫힌 후에 문을 두드리는 자를 의미한다.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3:12)고 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순종하기에 전 생애를 경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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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14:1-6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자세와 원리를 말씀하여 주셨다. 이것은 구원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원칙인 것이다.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한 수종병(고창병: 몸속의 물이 배설되지 못하여 몸이 부푸는 질병) 든 사람을 보시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라고 하였다. “어떻게 치유하셨는가”가 아니라 “언제 누구를 왜 치유하셨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일하지 못한다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지체하지 않고(즉시, 곧)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기본자세를 의미한다.
1.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은 당신의 자녀이며 당신이 소유한 생명이다. 누구라도 자기의 친 아들이나 아끼는 소가 물에 빠져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구원을 베푼다. 예수님과 구원의 대상인 백성은 하나의 몸을 이루며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신다. 나와 너의 일체감 때문에 물속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원하신다. 더러운 죄악의 구덩이라 할지라도 뛰어들어 오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2.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은 사랑하는 자녀이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다. 사랑의 법은 어떠한 율법이나 제도보다 강하다. 육신의 어머니는 혹시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실증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3. 예수님은 구원의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물에 빠진 자들을 곧(즉시) 건져내어야 살릴 수 있다고 하셨다. 구원의 은총은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라도 구원이 필요한 때와 장소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즉시 뻗쳐진다. 수종병 환자는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다. 먼저 예수님이 그를 보시는 즉시 이끌어내어 병을 고쳐주시고 보내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랑과 구원은 원인과 결과이며 시작과 종결이며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 누가복음 14:7-11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는 영적 겸손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1.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으셨으나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서 수종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겸손함을 보여주셨다. 잔치자리에는 주인과 가까운 곳이 상좌가 된다. 또 어떤 모임의 앞좌석에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는 상석이다. 이런 곳으로 먼저 가서 앉으면 그의 “자존심”이 나타난다. 성경원어에서 “자존심”이란 “방랑인 또는 유랑인”(떠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다. 자존심을 나타내는 사람의 마음은 안정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태에 있다. 인간의 죄악성은 자존심으로 인하여 더욱 나쁘게 자라고 있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질병이다. 자기도취, 자기방어, 자기정당화, 및 자기중요성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2. 예수님께서 “말석에 앉으라,”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핀다면 스스로 낮아질 수 있으며 자연히 말석에 가게 되는 상태”임을 가리키고 계신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25:6-7)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하여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지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칭찬과 인정을 사람들에게 받으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교회의 직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이다.
* 누가복음 14:15-24에서 예수님은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잔치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잔치임을 확인하고 참석할 것을 권유하셨다. 한 유대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 됩니다”(15). 예수님은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여 주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또 의인들과 선지자들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잔치의 초대장을 받고나서 예수님이 상을 다 차려놓고 초청할 때는 참석하기를 거절하였다는 비유를 말씀하여 주셨다. 초청을 수락하고도 참석하지 못하는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1.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불가불 나가서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의 천국잔치보다는 자기의 소유물에 있다는 의도를 분명히 표명하였다.
2.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열 마리)를 샀으므로 그것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는 소를 살 때 시험해 보지도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는 큰 잔치에 가서 시간을 소비하기 보다는 농장에서 자기 일을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하였다.
3. 세 번째 사람은 자기라 장가들었으므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24:5). 규정의 명시된 것을 구실 삼아 큰 잔치의 중요성을 뒤로하고 자기와 가정의 즐거움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4. 이러한 세 사람들은 잔치 주인의 분노를 자아냈고 그들을 위한 잔치 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자리를 경시하고 배척하였다. 영원한 축복의 자리를 버리고 현세의 물질적 축복의 자리를 택하였다.
5. 잠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6. 우리들은 “내게 오라. 나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잔치에 준비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예” 하고 나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 누가복음 4:25-27에서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제자의 도리는 큰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눅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 위의 요구는 한 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의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 둘째, 사랑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혈연관계”다. 피보다 더 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과 맺어진 “제자의 도”는 혈연관계보다 더 진하다. 본문에서 혈연관계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적대감정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나머지 “미워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비교의 논법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과 동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과 멸시와 천대와 죽음까지도 제자들에게 다 내어주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진다는 “제자의 도”를 의미한다. 구원을 위하여서라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언제 어디에서나 지고 감당하게 된다.
* 누가복음 4:28-35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제자가 되기 위한 계획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계획과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뜻으로 1) 망대를 세우는 비유 2) 전쟁하는 왕의 비유 3) 좋은 소금의 비유를 가르쳐주셨다.
1. 누구든지 망대를 세울 때에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지도 않고 서둘러 시작하였다가 중단하면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 하리라(롬10:33)고 하셨다. 부끄러움이란 죄악의 결과로 발생하는 형벌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끄러움(수치)를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무조건 믿고 따르고 나서면 결국 수치를 당하고야 만다. 망대를 세우겠다는 것은 투자다. 투자 없는 이익을 기대하는 것은 도적질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노력도 하지 않고 투자도 하지 않고 영광만 취하려고 하는 자는 수치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2. 어떤 왕이던지 전쟁을 하려면 자기의 전력을 먼저 점검하여야 적과 대항하여 패배하는 수욕을 당하지 않게 된다. 만일 자기의 전력이 부족하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도 전쟁(영적)이다. 제자가 영적전쟁이나 육적전쟁에서 패배만 일삼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의 대상이 될 것이다. 제자들은 말씀의 검을 가지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무찌를 수 있는 실력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고 말씀하셨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좋은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다시 짜게 할 수도 없고 아무데도 사용할 수 없고 내어버릴 수밖에 없는 무용지물이 된다고 하셨다. 소금은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 순도가 있다. 그런데 높은 순도의 소금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소금을 봉급으로 받기도 하였다. 소금의 가치가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인답지 못한 군인을 “소금보다도 못한 녀석”이라고 비난하였다.
4. 자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실력, 자기 재력, 자기 경험을 가지고 복음 사업과 구령 사업을 하면 반드시 수치를 당하고야 만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의 요구에 절대복종하여 생명 까지도 내어놓고 따르고 배우고 노력하고 희생하리라는 결단을 가지고 실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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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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