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상을 이기는 믿음과 소망 (눅12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 12장의 배경은 이러하다. 11:37에서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고 그 집에 가셨다. 그런데 손을 씻지 아니하고 식틱에 앉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초대석이 아니라 반항과 역행이 내포된 만행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서슴치 않고 그들의 위선적 행동에 대하여 엄한 교훈을 베풀어주셨다.
1. 예수님은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성경말씀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정이 없다. 유출병 환자가 무엇을 만지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정은 있다(레15:11). 이것은 별도의 규정이다. 랍비들은 이 규정을 사람의 경건생활에 적용하여 식사 전에 손을 씻도록 가르쳤다. 모세의 율법조항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추가한 사항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과 관계가 없으므로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셨다. 바리새인은 불쾌하게 여기고 반항하였던 것이다.
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은 약 6천 명 정도 되었다. 그들의 삶은 외형적, 형식적, 율법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생활태도는 수정이 요구되었다.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셨다.
첫째, 속사람부터 정결케 하라.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11:40-41).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그 동기를 먼저 보시므로 사랑과 순결의 마음으로 행하는 일을 원하신다.
둘째, 중요한 율법을 먼저 실천하라.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왜 구제와 십일조와 예배의 행위를 하는가? 결코 현세의 축복이나 내세의 보상을 받기 위함이 우선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구원을 위한 신앙 활동이 동기가 되는 행위인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는 동기를 따르는 것이다.
* 누가복음 12장에 들어서면 11장의 배경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된다. 초청 받은 바리새인 집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시게 된다. 수많은 무리들의 관심은 영적 진리를 들으려는데 있지 않고 기적을 보거나 자기들의 요구를 채우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종교적 권력자들은 진을 치고 위협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11:53-54). 예수님과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의 영향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항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 마음에 간직하고 영적 투쟁에 임할 자세를 갖추도록 중요한 교훈을 하여주셨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 위선은 “화”(저주, woes)를 자초하는 무서운 죄악이다. 그 “화”의 구체적인 조항을 예수님은 11:42-52에서 이미 요약하여 주셨다.
첫째, 바르게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행위는 화를 자초한다(42): 모든 수확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옳은 행위지만 공의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미가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 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 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 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은 십일조의 행위를 강조하시되 공의와 사랑과 함께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
둘째,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려는 행위는 화를 자초한다(43): 율법을 전하여 준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다”(민12:3)는 기록이 저들의 마음에 새겨지지 못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위치를 높이려는 자만심과 함께 사람의 영광을 취하려고 하였다.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
셋째, 위선적인 행위는 화를 자초한다(44):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무덤은 부정하므로 무덤에 접촉하는 것도 부정하다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표식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르고 밟고 다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화가 미치도록 나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꾸중이다.
넷째, 남에게 어려운 짐을 메우게 하는 자는 화를 자초한다(46):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세칙을 만들었다. 365종의 하지 말라는 금지세칙과 248종의 하라는 명령세칙을 지키도록 강요하였다. 다른 사람의 짐은 덜어주는 것이 마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기들은 손가락을 하나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섯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죽이는 자는 화를 자초한다(47): 그들은 자기들의 유일을 위하여서는 살인도 저질렀다. 히브리 성경에서 아벨은 첫 순교자이며(창4장) 사가랴는 마지막 순교자(대하24장)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공모자들이다. 이 패역한 세대는 복음 전도자들은 핍박하고 살해하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지식의 열쇄를 독점하면 화를 자초한다(52):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는데 게으르고 자기들의 유익과 전통을 고수하는데 매우 열심이었다. 사람의 학설과 주장을 하나님의 계시인양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성경말씀의 모든 주제와 해석은 바로 예수님에게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관련 없는 성경읽기와 성경연구, 예수님 없는 논리와 철학, 예수님이 배제된 윤리와 사상, 예수님을 망각한 예화와 이야기가 더 핵심을 이루고 거기에서 흥미를 느끼게 된다면 그러한 활동은 화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드리지 못한 것과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한 순간이라고 잊어버리고 성경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들은 너무나도 무거운 멍에와 짐에 눌리어 자유를 잃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 누가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제자들이 염두에 두고 지켜야 할 생활태도와 자세에 대하여 자상하게 가르쳐주신 내용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바리새인들 같이 어떤 규정을 만들어 가르치신 것이 아니며 생각과 정신의 기본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언급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누가복음 12장을 읽어가면서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관찰된 조항을 조목조목 기록하고 그 말씀의 뜻과 그 말씀을 하게 된 동기를 살피되 언어적 배경과 생활의 배경 등을 곁들여 진리를 파악하고 그리고 나서 그 원리들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 누가복음 12:1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위선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위선”(hypocrisy)이란 헬라어 원어에서 “극장 용어”이며 극중의 인물을 묘사하기 위한 “가면, 탈”이며 “배우” 또는 “연기”를 뜻하는 말이다. 배우는 연기를 잘 하여서 청중들에게 미리 조작된 각본의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얼굴 생김새와 사생활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훌륭한 연기만으로 관중들의 호응을 받는다. 바리새인들은 배우들의 연기와 같은 위선을 보임으로서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누룩”(leaven)은 빵을 부풀게 하는 효소다. 적은 양의 밀가루를 부풀려서 많고 크게 보이려고 사용한다. 예수님은 “누룩”과 “위선”을 동일시하였다. 사실(진실)과는 다르게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동질이며 동의어와 같다. 이러한 위선자들이 세력을 가지고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외면을 당한다. 예수님과 복음 뿐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냉대와 박해를 가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항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핵심배경이 되는 귀중한 말씀을 하셨다.
첫째,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12:32).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31)는 주님의 부탁이셨다.
둘째,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12:49), “내가 세상을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는 심판과 구원의 엄한 선포였다. 더 구체적인 기록이 49-53절에 나온다.
* 누가복음 12:49-53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과 세례와 분쟁이라는 심판의 표준과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아닌 자들이 구별 될 것을 말씀하여 주셨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첫째, 불(Fire):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불을 심판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 심판의 불은 이방 백성들에게 내려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에서 제외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한 결코 심판과 형벌에서 제외될 수 없고 이방인과 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강경한 말씀이다. 모든 사람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심판과 형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들 대신 그 심판과 형벌을 받게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받으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형벌이 면제되었으나 예수님을 배척한 자들은 면제되지 못한다.
둘째, 세례(Baptism): 예수님은 받으실 세례가 있다고 하셨다. 십자가의 심판과 형벌을 뜻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십자가에 동참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이후에 고난의 세례인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는 목숨까지도 내놓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에 동참하게 되었다.
셋째, 분쟁(Division):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지 않고 도리어 분쟁케 하러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날로부터 세상에는 분쟁(division)과 분리(separation)가 선포되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가 선포되었다. 이 천사의 찬양은 분쟁과 분리의 선포다. 한 가정 안에서부터 평화를 누리는 자와 누리지 못하는 자가 나누어진다는 예언이었다. 평화의 선물을 받은 자들에게는 위선적인 태도, 탐욕의 생활, 염려와 근심의 시험이 물러간다.
그리스도인은 불과 세례와 분쟁을 통하여 육체적 고난을 받을 때에도 영혼의 평안과 천국의 소망으로 기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약속과 언약을 따라서 확신을 가지고 살 때에 “하지 말라”(Do not)의 사항을 강조하여 주셨다.
눅12: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 을 두려워하지 말라 (Do not be afraid).
눅12: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Do not be afraid)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 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Do not worry).
눅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 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Do not worry).
눅12: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do not set your heart) 근심하지도 말라(do not worry about it).
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Do not be afraid)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 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 염려(Gk. merimnate; worry)라는 말은 헬라 원어에서 “위로 이끌려져 있는”(raised up) 또는 “공중에 떠 있는”(suspended in air) 어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결정적 사항이 아닌 것을 “사실화 하고” “현실화 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한 “생각,” “언어,” “행동” 들을 삼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현실에 사는 사람은 현실에 충실하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또 “염려”는 원어에서 “탈선행위” 또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염려에 사로잡혀 있으면 제자의 본분과 사명에서 탈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된다. 종합하여 보면 “염려”란 백해무익하며 불필요하며 무가치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연의 무엇보다 자녀에게 두고 있으므로 자녀의 삶은 염려와는 관계가 전무하다. 자녀인 우리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
*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신 사항은 무엇인가?
눅12: 1.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Beware of).
눅12: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Fear Him).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Fear Him).
* 두려워하다(Gk. phobeo; fear)는 단어는 신구약에서 다양한 형태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Fear Him)고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와 사랑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는 우리 사람들은 “공경”과 “존경”으로 엎드리게 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여야 한다.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Beware of covetousness)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 “탐심”(Gk. pleonexia)이라는 원어는 “pleon"(more, 더), “echo”(to have, 가지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더 가지다(소유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더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넉넉하게 가진 자도 만족이 없고 불만을 쉴 새 없이 일으키고 더 가지려고 하명 목표 설정을 “더 높고” “더 많게” 하면서 달려간다. 탐욕과 소유를 아울러 증진시키며 삶을 영위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귀중함”을 강조하신다. 탐욕과 소유로 생명이 손상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에 의존하지 않는다.
골 3: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 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 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 라
* 예수님은 인간의 탐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될 수 없으시다. 따라서 유업을 나누는 일에의 재판장이 아니시다. 예수님의 분명한 자세를 본다.
가. 예수님의 지상사명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있지 않고 영혼구원에 있다.
나. 예수님은 사람이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양심의 결정에 압력을 가하지 않으신다.
다. 예수님은 재산의 유업보다 천국의 유업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을 가르치신다.
라. 예수님은 천국백성의 지상 활동이 공의와 사랑에 기초하여야 함을 가르치신다.
* 눅12:16-21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가 풍성한 수확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창고를 크게 짓고 자기만을 위한 소유물이라는 사고가 문제다. 그는 죽은 후의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극을 안고 있었다. 성경말씀에서는 재물의 부요를 축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땅에 있는 재물은 사라지고 마는 (좀, 동록, 도적 등) 불안의 요소가 될 뿐이다. 또 부요의 소유는 일시적이다 (cf.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1:10-11). 다윗 왕도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6-7)라고 하였다. 탐심은 눈을 가리며 소망을 잃게 만든다.
딤전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 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눅12: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seek the kingdom of God)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는 말씀은 “기도하라”는 말씀과 동의어로 알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seek, ask, knock"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Provide bags)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 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Let your waist be girded and your lamps burning).
눅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 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Be like man).
눅12: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Be ready).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 리라 하시니라.
눅12: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make every effort)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lest he drag you to the judge).
* 누가복음 12장을 망원경으로 보듯이 관찰하면 위선적 행동이나 탐욕적 생활이나 염려와 시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차원 높은 해결책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것은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라는 것이다. 내일을 사는 자는 오늘의 시험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내일 그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 소망을 분명히 가진 사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신앙의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면서 맡겨진 일을 진실하게 수행하면 현실의 문제점은 자연히 해결되고 아울러 내일을 대비하는 축복도 저축하는 셈이 된다.
* 눅12:35-44에서 깨어있는 종의 비유를 보자. 여기에서는 세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된다.
첫째, 종은 성장한 모습을 늘 지닌다. 주인이 모든 것을 맡긴 종은 성장한 사람이다. 유아도 어린아이도 미성년자도 아니다. 스스로 과도한 작업도 해 낼 수 있는 성인이다. 집안일을 책임 있게 돌보고 집안사람들을 돌볼 능력이 갖추어져 있는 성숙한 또 전문적 관리인이다.
둘째. 종은 준비된 자세를 늘 갖춘다. 유대인 종들은 작업복이 따로 없다. 허리에 띠를 띠고 긴 옷자락은 허리춤에 찔러 놓는다. 그러한 모습은 늘 준비된 자세를 의미한다. 마음이 그러하고 몸이 그러하고 의상이 그러한 조화를 이룬다. 섬기기 위하여 존재한다. 결코 섬김을 받으려고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준비된 자는 적시에 취할 것을 취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셋때, 종은 민첩한 활동을 늘 행한다. 종은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요구를 하여 오더라도 거기에 대응하는 민첩성과 예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복음사역의 민첩성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 성장한 종, 준비된 종, 민첩한 종은 놀라운 축복이 증여되고 있음을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강조하여 주셨다.
눅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눅12: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12: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종이 받는 축복은 첫째, 주인과의 동일성(identity)이며, 둘째, 주인의 소유와의 동일성이다. 놀라운 영적 축복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종들에게 모든 사역을 맡기시고 뒷받침하고 계신다.
---------------------------------------------------------------------------------------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