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9일 화요일

15.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눅20-21장)

    15.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20-21)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 19장 후반부터 21장까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내에서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20-21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20:1에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성전청결을 감행하실 때에 성전의 기능을 언급하시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9:46)고 하셨다. 성전 내에서 모든 복음을 가르쳐주시고 결론으로 주신 말씀은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20-21장을 공부하면서 기도하여야 할 내용과 제목을 발견하고 그 일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  (dissipation, drunkenness and the anxieties of life)로 마음이 둔하여지  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   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특별히 위의 34절의 말씀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을 기억나게 한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life's worries, riches and pleasures)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8:14). “이생의 염려생활의 염려,” “재물방탕함,” “향락술 취함은 서로 상응하는 내용의 단어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소가 생명의 말씀을 들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보게 되며, 하나님을 떠나 인간 중심의 삶에만 편집되어 있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것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기도로 하나님과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 누가복음 20:1-8(cf. 21:23-27)에는 가르치는 자의 권위는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그 출처에 관하여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19:47-48에서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 하였더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에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일에 전념하셨다. 21:37-38를 보면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고 하였다.

1.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되어 매일 아침부터 성전에 몰려든 사실은 놀라운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복음)을 듣는 백성들은 영적감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구도 백성들의 모임을 막을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어느 누구라도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셨다. 비록 사람들이 인정하는 학문적 배경도 없고 사회적 기관에서 허락하는 지위를 가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권위라는 것은 합법적,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차원에서 볼 때 인간 활동에 영향력을 끼치며 조정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진리와 순수성을 나타내는 힘과 능력이었다. 당시의 종교 정치의 권위자들은 인간 탐욕으로 말미암는 비진리와 허위에 연루되어 있음으로써 예수님의 권위에 필적할 수 없는 무능함을 나타내었다.
 
3.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 성전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일, 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 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 성전중심의 활동을 펼치는데 있어서는 그 활동을 허락하고 보장하는 기관과 기관장이 누구인지 증명되어야만 한다. 권위의 체계와 구조를 분명하게 규명한 후에 예수님의 권위도 법적조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접근하게 된 동기다.
 
4. 예수님의 권위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3년 동안이나 각처에서 나타났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은 이미 예수님의 권위를 규명해내어야 하며 백성들이 이러한 권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방향제시를 해 주여야만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일은 도외시하였고 자기들의 신분에 도전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제거하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5.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이 서있는 행랑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접근하여 불법집회(?)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복음의 가르침)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0:2). 예수님은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있는 그들에게 사람의 권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문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4).
 
6. 세례요한의 사역은 어느 조직이나 기관의 권위나 후원을 받지 않았어도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역으로 인정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고 세례요한의 절대적인 권위와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예수님의 권위와 세례요한의 권위는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절대적인 권위라는 것을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시사 하셨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기 때문에 그의 권위를 인정하면 자연히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며, 그를 부정하면 수많은 사람이 받은 회개의 세례를 부정하게 되는 결론이 나온다. 세례요한을 인정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는 미묘한 처지에 빠진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에 예수님은 나도 너희에게 나의 권위에 대하여 말하여 주지 안 하겠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셨다.
 
7.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절대권위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가르침이 과연 하나님께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의 표준이 무엇인지 배우고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14-18에서 규명하여 주신다.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8. 세상의 권위는 지배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도의 권위는 영향력에 있다. 지배력은 잠시 있다가 없어진다. 그러나 영향력은 영원한 것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인 반면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아름다운 지혜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순종하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이렇게 되도록 우리는 기도하여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드려야 한다.
 
* 누가복음 20:9-18(cf. 21:33-46)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천국백성의 자격을 상실하였다고 해설하여 주셨다.
 
1. 포도원을 소유한 주인은 포도원 사업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다 갖춘 후에 포도원의 운영을 농부들에게 맡겼다.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정한 때에 주인에게 바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포도원 주인은 자기 아들까지 보내어 포도원의 수입을 거두어드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들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러한 악한 농부들을 없애버리고 포도원의 운영을 다른 농부들에게 맡기게 되었다는 것이 비유의 내용이다.
 
2.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은 극상품 최고의 포도나무를 심고 최상급의 포도원을 만들어서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두기로 계획하셨으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들포도를 맺었기 때문에 포도원의 진가를 잃어버리고 결국은 황폐하게 되었다. 이사야 5:7의 말씀은 이러하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3.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 놓으신 포도원과 같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백성을 가꾸고 기르는 포도원의 농부들과도 같다.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드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만 채웠다.
 
4. 따라서 예수님의 엄하신 경고가 내려졌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 심판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빼앗겨졌다는 것이며, 둘째, 그 하나님의 나라가 열매를 맺고 수입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아는 이방 백성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본래의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천국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을 때까지는 천국백성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5.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죽임으로서 하나님께 돌려보낼 영광을 가로챘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시편 118:25의 말씀을 인용하여 호산나”(이제 구하옵나니 구원하옵소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찬양을 소리 높여 불렀으나 종교지도자들은 배척하였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인용한 시편 118편을 그대로 인용하셨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118:22-23).
 
6. 머릿돌은 천국건설의 기초다. 돌과 반석은 구약시대로부터 견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머릿돌이시다. 이 머릿돌은 천국건설의 기초도 되지만 심판의 표준도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20:18)고 말씀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을 향한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7.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고 하였다. 자기를 예수님에게 던져버리고 깨어지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우리들은 거두어들인 포도원의 열매와 수입을 주님에게 드려야 한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의 아름다운 손길을 베푸는 최상급의 포도원과 농부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 누가복음 20:19-26(cf. 22:15-22)에서 예수님은 세금에 관한 해답을 하여주셨다. 예수님의 권위가 종교기관의 권위나 후광을 입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가지고 매장시키려고 하였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절대적인 신적 권위에 앞도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많은 대중이 듣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배척한 자는 누구도 천국백성이 되는 자격을 상실한다고 권위 있게 가르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을 더욱 당황하게 하였다. 그들은 후퇴하지 않고 교묘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씌우려고 하였다. 그들은 세금에 관한 정치적인 질문을 가지고 나왔다.

1.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야합하여 음모를 꾸몄다. 본래 그들은 헤롯당과는 정치적으로 적대시하는 사이였다. 바리새인들은 반로마정부파이며 헤롯당은 친로마정부파였다. 로마정부에서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poll tax)의 경우, 바리새인들은 세금을 비치는데 반대하였고 헤롯당은 찬성하였다. 이러한 세금징수의 문제는 찬반을 결정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이므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었다.
 
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규명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는 대답에는 로마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넣고 그렇다는 대답에는 유대인에 대한 반역자로 규명하려는 처사였다.
 
3. 많은 군중이 둘러쌓아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동전인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반문하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25).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책잡기는커녕 오히려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돌아서고야 말았다.
 
4. 예수님의 해답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세 가지의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다스리는 자를 존경하고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도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3:20). 우리는 속하여 있는 국가 및 사회의 법규와 질서를 존중하여야 하며 다스리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이사나 다스리는 자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겨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어떤 지배자도 정치인도 종교의 자유를 봉쇄할 수는 없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줄 알아야 자기의 나라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시민이 될 수 있다.
 
셋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소유물이란 것이다. 인간은 죄악을 범한 후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인간 죄악의 대가를 당신이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었다. 참다운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 누가복음 20:27-40(cf. 22:23-33)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문제의 해답을 하여주셨다. 예수님의 권위와 가르침에서 결점을 찾아내려고 도전하였던 무리 중에는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였고 영의 세계를 부정하였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바리새인들을 공격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관한 교리를 명백하게 설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기세가 당당하였던 것이다.
 
1. 예수님은 부활신앙을 기초로 하여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사역을 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시고 생명의 부활을 약속하여 주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고 말씀하셨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도전하였고 부활신앙은 모호하여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공격하게 된 것이었다.
 
2. 사두개인들은 모세5경중에서 신명기 25:5-10에 나오는 결혼제도에 관한 규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였다. 형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가문의 이름을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은 7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취하였던 한 아내는 부활하게 되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여왔다.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죽은 후의 일을 판단하려는 의도는 부활을 부정하는 교묘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그들은 부활에 관한 진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3.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주시기 위하여 신명기 3:6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다는 과거형의 하나님, 옛날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조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는 현재형의 하나님, 즉 지금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므로 시대와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지 않으신다.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권한으로 주시는 것이요 결코 모세가 주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과 함께 죽지 않고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육체적 부활을 보장하고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4. 예수님은 그들에게 천국생활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다.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20:35-36). 하늘나라의 생활은 지상의 생활과 다르다. 저곳에는 죽음이 없으므로 결혼도 필요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서 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천사들이 결혼하지고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지도 않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천사가 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부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이름도 각각 부르시며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5. 우리들은 성경말씀의 기록을 떠나서는 사후의 일을 대하여 다른 주장을 내세울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샤두개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들은 진리가 깨달아질 때마다 더욱 경외감을 가지고 묵묵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 누가복음 20:41-44(cf. 22:41-46)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메시아)에 관하여 중요한 질문을 하셨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22:42).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즉시 대답하였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대변하였던 것이다. 구약의 기록은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      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      고하게 하리라
시편78: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0.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 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        들을 지도 하였도다
미가 5: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1.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바른 신앙이 생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다윗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시편 110:1의 기록(=다윗의 시)를 인용하셨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다윗의 시는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분은 그리스도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신앙인이었다. 그리스도(메시아)를 자기의 주님”(the Lord)으로 알고 예배의 대상으로 섬겼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20:44)고 반문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메시아)다윗의 자손이라고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다윗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시편의 말씀을 남겼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와 정확성을 부정하고 반박하며 나설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2. 그리스도는 사람의 자손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한다. 성령님은 다윗을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게 하셨으므로 다윗은 그리스도주님”(Lord)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보면 다윗의 주님이 되시며, 사람으로만 보면 다윗의 자손이 된다.
 
3. 예수님은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22:16)고 하셨다. 예수님은 다윗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됨과 동시에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셨고 처음부터 세상을 비추는 영광의 존재이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인간 스승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볼 수 없었고 보았더라도 신적 권위를 가지신 메시아로 볼 수 없었다. 이런 그들의 무지를 예수님은 깨우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가르쳐주신 것이었다.
 
4. 시편 110:1의 말씀은 예수님의 온전하신 신성과 인성을 가리키는 구절이며 예수님만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구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해설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5.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고 직접 물어보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셨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믿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주님이 되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리들이 섬기는 예수님은 온 인류가 무릎 꿇고 경배하여야 할 주의 주”(Lord of lords) “왕의 왕”(King of kings)이시다. 우리들은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 누가복음 20:45-47(cf. 12:38-40)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교만한 삶과 위선적 행위를 경계하고 겸손히 아웃을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셨다.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His disciples)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1.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종교지도자들의 바르지 못한 생활태도를 보시면서 장차 복음의 사역자이며 성도들의 지도자로 나서게 될 제자들에게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될 것을 부정적 차원에서 심도 있게 명령하고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를 못하고 자기들의 욕심에 가득 차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 후에 예수님은 긍정적 차원에서 사역자의 본분을 정의하여 주셨다. 그것은 바로 섬기는 자의 자세로 일관하는 생애를 살라는 것이었다.
 
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     는 자와 같을 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누가복음 21:1-4(cf. 12:41-44)에서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드리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다.
1. 예루살렘 성전 안에 여인의 뜰에는 13개의 헌금함이 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각 헌금함은 나팔 모양으로 되어있었고 위에서 헌금을 넣으면 아래에서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부자들은 많은 헌금을 넣으면서 돈 떨어지는 소리로 성전을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데 한 과부가 동전 두 잎을 넣었을 때에는 가장 단조로운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2. 사람들은 얼마를 바쳤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바친 자가 얼마의 소유를 남기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바친 액수에 관심을 가지지만 바친 액수의 비율은 얼마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많이 바친 자의 영향력을 인정하지만 정성 드려 바친 예물의 영향력을 모른다.
 
3. 한 과부가 헌금 넣은 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부르시고 사람들이 관찰하지 못한 깊은 내용과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가르쳐주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꾀뚤어 보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면적인 관찰과는 다른 가르침을 주실 수 있다. 한 과부가 드린 동전 두 잎이 그녀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라는 것을 언급하셨다. 성도의 사랑과 자비, 순종과 헌신의 구체적인 표현은 헌금과 구제의 행위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과부를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셨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처지와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사랑과 기쁨으로 섬기는 자의 생애를 살라고 하셨다.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줄 것을 원하셨다.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린 마음이 귀한 것과 같이 성도들도 마음을 먼저 바칠 때 고귀한 신앙인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교훈이다.
 
둘째, 하나님은 성도들이 맡겨진 의무를 충실하게 실천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과부는 매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기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성전에 찾아와 하나님을 만나 뵈었다. 또 하나님께 나올 때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감사의 제물을 마땅히 여호와의 전으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였다 (cf.대하29:31. 이에 히스기야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제 스스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 하니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오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또한 번제물도 가져오니).
 
4. 오늘날도 구원의 사역은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성도들의 마음과 헌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이름도 밝히지 않으시고 한 과부의 마음과 정성의 중요성을 지적하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와 같이 도처에서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도 있는 처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 누가복음 21:5-24의 내용은 옛 성전의 파괴와 새 성전의 설립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에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3:16)는 제시에서 찾아보게 된다. 그 구체적인 작업은 옛 성전의 파괴와 새 성전의 설립이라는 명제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실 때에 어떤 사람들이 성전건물의 미모와 우아함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때에 예수님은 성전건물에 대한 언급은 안하시고 성전파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1:6). 46년 동안 지었어도 완성을 못보고 있던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때가 과연 언제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 바로 누가복음 21:20-24의 말씀이다.
 
2.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후 40년만인 주후 70년에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처참한 파멸을 당하고야 말았다. 타이터스(Titus)라는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내용은 대환란의 소용돌이를 이루었다(19:43-44). 이때에 살해된 사람은 60만 명이 넘었으며 또 10만 명도 더 넘는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기록을 남겼다. 이때의 대환란은 장차 적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가져올 대환란을 연상하며 비교할 때에 소규모였을 뿐 아니라 하나의 연습에 불과하였다고 성서학자들은 보고 있다.
 
3.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부터 청결케 하시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 자체이신 예수님의 육체가 새 성전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다(2:19-20). 유대교의 종교적 배경을 가지시고 유대인의 메시아로 유대인의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에 옛 성전을 몸소 청결케 하는 작업을 감행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셨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어야만 하였으나 소경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옛것만을 붙들고 있었고 새 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4.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임재하심으로서 새 성전인 예수님의 몸에서 교회가 나왔고 옛 성전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이 신봉하였던 유대교가 종식이 되었다는 종말을 선포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새 성전, 새 교회 이외에는 구원과 영생이 없게 되었다. 유대인은 아직도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으나 유대교에는 더 이상 구원이 없다는 것을 저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5. 예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낡은 옛 세계는 파괴되고 새 세계가 이루어질 마지막 때에 관하여서도 아울러 말씀하여주셨다. 새 세계가 이루어지기 위하여서는 세계적인 대환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세대의 징조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 때에 징조를 동시에 예언하여 주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포위된 것”(21:20)은 옛 이스라엘 백성과 그 세대가 보았던 종말의 징조였다. 그러나 장차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21:27)은 온 백성이 당할 종말의 징조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6.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교회를 통한 구원을 바로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영원한 천국이 아니다. 천국을 향하여 가는 구원선과 같다고 하겠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방주였으나 그 속에는 잡다한 소리와 냄새로 혼탁 되어 있었다. 우리들도 비록 여러 가지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는 교회에 속하여 있으나 교회가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들은 언제나 새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잘 유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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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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