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님을 알고 믿고 따르자 (눅3-4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이 기록된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신 예수님” 즉 “계획과 성취”라는 총제목(Title)을 가지고 우리는 누가복음 1-2장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나타난 은혜”라는 주제(Main Idea)를 따라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에게 나타난 은혜”에 대하여 관찰하였다. 이 사람들은 “메시아”를 지목하기 위하여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받고 나타났다.
* 누가복음 3-4장부터는 그 “계획과 성취”가 예비하신 사람들에게서부터 “예비하신 메시아”로 초점이 완전히 바꾸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3-4장의 주제(Main Idea)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메시아의 계획과 준비”가 되며 그 내용을 관찰하도록 우리를 이끌어드린다. 우리는 여기에서 2장 마지막 부분(눅2:41-52)에 기록된 메시아 예수님의 성장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예수님의 사역 준비에 관한 기록을 관찰하려고 한다.
* 누가복음 제3-4장 (주제: 하나님이 예비하신 메시아의 계획과 준비)
부 주제 1. 메시아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례요한의 세례: 눅3:1-20
부 주제 2. 메시아 예수님이 받으신 준비, 세례: 눅3:21-22
부 주제 3.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들: 눅3:23-38
부 주제 4. 메시아 예수님이 받으신 준비, 시험: 눅4:1-13
부 주제 5: 메시아 예수님의 사역과 그 원리: 눅4:14-44
* 누가복음 2장에서: 부 주제 8: 예비 된 아이 예수님의 성장과 비밀: 눅2:41-52
1. 배움으로 성장하신 메시아 예수님
가.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 모든 유대인 어린이와 같이 가정교육과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셨다. 주님은 메시아로 오셨을지라도 우리와 동일한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아기 예수님이 지혜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여져 갔다”(2:40)는 기록에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조금씩 계속하여 성장하신 증거를 보여준다.
나. 유대인 가정은 지녀들을 믿음으로 키우는 영적훈련장이었다. 부모와 자식은 먼저 신앙의 유대로 맺어지며 그 다음이 혈연관계이다. 부모는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로 이끌어드렸다. 유대인의 각 지파는 가정에서 확산된 하나의 큰 단위로 발전되었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의 큰 가정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각 성도와 각 가정이 이러한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선민의 권위와 의무를 바르게 행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정 분위기에서 부모를 향한 철저한 순종을 배우시고 신앙을 키워나갔다(2:51).
디. 유대인은 아이가 12살 되면 “성인식”(Hb. barmitzvah. 율법의 아들이란 뜻)을 거행하여준다. 12살부터는 율법의 아들이 되어 이제껏 받아온 율법교육을 성인의 자격을 가지고 자의로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12살이 되면 자기의 의지로 결정한 일을 자기 스스로 행동하는 독립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도 알고 부모도 인정한다. 12살 전까지는 “얘야, 이것 해라!”는 명령으로 키웠다. 그러난 12살 성인식을 하고난 이후부터는 다르다. “얘야, 이렇게 하면 어때?” 하면서 명령이 아니라 의사를 타진한다. 부모는 명령권을 상실하며 대등한 성인과 성인으로 대화를 나누며 생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녀교육은 우리도 배워서 실천하여야 많은 가정문제가 해소될 것이다.
라. 유대인 성인은 반드시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려야 한다. 12살의 성인된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갔으나 독립된 성인의 자격을 가지고 유월절 예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든 유월절 행사가 끝나면 예루살렘 행각에서는 유명한 율법교사(랍비)들의 율법강해와 토론(질의응답)의 시간이 열리곤 하였다. 예수님은 12세의 어린성인이었으나 자의로 여기에 참석하셨던 것이다.
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2:49)고 하신 말씀은 “내가 아버지의 일에 반드시 관계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일평생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히5:8, 9)고 기록되고 있다. 순종함은 곧 배움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심이 권위가 있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달랐던 것은(막1:22) 배운 바를 순종함으로 생활 속에 실천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식과 믿음은 곧 생활로 표현되었다.
2. 아기 예수님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2:40), 또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고 하였다. 메시아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며 지혜가 자라갔다”고 하였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의 성장 기록에서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졌다”(1:80)고 하였으나 “지혜”에 관한 언급은 없다.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체 하나님을 가리킨다. “지혜”에 해당하는 언어가 신약에서는 “말씀”이다. “말씀”도 인격체 하나님을 가리킨다(요1:1-4). 메시아 예수님의 성장은 “말씀” 또는 “지혜”가 “육신을 입어 온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하나님의 사람 되심”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시작하여, “지혜로 충만, 성장”하여 하나님의 인격체로 채워지고 구비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님도 일반 사람과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인자”(the Son of Man)라는 사실을 스스로 지칭하셨다. 메시아의 놀라운 비밀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이렇게 비밀(mystery)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신약에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표현이 7회(눅11:49; 롬11:33; 고전1:21, 24, 30; 고전2:7; 엡3:10)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눅11: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 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 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3. 위의 말씀의 구절들 중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혜”에 대한 비밀을 살펴보자.
가. 말씀이라는 영어 “word"는 헬라어로 ”logos"다. 이 “logos“는 ”word“보다 광범위한 뜻을 가지고 있다. 논리(logic), 이성(reason), 구체화된 원리(organizing principle), 언어 (saying), 철학적 입장(philosophical position) 등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생명의 현상을 규명하는 생물학(biology)은 생명(bios)과 논리(logos)의 복합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시적 표현이 헬라문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헬라 철학은 생명 근원의 추구에 있어서 이미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라 철학은 ”인간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무엇이냐?“라는 질문과 명제는 제시하였으나 해답의 실마리 초차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를 향한 해답은 히브리적 사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잠언8장에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지혜“는 어떤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엄연히 하나의 ”인격체“(존재)로 나온다. 잠언8장 전장을 읽어보라. 놀라운 기록임이 곧 마음에 닥아 온다. 몇 구절들(1-4, 11-13, 22-32)을 인용해본다.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3.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다. 위의 잠언 8장의 구절들은 요한복음 서두의 시상과 흡사하다. “지혜”를 “그”라고 지적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그는 (He-Jesus Christ)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할 수 있었겠는데 하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지혜”(sophia)는 여성명사이므로 남성이신 예수님에게 적용하기 곤란하고 “지혜”와 필적하는 남성 명사인 “말씀”(logos)을 사용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요한복음 제1장 서론의 1-5절에서 “말씀”이라는 자리에 “지혜”를 도입하면 다음과 같다.
1. 태초에 지혜가 계시니라(In the beginning was the Sophia, and the Sophia was with God, and the Sophia was God). 이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지혜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2. 지혜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지혜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지혜 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지혜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 그런데 요한복음 서두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구절에서 지혜를 도입하여 “지혜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기록은 없지마는 이러한 히브리 사상 구조를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고 고린도 전서에서 선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오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라. 이제 고린도전서 1:18-24; 2:1-8에서 지혜에 관한 언급을 살펴본다.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 누가복음 제3-4장(주제: 하나님이 예비하신 메시아의 계획과 준비)에서
* 부 주제 1. 메시아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례요한의 세례: 눅3:1-20
1. 세례 요한의 중요성은 그가 예수님 앞에 먼저 와서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 준비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성경본문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3:3)고 기록하고 있다.
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왜 회개가 요구 되었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할 줄 몰랐고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고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때를 따라 제사와 제물을 드리며(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 등) 죄의 용서를 받고 있다. 회개와 용서를 받고 있으므로 별도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
나. 세례요한은 그들을 한 마디로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이다”(3:7)라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칼로 쪼개어서 더러운 죄악을 들추어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수없이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아왔다. 너희들은 조상들의 역사적 사실을 잊어버리고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뱀의 독으로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독사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없다.”
라. 그렇다고 한다면 “왜 세례가 요구되는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은 세례를 받지 않았고 오직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될 때에 받게 하였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들이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으로 취급한 것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이방인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과 같아진다는 영적 권위가 넘치는 선포를 하였던 것이다. 명목상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격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인정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돌들을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먼저 회개하고 그 회개한 증거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심에 찔림을 받고 세례요한의 면전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받은 자가 20-50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마.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바른 회개가 된다”(3:8)는 것을 세례요한은 강조하였다. “회개”(Gk. metanao)란 “마음을 바꾸는 것” 또 “방향을 돌리는 것”임을 원어에서 가르친다. 회개의 결과는 열매의 수확으로 그 진위라 판명된다. 회개는 삼단계의 내용을 포함한다.
첫째, 죄의 고백 (잠28:13; 시32:5-6; 렘2:35; 3:13).
둘째, 죄로 인한 피해 보상 (민5:6-7).
셋째, 죄의 반복에서 떠남 (히10:26-27; 1요3:9)
바. 열매 없는 회개에는 화와 진노가 따른다는 사실을 세례요한은 강조하였다. 만약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러한 나무는 도끼에 찍혀 불에 태워진다(3:9)는 엄한 경고를 하였다. 회개와 세례의 강조는 곧 오시는 메시아를 맞아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의 삶을 준비하는 급선무의 필요사안이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을 믿고 백성과 군인, 바리새인과 서기관, 많은 종교지도자들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2. 세례요한의 물세례와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님 세례와 불세례
가. 세례요한의 세례는 유대인에게 적절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서 죄를 회개하고 난 후 거룩한 새 생활을 결심하게 하는 증거로 베풀어졌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위한 독특하고도 유일한 세례였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베푸는 물세례가 제한된 지역과 제한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신다. 그는 성령님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3:16).
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성령님의 세례는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여 세계 도처에서 베풀어진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구원의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가르쳐 주셨다.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성령님의 세례를 받은 것은(행2:1-4)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예수님께서 친히 보내어주신”(눅24:49) 결과였다. 이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는 누구나 성령님의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 증거로 물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성령님의 능력과 감화가 없이는 누구라도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 세례와 그리스도 영접은 뗄 수 없는 관게를 가지고 있다.
다. 물세례의 형식은 요한의 세례나 오늘날 교회에서 시행하는 세례나 외형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요한의 세례는 구약시대의 유대인의 세례이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준비를 갖추게 한다. 한편 신약시대의 세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고전12:13) 증거 하는 세례다.
라. 요한은 예수님이 불세례를 베푸신다고 하였다. 불세례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심판의 세례를 의미한다. 심판의 세례는 세례요한이 예언한대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눅3:17) 세례다.
마. 물세례를 믿음 없이 형식적으로 받고 교인은 되었으나 성령님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알곡이 아니며 죽정이가 되어 결국은 심판의 불세례를 받게 된다.
* 부 주제 2. 메시아 예수님이 받으신 준비, 세례: 눅3:21-22
1.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받는 세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려고 하실 때에 만류하였다. “주님, 제가 도리어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님께서 제게 나오시다니요!”(마3:14), “우리는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에 복종함”을 뜻한다. 죄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에 복종하기 위하여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므로 죄와는 상관없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요구에 순종하여 죄인과 같은 모양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사53:12).
가. 본래 세례(Gk. baptizo)란 항해하는 선원들의 용어로서 “물에 잠기다”라는 말로 “죽음”을 의미하였다. 배가 파선되어 선원들이 물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면 “물에 잠긴다!” “Baptizo!"하고 외쳤다. 우리말로는 “사람 살려!”라는 비명이다. 이때 구조원이 오면 물속에 뛰어 들어가야 그들을 살려낼 수 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구조원이 물속에 뛰어든 것과 같이 죽음의 물속으로 뛰어 들어온 것과 같은 것이다.
나. 죽음 속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붙드는 순간 구출이 보장되며 생명을 다시 찾게 된다.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 예수님이 받으신 물세례는 독특하고 유일하며 단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물세례 자체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독특성과 유일성과 단회성인 이유는 받으신 세례의 전후관계와 밀접한 유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 내용들은 이러하다.
첫째,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둘째, 성령님에 감동된 세례요한의 증거가 있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셋째, 물세례와 아울러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넷째, 물세례와 아울러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라. 예수님이 받으신 물세례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써 예언자, 제사장, 왕이 되어서 구원의 사역을 공식으로 시작하신다는 선포였다. 그러므로 이 선포는 단일회적이었다. 마치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여 교회가 시작된 사건이 단일회적인 것과 같다. 단일회적인 역사일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연속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 부 주제 3.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들: 눅3:23-38
1.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과 똑 같이 족보를 가지고 계심을 누가복음 3장과 마태복음 1장에서 각각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는 30세쯤 되시니라”(눅3:23)고 하였다. 유대인의 풍습으로 30세의 연령이란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대한 일을 하는 나이로 여겼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되는 나이는 30세가 적합하다고 하였고(미4:3),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창41:46), 다윗은 나이 30세에 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삼하5:4). 예수님은 30세가 되도록 준비를 하신 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세례를 받으셨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3:22)이라는 분명한 신분을 가지시고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2.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 . . ” “그 이상 . . ” 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였다. 족보란 나뭇잎이 땅 속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연결된 줄을 보여준다. “그 이상은” 하면서 38절까지 족보의 줄을 따라 올라가면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3.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족보의 줄은 하나님의 아들 아담을 통하여 내려와서 요셉의 장인(=마리아의 부친) 헬리를 통하여 내려오고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된다. 이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과 같이 모든 인류가 아담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던 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된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 된 자격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도 가르쳐주고 있다.
4.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줄은 끊어졌으나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줄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제2의 아담)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살아있는 족보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우리들이 가진 족보는 줄을 따라 올라가면 결국은 끊어져 있기 때문에 효력이 없고 생명력이 없다. 사람들이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죽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줄을 매시고 예수님은 물속에 뛰어들어 오셔서 사람들을 붙잡아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족보는 “참인간으로써 죽은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여준다.
6.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통을 연결하여 오신 메시아이심을 가르치고 있고, 누가복음의 족보에서는 예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연결시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의 족보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든든히 연결되어 있음을 명심하자.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하나님에게까지)에 들어가나니라”(히6:19).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가 소유하는 소망의 족보가 된다.
* 부 주제 4. 메시아 예수님이 받으신 준비, 시험: 눅4:1-13
모든 시험(유혹)의 공통점 (사탄의 전략원칙)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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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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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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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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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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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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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to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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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I'll exal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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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본즉 보암직함 (the tree was pleasant to the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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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의 정욕 (the lust of the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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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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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욕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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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늘 위에 올라가리라 (I'll ascend into heaven):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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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본즉 먹음직함 (the tree was good for 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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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정욕 (the lust of the fl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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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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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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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I'll make myself like the Most High):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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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
(a tree to be desired to make one w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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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의 자랑
(the pride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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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Genesis) 제3장 [개역개정]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 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이사야 (Isaiah) 제14장 [개역개정]
1 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 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 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 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 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요한일서 (1John) 제2장 [개역개정]
1 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 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 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유혹)의 분석표 (마태4:1-11; 누가4:1-13)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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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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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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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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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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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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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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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떡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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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명하여 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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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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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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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to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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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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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위에서 뛰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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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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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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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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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욕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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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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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국영광 차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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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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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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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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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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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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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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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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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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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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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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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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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떡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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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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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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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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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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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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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위에서 뛰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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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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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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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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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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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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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국영광 차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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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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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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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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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뜻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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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르치신 시험(유혹)을 이기는 방법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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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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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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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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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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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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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to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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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poss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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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라
Take up the c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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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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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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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욕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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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pa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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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하라
Let him deny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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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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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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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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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
p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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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Follow Me(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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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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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부 주제 5: 메시아 예수님의 사역과 그 원리: 눅4:14-44
1. 예수님은 사역을 준비하시면서 물세례와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누가복음 3:21-22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고 하늘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하였다. 기도는 하늘 아버지와의 대화다. 대화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확인되었다. 그 확인이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라는 내용이다. 세례는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포기이며 자기부정이다.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위한 자기를 내어놓는 순종의 행위다. 이러한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성취됨을 나타낸다는 선포의 내용이다. 아버지의 함께 하심과 더불어 성령님이 동행하심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시행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구원(=구출)하여 내는 사역(=영적 전투)이 전개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기도(=아버지의 함께하심)와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세계에서의(눅4:6) 모든 사역을 승리로 이끌어 가실 준비를 갖추신 것이다.
3. 그러기 때문에 누가복음 4:1-2에서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full of the Holy Spirit)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led by the Spirit)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하였고, 또 4:14에는 ”성령의 능력으로(in the power of the Spirit)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news, fame, 명성)이 사방에 퍼졌고“ 라고 기록하고 있다.
4. 예수님은 이러한 영적 전투에 대한 준비를 갖추신 “메시아”가 되심을 사역의 첫 번 설교에서 확인하여 주셨다. “메시아의 첫 설교”(눅4:16-27)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메시아의 왕림(=성취)”을 만천하에 선포하셨다.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 . .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4:18)라는 이사야 61:1의 메시아 도래의 예언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4:21), 즉 “성취되었다”(fulfilled)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5. 눅4:18에서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 . .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는 말은 실상은 다음과 같다. “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 is on me, because the LORD has anointed me”(사61:1). “하나님(주님)께서 이미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에 현재 주님의 성령님이 나에게 임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은 “기름 부음 즉 메시아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메시아로 삼으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나에게 임하고 계신다” 이다. “이 예언의 말씀이 오늘(=지금) 너희들의 귀에 들려졌고 성취되었다”는 선포다. “anointed"(Gk. chrino) 라는 원어에서 ”Christ"(그리스도)가 나오며 “그리스도”는 곧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 즉 “성자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이러한 설교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다 그(예수님)를 증언하고 그(에수님)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4:22)고 하였다.
6. 눅4:31-37의 기록에서 예수님의 사역(가르치심, 설교하심, 귀신 쫓아내심, 질병 고치심)이 권위와 능력이 있음을 보고 놀랐다는 것은 위의 설명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amazed at his teaching) 이는 그 말씀(His word, His message)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All the people were amazed)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6. All the people were amazed and said to each other, "What is this teaching? With authority and power he gives orders to evil spirits and they come out!")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7. 예수님의 사역에의 “놀라움”(amazement)의 근거와 원인
가. 예수님 자신의 신성과 영성 때문이다. 본래 “놀라움”이나 “놀라다”는 표현은 네 가지의 헬라어(thaumazo, ekplesso, existemi, thambeo)에서 파생하였지만 서로 비슷한 말이며 특별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두고 하는 용어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놀라움”이 수반된다. 이 놀라움에는 “경이”(wonder)와 “황홀감” (fascination)과 “두려움”(fear)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메시지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전율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깜짝 놀라게(황홀한, 기절하게) 하는 기적(miracle)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나. 예수님 말씀(=지혜)의 생명력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as the teachers of the law)고 하였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다. 예수님은 말씀(the word, the message)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존중하시고 인용하셨다. 그러나 율법과 계명과 도덕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율법의 현존이요 율법 자체요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율법을 생활(삶 자체)과 은혜로 보여주셨다. 영원히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새 교훈으로 보여 주셨다. 율법 조항을 지켜야만 하는 얽매임에서 풀어주시고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은혜) 속에서 살게 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이다. 말씀은 생명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생명”이다. 생명이 공급되는 곳에 언제나 “새 교훈”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다. 예수님 사역의 “언어”(말씀)과 “행동”과 “사건”은 일체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현실이었다. “놀라움”이란 나타난 현상을 보고 표현한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생명의 움직임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나 객체에게서 일어난다. 피와 살과 뼈와 모든 생체 조직이 활성화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나타나는 결과는 치유, 회복, 회개, 고백, 변화, 결단, 순종, 축복, 심판 등이다. 따라서 놀라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는 곳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는 곳에서도 같은 역사가 일어난다.
라. 예수님은 “영적(spiritual) 권위”(authority)와 “능력”(power)이 나타냈기 때문이다.
가. 권위(authority): “권위”는 헬라어로 “exousia”로서 “제한 없는 행동의 자유” (unrestricted freedom of action)를 보여주는 능력(power)이다. 그러면 권위(authority)와 능력(power)은 어떻게 다른가? 권위는 어떤 능력을 사용하고 보여주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영향을 미치는 능력”은 관계 사이에서 표현된다. 순경의 복장은 권위를 행사하는 능력이 있다. 여자 순경이 얼마든지 대형트럭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사탄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권위자이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계심을 보여 주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성령님의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히12:2). 권위를 보여주시고 그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마28:19-20)고 말씀하셨다.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줄 때 세상의 어떤 권위라도 능가하는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권위와 더불어 예수님을 증언하는 “성경의 권위”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나. 능력(power): “능력”은 헬라어로 “dunamis”로서 “실제적인 힘”(actual power)과 “잠재적인 힘”(potential power)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이나마이트(dynamite)는 여기에 출처를 두는 단어로 굉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위력이 “파괴력” 및 “황폐화”(devastate)에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은 생산적이며 창조적이며 불변성(immutability)과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도 자연도 사람도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영적 존재인 천사도 사탄도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피조물의 제한적 능력이라는 점에 큰 차이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1:19에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his incomparably great power)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바로 “능력”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on the right hand of power)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 또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역사 가운데 나타나고 보여짐으로써 “놀람”이 사람들 사이에 있게 된 것이었다. “다 놀라(All the people were amazed)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authority)와 능력(power)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눅4:36).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까지도 능력으로 포기하고 능력으로 획득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죄와 사망, 사탄과 어두움의 “제한적 힘”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실 “절대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사탄은 예수님의 절대적 능력에 관계할 바가 전혀 없는 존재이다. 아울러 이 예수님의 절대적 능력을 믿고 의지하여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입은 성도들도 그 능력을 의지하여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며 고난을 극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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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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