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유월절 만찬을 가지신 예수님 (눅22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청결을 감행하실 때에 성전의 기능을 “기도하는 집”(19:46)으로 단언하셨다. 그리고 성전 내에서 가르쳐주신 말씀(20-21장)의 결론도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는 것이었다. 이제 2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와 유월절을 마지 하는 절기를 지키시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언약)의 성취는 오직 기도와 그에 따른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의 기도와 감람산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이런 사실을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셨다. 이제 1절에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기오매”라고 하였다.
1. 무교절(無酵節)은 유월절 이튿날 정월 15일부터 21일까지(일주일) 지키면서 누룩 없는 떡(빵)을 먹는다. 레위기에서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레23:5-7)라고 하였다. 유월절은 정월 14일이며 무교절은 15-21일에 지킨다. 유월절은 출애굽 하는 구원의 날(절기)이며 무교절은 구원 받은 후의 7일간의 무교 음식을 먹는 절기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효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출12:39)라고 해설한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와 같이 연이어서 지키므로 “무교절이라 하는 유월절”로 함께 지키게 되었다.
2. 유월절과 무교절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월절이 있기 위하여서는 애굽인을 향한 10대 재앙이 있었고 유대인을 향하여서는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해방) 받는 축복이 있다. 구원 받은 백성은 비록 맛있는 떡(빵=발효음식)을 먹을 수 없으나 구원의 감격은 넘치고도 넘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제 예수님(=어린 양)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
3. 예수님은 축복의 구원(죄에서의 해방과 자유)을 베푸시는 유월절 구원의 잔치(식사)를 지상에서 오직 한 번(마지막 유월절) 사도들(22:14)과 함께 가짐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기초를 놓게 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15절에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With desire I have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구원과 해방”은 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죄악과 억압”의 쇠사슬을 풀어주기 위한 싸움 즉 영적전쟁이다.
4.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원하고 원하시는 사역”을 모르고 예수님의 사역에 역행하고 대적하는 일로 도전하여 온다. 누가가 기록한 그 내용들은 이러하다.
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they might kill him)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2).
나. “열둘 중의 하나인 가롯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Satan entered)”(3).
다.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to betray)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to betray) 기회를 찾더라”(4-6).
라. “또 그들(사도들=제자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strife)이 난지라”(24).
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betray me)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21).
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31).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as wheat.)
사.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끝남이라)"(37)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and I tell you that this must be fulfilled in me. Yes, what is written about me is reaching its fulfillment.") (cf. 사53:12)
*아.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53). (This is your hour, and the power of darkness.)
자.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mocking and beating)/ 그의 눈을 가리고(blindfolded him, they struck him on the face)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many other insulting things)“(63-65).
5. 누가복음 4:13. “마귀(사단)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를 멸하려 하심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적전쟁의 선포를 하시며 “마귀의 모든 일”(시험, 거짓, 죽음, 어두움 등)에서 “승리자”(시험을 이기신 분)로 사역을 하여야 하셨다. 따라서 세상의 주관자인 사단과 대적하셨다. 그러한 “권세”(authority and power)를 가지고 사단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이제 사단은 마지막 결정적 유월절의 순간에 모든 어둠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죽음의 세력(the power of darkness)으로 예수님을 처단하게 된 것이다. “마귀는 곧 사단(사탄)이고, 그 수하의 악한 영들은 귀신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하였다.
1요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6. 사단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영적 존재이든, 육적 존재이든) 언제나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승리자로 군림하게 됨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이 잔”(this cup), 즉 “고난과 죽음”(suffering and death)이 아담과 그 후손이 범한 죄악의 대가를 갚는 형벌임을 사단은 모르고 있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은 형벌(“죄의 삯은 사망이라”)의 청산이 되어 장차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는 “죄악(죽음)”이 청산되는 사실을 몰랐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구원계획에대하여서는 근시안적이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가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죄악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역사‘인 것을 몰랐다. ”천국의 완성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사실에 대하여 무지하였던 것이다.“
* 예수님은 사단이 장악한 세계에서 기도를 잃어버린 사도들(보냄을 받은 자들), 또한 제자들(예수님에게 배우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영적전쟁의 승리는 오직 “아버지를 향한 기도”와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를 기다림”에 있다는 사실을 유월절 만찬의 기도에서 또 감람산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셨다.
1. 유월절 만찬에서 드리신 기도는 다음과 같다.
가.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
나.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19).
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
2.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다툼을 하실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0).
3.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며 제자들도 기도할 것을 일러주셨다.
가.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40).
나.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41).
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42).
라.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43).
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
바.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45).
사.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46).
* 누가복음 22:14-23(cf. 마26:26-30; 막14:22-26; 고전11:23-25)의 기록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사도들(선택된 백성)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후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세우셨다.
1. 성만찬 제도는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하여 행하여졌던 유월절 만찬을 확장하여 앞으로는 만민 중에서 선택된 영적 이스라엘 백성 모두(=교회)가 성만찬의 예식으로 지켜야 한다는 역사적인 신기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죽음과 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었던 역사를 기념하는 행사였으나 영적 차원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어린양이 가져다 줄 구원을 고대하는 행사였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구원을 완성하였으므로 그 구원의 기쁨을 재확인하는 예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의 기다림보다는 구원의 완성을 기념하도록 새로운 예식을 새우주신 것이었다.
2. 예수님은 떡(빵)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마26:26; 눅22: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떡은 누룩이 들지 않은 밀가루로 만든 “빵”이었다. 죄를 상징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로써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어야 영생한다(요6장).
3. 예수님은 또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8) 고 하셨다. 누가복음 22:20에서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This cup is the new covenant(testament) in my blood, which is poured out for you.“)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가지고 감사와 축복의 기도로 성별하시고 다음의 세 가지 뜻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이것은 (이 잔은) “언약의 피”(새 언약)라고 하셨다. 구약시대로부터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모든 일을 진행하셨다. 그 언약은 반드시 피가 흘려져야만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고 하였다. 레위기의 복음진리는 모세가 양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릴 때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선포하였다(출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또 장차 메시아의 죽음으로 “새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지자들은 예언하였다(렘31:31; 시42:6; 53:12). 이 “새 언약”의 예언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써(in my blood) 성취됨을 선포하셨다.
둘째, 이 새 언약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이 흘리시는 피가 구약에서 오직 한 번 예언한 예레미아의 “새 언약”(new covenant; 렘31:31-34)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렘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셋째, 이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피라고 말씀하셨다. 성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은 “너희가 온 몸이 깨끗하다.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요13:10)는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성만찬의 포도주는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제자들이 받은 것이다.
4.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가져야 한다.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몸에 참여한 우리들에게는 영생과 구원의 기쁨이 있다는 것이 재확인되며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된 우리들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되고 있다는 것도 재인식하게 된다.
* 누가복음 22:39-46(cf. 마26:36-46; 막14:32-42)에서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애절하게 드리는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영적투쟁의 승리는 오직 아버지에게 기도드리는 길 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감당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1. 예수님께서 감람산(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기도는 그 모습과 내용에 있어서 가장 애절하였다. 육체의 죽음은 얼마든지 용감하고도 평온한 마음으로 직면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만 하느냐”고 하는 심각한 영적문제에 직면할 때에 애절한 기도를 드려야만 하셨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잔”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예수님을 괴롭게 만들었는가?
2.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동산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중에서 이미 모든 괴로움을 겪고 계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고민하고 슬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7, 38).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 몸에서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눅22:44). 이때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더하였다고 하였다(눅22:43). 여기에서 영적투쟁은 육체적 고난보다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우리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영적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영적투쟁에 패배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고 하였다.
3.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아버지 하나님께 똑같은 기도를 드리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인간은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야만 하였고 하나님은 인간을 버릴 수밖에 없으셨다. 이제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아버지의 버림을 당하게 되었다. 비록 당신은 죄가 없으셔도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고(고후5:21)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게 하셨다(갈3:13). 아버지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은 버려야만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시며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잔”(cup)이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셨으나 세상 죄를 위하여 버림 받고 저주를 당하셨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그 은혜를 우리들의 지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을 뿐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5:8-9에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증언하였다.
4. 하나님은 죄 없으신 어린양 예수님에게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피를 흘리게 하시고 우리 죄인들이 변하여 의인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고 권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는 바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드리신 애절한 기도였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들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 누가복음 22:47-53(cf. 마26:47-56)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된다.
첫째, 저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때는 밤중이었다. 어두움을 밝히기 위하여 등과 홰를 높이 들고 나타났다. 불법을 행하고 있었으므로 밝은 대낮을 피하고 어두운 밤중에 자기들의 계획을 감행하였다. 예수님은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 하였도다” 하며 지적하셨다. 저들은 예수님을 체포할 아무런 권한도 없었으나 불법으로 범죄를 자행하였다.
둘째, 가롯유다는 사랑의 입맞춤을 사람 잡는 도구로 잘못 사용하였다. 당시의 입맞춤이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반가운 인사의 표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반기는 것처럼 가장하며 입을 맞추었으며 예수님 신원의 확인과 체포를 위하여 이런 행동을 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고 하시며 그의 위선적인 행동을 지적하셨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라는 뜻이다. 유다는 좋은 이름과는 다르게 위선과 배신의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셋째, 저들은 강도를 잡으려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와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력을 행하기 전에 먼저 그들 앞에 나가셔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내가 나사렛 예수라”(요18:4, 5)고 알려주셨다. 저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졌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잡히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따라 사람들보다 앞서 가시고 계셨다. 인간의 무력으로는 도저히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이다.
넷째, 베드로는 검을 휘두르며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가 휘두르는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가 떨어졌다. 베드로는 자기의 혈기와 교만으로 예수님 앞에 나서며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셨다. 예수님의 치료는 오히려 베드로를 보호하고 잡히어 형을 치루지 않도록 막아주셨다.
다섯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26:52, 53)고 말씀하셨다. 로마군인 한 영(legion)의 수는 6천명이다. 12영이면 7만2천명인데 천사의 수는 이보다 더 많다고 하셨다. 천사 하나가 앗스루 군사 18만5천명도 일시에 죽게 한 기록이 있다(왕하19:35; 사37:36). 베드로는 싸움의 성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잘못된 칼의 힘을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용도에 잘못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잘못 사용하였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5:39)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사랑의 원칙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무력은 결코 성도가 영적전쟁에서 사용할 힘(power)이 아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행진하셨다. 우리들도 천성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나갈 때 순종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따라야 한다. 우리들에게 맡겨진 조그마한 일 하나라도 사명으로 받고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 누가복음 22:54-62(cf. 마26:57-58; 막14:53-54, 66-72; 요18:12-18, 25-27)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미리 이러한 사실을 성경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여 주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26:31). 이럴 때에는 들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겸손히 기도하면서 조심하여야 한다.
1. 목자(=영적 지도자인신 메시아 예수님)를 잃고 나면 연약한 인간은 자기의 힘을 가지고서는 사단(약령)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22:31) 예수님은 “내게 주신 자(양)들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2)라는 기도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넘어져 엎드러지지 않도록 미리 사랑의 줄로 매어주셨다. 또 연약한 제자들의 모든 결함을 다 용서하여 주실 것도 다음과 같이 예고하여 주셨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 갈릴리 지방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고향이다. 번잡한 예루살렘 도성을 떠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갈릴리에서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었더라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복음사역을 의논하게 될 것이므로 그 날을 기다리도록 알려주셨다.
2.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22:33). 이러한 말들은 베드로의 자만심을 들어내었다. 그의 자만심은 세 가지의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의 자만심은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악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는 것은 죄악이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거역하였다.
둘째, 베드로의 자만심은 동료친구 제자들을 무시하였다. 인간의 제한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협력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무서운 질병 중의 하나다. 우월감은 고독과 좌절을 안겨주는 독소다.
셋째, 베드로의 자만심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였다. 과연 자기의 각오한 바를 그렇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을까? 신앙인의 특성은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는데 있다. 자기의 능력을 내 세울 때에 그의 신앙(자기 의존)은 여지없이 무너지고야 만다.
3. 예수님은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자기가 처한 환경도 모르는 베드로의 무능함을 보시고 그의 자만심을 꾸중하셨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22:34). 너무나도 구체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베드로는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연약해도 더 연약하며 실수를 해도 더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말씀이었다. 잠시 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두운 곳에 나아가 통곡하며 자기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4. 한편 다른 열 제자들은 베드로의 교만한 말을 듣고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고 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모든 제자들은 일률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자만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사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너희가 이 사람들(제자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요18:8)고 하시며 제자들의 흩어짐을 허락하신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가 검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을 때에 예수님은 그 귀를 고치시고 베드로가 체포되지 않게 하여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녀를 하나라도 잃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히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들은 모든 자만심을 버리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 주님만을 섬기고 의지하게 된다.
6.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계실 때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마당에까지 멀찍이 따라가서 “예수님이 당하실 결국을 보려고”(마26:58)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였다. 베드로는 자기의 원하는 바를 따라서 “결국을 보려는” 고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고 분부하셨고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게 보존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도 않았고 주님의 뜻을 거스려 가면서 악당들이 소굴에까지 찾아 들어갔다. 베드로는 자기 몸을 녹이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하속들 속에 끼여 들어가 앉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험에 걸려 넘어지도록 처신한 것이었다. “너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너는 예수님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았다”는 말들을 듣고 베드로는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라고 응수하며 3번씩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이때에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막14:72).
7. 그러자 심문을 받고 계시던 예수님은 고개를 뒤로 돌리시며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눅22:61).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은 마주쳤다. 이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에 나가 어두운 밤중에 심한 통곡과 함께 한없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닭은 밤중에 울지 않는다. 예수님은 밤중에 닭을 깨워서 소리 지르게까지 하시면서 베드로를 붙들어주셨다. 첫 번째 닭이 우는 소리에 아무런 경고를 느끼지 못하자 두 번째 닭이 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얼굴과 눈은 친히 보시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8.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결코 실패자가 될 수 없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눅22:32). 예수님은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미리 마련하여 주셨다.
9.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사로이 베드로를 찾아주셨고(막16:1; 고전15:5) 또 공석에서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요21:15-19) 그의 믿음을 든든하게 붙들어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깨어 기도하는 제자가 되었고 그 후로는 자기의 약함을 깨닫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았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서도 기도를 하고 계시며 우리들의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뒷받침하고 계신다.
* 누가복음 22:63-71(cf. 마 26:57-68)은 대제사자의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의 기록이다.
1.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니 후에 대제사장에게 이끌려 가셨다. 먼저 안나스에게 그 다음은 가야바에게 끌려 가셨다. 본래 대제사장의 직분은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유대 땅을 정복한 이후에는 로마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대제사장의 직분은 임명제로 바뀌었다.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으로 약 10년간(주후6-15) 봉직하였으며 그 후에는 안나스의 세 아들과 사위가 후임으로 봉직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나(주후 18-36) 그때에도 안나스가 막후의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2. 안나스나 가야바는 사두개인의 종파에 속한 대제사장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즉 거룩한 영적 세계를 받아드리지 않고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제사장 가족들은 성전사업을 장악하고 있었고 성전의 수입으로 부요를 누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셔서 성전청결 작업을 감행하실 때에 이들 대제사장들이 성직의 권위를 남발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성전사업을 경영하는 일에 엄한 채찍을 가하셨다. 예수님은 신적권위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정치의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 앞에서 감히 예수님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대제사장들은 평상시에 품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장이 폭발하여 예수님을 처단해 버리는 행동으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가야바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면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이미 공공연하게 주장한바 있었다(요11:47-54).
3. 가야바는 예수님을 잡아다 놓고 성급하게 산헤드린 공의회를 열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소집하였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밤중에 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법을 감행하면서 예수님을 처단할 증인들을 불러들였다. 모세의 법은 거짓증인을 세울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신19:15-21)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일을 실행하였다. 거짓증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는 말로 성전을 모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스라엘 신앙은 성전중심이었다. 성전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스데반 집사도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거짓 증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돌로 순교를 당하였다(행6:12-14; 7:45-50). 예수님을 향한 거짓증언에 대하여서는 이사야 53:7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성전을 사흘에 지으시겠다는 영적 진리를 몰지각한 그들에게 설명해 줄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다. 베드로전서 2:19에도 만일 우리 성도들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입을 열기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4. 가야바는 거짓증언으로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하였고 또 예수님의 입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여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도록(민30:2; 출20:7; 레19:12) 유인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고 확답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시편 110:과 다니엘 7:13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인자)로써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엄연한 사건이 예수님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확인하여 주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며 가야바와 같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었다. 가야바는 자기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포하였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손과 주먹으로 폭행을 가하였다.
5.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안나스나 가야바와 같은 대제사장들의 죄악을 재현할 가능성이 숨어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는(마26:56) 생애였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자기의 감정이나 지식이 유도하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