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죽음 (눅23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It is finished; 요19:30)
* 누가복음 23:1-25에는 예수님의 무죄와 빌라도의 연약성과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무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사형을 언도하여 자기의 능력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었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땅을 장악한 로마의 총독이었다. 그는 고의적으로 유대인의 법을 어기면서 유대인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자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 이방 로마의 국기를 계양하였고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피를 희생 제물에 섞어 우상에 바치기도 하였다(눅13:1). 이와 같이 유대인의 미움을 사는 행위로 인하여 그는 위태로운 총독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포악하거나 잔인한 자는 아니었으나 매우 실용적이었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제도와 원칙도 희생하면서 일관성 없는 정책을 고수하는 우유부단한 정치가였다.
2.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할 때에 세 가지의 범죄조항을 열거하였다.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 로마정부에 세금을 못 바치도록 회유한다는 것, 또 자칭하여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눅23:2). 빌라도는 로마정부에 위협을 주는 세 번째 조항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예수님의 혁명과 반란 조직이 어떠한 것인지 심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며 군인조직도 없고 추종자들이 싸움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나라는 진리의 통치를 따른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요18:34-37) 예수님은 결코 위험인물이 아니며 무죄하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3. 빌라도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저주하도록 주장하며 강요하자 자기가 확신하고 있는 예수님의 결백성을 주장하지 못하였다. 그는 고소하는 자들과 예수님 사이를 7번씩이나 오고 가면서 고소인들의 말도 듣고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요18:29-19:13). 그런데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였기 때문에”(막15:15) 무리의 요청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로 내어 주고야 말았다.
4.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3단계의 묘안을 썼다.
첫째, 그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언급하였다.
둘째, 그는 분명하게 예수님은 정당하며 결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셋째, 그는 예수님을 엄벌에 처하였다가 석방하자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제한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 썼으나 유대인들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만일 예수님을 놓아주면 너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요19:21)는 말을 듣고 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고야 말았다.
5. 예수님을 배반하는 요소는 세 가지라는 것을 누가복음 22-23장을 통하여 배우게 된다.
첫째, 연약한 인간의 육성이다. 베드로는 자기의 육성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했다.
둘째, 막강한 사단의 권세다. 가롯유다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했다.
셋째, 타락한 세상의 유혹이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소리에 항복하고 예수님을 죽였다. 예수님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고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단하는 악명 높은 역사의 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재력, 권력, 능력을 가지고도 진리에 바로 서지 못한 자는 비겁하고 누추한 자가 되고 만다. “예수님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세상을 택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우유부단한 대답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대답을 한다면 그는 참다운 신앙인이라고 볼 수 없다.
6. 예수님의 무죄한 피를 흘림에 대하여 빌라도는 스스로 무죄하다고 발뺌을 하였고 빌라도의 법정에 몰려들었던 수많은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고 호언장담하였다. 무죄한 예수님의 피를 흘린 대가를 받겠다는 말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이 말로 인하여 저들은 끔찍한 대가를 받고야 말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들이 말을 뱉어놓은 바로 그 장소에서 3천6백 명의 유대인이 로마 총독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현대사를 볼 때에도 유대인들은 6백만 명의 자손들이 히틀러의 손으로 살해되었어도 항거할 수 없이 감수하여야만 하는 처참한 민족이 되었다. 그들은 유대인 후손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큰 불행의 씨를 심었다. 예수님이 처형되신 후에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은 몇 년 안 되어 폐허가 되어버렸고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 다음 해에 폐위되었다. 한편 로마 총독 빌라도는 골(Gaul)이라는 지방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자살하였다.
* 누가복음 23:6-12에는 헤롯 왕 앞에 서신 예수님의 기록이 나온다.
1. 예수님의 무죄함을 발견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문제에 개입되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예수님을 갈릴리 지방의 통치자인 헤롯 안디바 왕에게 보내어 버렸다. 그때에 헤롯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었다. 헤롯은 야곱의 자손 유대인이 아니며 에돔 족속(=야곱의 형, 에서의 후예)이었다. 헤롯의 부친 헤롯 대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정치술대로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몇 일간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냄으로써 빌라도는 헤롯과 부드러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성경은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12)고 기록하였다.
2. 헤롯은 평소에 예수님을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였으므로 기꺼이 예수님을 대면하였다. 이 헤롯왕은 바로 3년 전에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이다. 그는 세례요한을 죽이고 난 후에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당황하였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났다고도 하였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였고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말들을 하였기 때문이었다(눅9:7-8). 따라서 헤롯은 예수님을 대면하여 예수님의 영적능력과 아울러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도 보려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한편 예수님은 사역을 행하실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로부터 헤롯왕이 예수님도 죽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일이 있었다(눅13:31). 그때에 예수님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헤롯의 교활한 성격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헤롯의 영향권이 미치지 못하도록 경계하면서 활동하셨던 것이다.
4. 이제 헤롯은 유대인들의 고소로 잡혀온 예수님을 자기 앞에 세워 놓고 여러 가지 말을 하면서 심문하였다. 예수님은 헤롯의 호기심을 채워줄 그러한 대상은 아니셨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에게 비록 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일언반구의 말씀조차 남겨줄 수 없으셨다. 헤롯의 끈질긴 질문에도 예수님은 잠잠하셨다. 고요히 서계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셨다. 헤롯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오히려 영적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유대 종교인들의 여러 가지 고소가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않고 무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눅23:15) 자기는 자기 영토 갈릴리 지방 외에서 실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어 버렸다.
5. 예수님은 마치 도살당할 양과 같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시며 학대와 조롱을 받으셨으나 우리들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참고 견디셨다. 시편 22:16에 “개들이 나를 애워 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하고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동족 유대인의 미움을 받고 이방 로마인의 손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된 배후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숨어있다. 구원의 주 예수님은 지금도 잠잠히 서계시며 모든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엄한 심판의 주님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사랑을 베푸시는 구원의 주심이시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지금이 바로 구원 받을 때이다.
* 누가복음 23:24-25.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는 기록이 나온다.
1. 빌라도가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라는 기록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무죄하심을 발견한 빌라도는 예수님의 석방을 위한 묘안을 찾았다. 그것은 유월절 명절 때마다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사람씩을 석방하여 주는 전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옥중에 있는 죄수 중에 바라바라는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는 살인과 도적질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대인의 해방을 위하여 활약하였던 악명 높은 자였다. 빌라도가 볼 때에 바라바는 예수님의 행적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백성들이 바라바 보다는 예수님의 석방을 선택할 것으로 빌라도는 확신하였다.“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시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이때에 백성들은 빌라도의 기대와는 다른 대답을 하였다. “바라바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백성들은 소리 높이 외쳤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몰려든 유대인들이 민란과 폭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소리에 항복하고야 말았다.
2.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는 기록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다. 마태복음 27:26-31을 보면 이때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십자가의 처형이 확정된 후에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이끌리어 관정 안으로 들어가셨다. 당시 빌라도의 관정 안에는 약 600명의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예수님을 괴롭혔다. 먼저 채찍을 가했다. 당시의 채찍은 세 가닥의 가죽 끈 끝에 뼈 조각이나 납덩어리를 몇 개씩 매달아 놓은 끔찍한 고문도구였다. 이러한 채찍으로 후려치면 살가죽이 찢어지면서 살덩어리가 떨어져 나라고 혈관이 터지고 피가 낭자하게 흘려졌다. 채찍이 얼굴에 가해지면 눈이 빠지고 이빨이 부러지기도 하였다. 채찍을 맞는 도중에 죽는 사람들도 허다하였다. 40번을 맞으면 살아남는 자가 거의 없으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가 40번에서 한 번 감한 채찍을 맞고 사경을 해매였다고 간증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채찍을 맞으시고 고난을 겪으셨다.
3. 군병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 당하게 된 것을 알고 희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붉은 자색 두루마기를 입혔다. 상처로 얼룩진 몸에 무거운 외투를 입히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쓰라림을 더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왕관 대신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꽉 눌러 씌었다. 예수님의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들은 또 예수님의 오른 손에 왕의 홀을 대신하여 갈대를 잡게 하였다. 피에 젖어 사경을 해매이시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무릎을 꿇고 조롱으로 경배 드렸다. 그리고는 서로 나서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도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가시가 박혀있는 머리를 치곤하였다.
4. 예수님은 이러한 처지에서도 죄를 범하지 아니 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고 욕하지도 아니 하시고 위협하지도 아니 하시고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고 베드로전서 2:22-23에서 해설하고 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이 되셔서 온 천하를 그 입의 말씀과 그 손의 철장으로 다스리시고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킬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실지라도 주님은 부딪치는 매 순간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묵묵히 순종의 삶을 엮어 나가셨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벧전2:24)고 성경말씀은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형벌을 면제 받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베드로전서 2:20-25을 참고하자.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누가복음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는 기록이 나온다.
1. 예수님은 사형집행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외곽에 있는 골고다(=해골의 곳)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게 되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레위기의 법규를 따르는 제사제도에 의하면 속죄를 위한 염소는 제사장이 안수를 한 후에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고 나아가 광야로 쫓아버렸다. 속죄염소는 죽음의 근원인 인간의 범죄를 그 몸에 받은 후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도록 광야로 쫓겨나갔다. 예수님께서 성 밖으로 끌려 나가 죽게 된 사실을 히브리서 13:12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빋으셨느니라.”
2.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당신의 몸에 짊어지고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구타와 채찍과 가시관의 고문까지 받으시고 기운이 탕진되어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도저히 지고갈 수 없으셨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상태를 직감하고 즉시 다른 사람으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의견을 모았다. 때마침 그 장소에는 구레네 지방(구레네는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늘날 리비아 영토에 속하여 있다) 출신의 사람 시몬이 있었다. 로마 군병들은 누구라도 붙들어 작업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마5:41) 군중 속에서 구레네 시몬을 끌어내어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3. 구레네 시몬은 유월절 절기의 아침 기도시간을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던 중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구경하다가 로마 군인에게 잡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를 지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짐으로 인하여 자기 생애의 전환점을 마지하게 되었다. 그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자기와 온 가족이 구원되는 축복을 받았다.
4. 마가복음 15:21을 보면 구레네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하였고 아울러 로마서 16:13을 보면 시몬의 아들 루포는 사도 바울이 일평생 잊지 못할 믿음의 형제였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구레네 시몬의 아내와 아들들이 사도 바울에게 크게 호의를 베풀 정도였다면 시몬은 이미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온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던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가정은 초대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 되었다. 그들은 복음전도자를 뒷받침하는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성도는 그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도록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마10:38).
5. 히브리서 13:13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은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권유하고 있다. 구레네 시몬은 억울하고도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지고 가는 잠간의 수고를 하였으나 예수님의 고난을 바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박해가 심한 초대교회에서 교회를 섬기는 기둥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도 각자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
* 누가복음 23:27-31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실 때에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예인들이 예수님을 동정하여 가슴을 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이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을 위하여 동정을 베푼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셨기 때문에 당신의 몸을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요2:24-25). 동정을 베푼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생긴 결과를 슬퍼하는 것이다. 죄인이 의인을 동정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동정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동정을 받아야만 마땅하다.
2. 예수님은 유대 민족에게 매우 가까이 닥쳐온 재난에 관한 예언을 하여주셨다. 그 재난이란 40년 후 주후 70년에 로마 군인들의 침공 시에 이루어질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은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여 범죄 할 때마다 민족적인 수난을 거듭 받아왔던 사실은 구약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한 수난을 통하여서라도 선민을 보호하여야 결국은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탄생하셔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몸소 당하고 계시는 수난 보다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 민족이 받을 수난의 참상을 미리 아시고 더욱 슬퍼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3:30, 31). 이 말씀에서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마른 나무”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비유다. 물기가 축축한 푸른 나무가 불에 태워질 정도라면 바짝 마른 나무는 얼마나 잘 타겠느냐는 비교논법이다. 푸른 나무와 같은 예수님이 받는 고난에 비하면 마른 나무와 같은 유대인들이 받을 고난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주후 70년에 유대 민족은 로마 군인들의 침공을 받고 60만 명의 시민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에 예루살렘 도성에는 양식이 없어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을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셨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23:29). 본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수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아이가 잡혀 먹히는 것을 보는 여인은 수치 이상의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이 더 복이 있겠다는 원성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은 당연하다.
3. 예수님의 사역을 회고할 때에 어느 여인이라도 예수님을 대적하여 나섰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예수님의 탄생이 여인에게 예고되었고 예수님의 전도자금이 여인에 의하여 공급되었고 예수님의 죽음이 여인에 의하여 애도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이 여인에 의하여 알려졌다. 예수님은 여인들의 동정과 눈물을 감사히 여기셨으나 주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기 보다는 자기 민족의 죄악상을 보고 민족이 받을 심판을 인하여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하셨고 당신이 당하실 죽음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백성들의 운명을 미리 보시고 더욱 안타까이 여기셨다. 참으로 동정과 구원을 받아야 할 백성은 바로 우리들과 우리들의 가족과 이웃이다.
* 누가복음 23:32-43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온갖 수치와 조롱을 받고 임종을 맞이하셨다. 역사는 “예수님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성경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만백성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자체보다는 왜 죽었느냐는 죽음의 이유와 목적에서 그 중요성이 나타난다. 또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죽었다고 하기보다 어떻게 죽었느냐고 하는 죽음의 방법에서 큰 의미가 나타난다.
2.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갈보리(=직역으로는 골고다)라는 예루살렘 외곽의 한 낮은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셨다. 이 장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볼 수 있는 도로 연변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행하여졌다. 그 당시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사형틀인 십자가에 매어 달리어 만인이 보는 가운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자체는 가장 큰 수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철학자 시세로는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로마인에게 행하여져서는 안 되며 로마인에게는 그 참상을 들려주어도 안 되며 보여주어서도 안 되며 생각조차도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3. 머리에는 가시관을 받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시며 십자가에 매어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유대 백성과 관원들과 로마 군명들은 조소와 비웃음으로 이 말 저 말들을 내어 뱉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면 이제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들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다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다.
4. 예수님의 매어 달리신 십자가 위에는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을 써서 붙이도록 하였다. 그것도 히브리 말과 헬라 말과 로마 말로 써서 붙이게 하였다. 히브리 말은 종교를 상징하며, 헬라 말은 철학과 학문을 대변하며, 로마 말은 정치와 제도를 나타낸다. 인간의 모든 조직과 체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이고야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은 당신을 배척하고 죽인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왕의 사역을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다.
5. 예수님은 두 사람의 강도이며 죄인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동류족으로 몰리어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셨다. 이 강도들은 이미 석방의 행운을 받은 바라바와 같이 유대인 해방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민란과 살인을 자행하던 자들이었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그들은 예수님의 명패를 보면서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한 강도는 십자가 밑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의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예수님의 왕권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구원을 열망하였다. 그는 자기의 과거 행실이 옳지 않았으며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회개하였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이와 같은 간구에 예수님은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여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는 구원 받을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었으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이와 같이 기회를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어느 곳에서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보여주셨다.
6. 또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십자가의 수치와 조롱을 다 받으셨다. 예수님에게 신포도주를 먹이려 한 일이라든지(시69:21),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 일이라든지(시22:18),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일이라든지(시22:6-8), 예수님을 강도와 같이 취급한 사실(사53:12) 등등 모든 일들은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계획하여 놓으셨고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 우리들은 감사와 찬양을 계속 드리게 된다.
* 누가복음 23:34-49(cf. 마27:45-56)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들려주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통을 겪는 중에도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만민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때부터 정오 12시까지 예수님은 밝은 태양 빛이 비추는 가운데 십자가 위에 매어달려 계셨다. 그리고 정오부터 3시간 동안 온 땅이 흑암이 뒤 덥힌 중 약 세시 경에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예수님이 임종을 거두실 때의 그 어두움은 일반 견해로는 해명할 수 없는 기이한 흑암이었다. 폭풍우가 닥친 것도 아니며 일식 현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이 흑암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흑암이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기 전 삼일 동안 온 땅을 뒤덮었던 바로 그 흑암과 같았다. 그때 그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에 뒤이어 마지막 장자가 희생되는 재앙이 연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은 희생당한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애굽 백성의 장자들은 모두 죽게 되었던 역사의 내용이다. 갈보리 언덕 위의 흑암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독생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희생되었다고 알려주는 선포였다. 이 흑암의 선포가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엄한 경고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영적 교훈을 들어내고 있다.
2. 예수님은 어두움이 오기 전에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리고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여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또 육친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시며 아들의 가치 있는 죽음을 알려주셨고 아울러 제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시며 모친 마리아를 모시도록 부탁하셨다(요19:26-27). 그리고 흑암이 닥쳐왔을 때에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잠잠히 계셨다. 예수님은 흑암 속에서 모든 사람의 죄악으로 인한 형벌과 저주의 쓰라림을 겪어야 하셨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21:23)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셨던 것이다(갈3:13).
3. 예수님은 흑암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계속하여 “내가 목마르다”(요19:28)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인간이 겪는 갈등과 고독과 쓰라림을 표현하셨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It is finished.)라는 상업용어 “빚을 다 갚게되었다”고 하시며 죄악의 대가인 죽음을 받으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악의 빚(=형벌)을 다 해결되었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다 이루었다”(I finished)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즉 “다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하시며 모든 죄의 청산과 구원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상항을 밝히 보시고 선포하신 것이었다.
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세 가지의 놀라운 사실이 발생하였다.
첫째,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갈라졌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상징이다(히10:14-26).
둘째,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었다.
셋째, 로마 군인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지칭하여 “이 분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하였다. 이 말은 항거할 수 없는 진리를 증거하는 고백이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에 충성할 수 있기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기도로 일관된 생애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몸과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며 맡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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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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