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유월절 어린양의 예루살렘 입성 (눅19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을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에는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눅1:1-4 ------ 서론
2. 눅1:5-2:52 ---- 예수님과 세례요한: 출생기록들
3. 눅3:1-4:13 ----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역의 준비
4. 눅4:14-9:50 --- 예수님의 갈릴리 지역의 사역
5. 눅9:51-19:27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사역
6. 눅19:28-21:38 -- 예루살렘 내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7. 눅22:1-24:53 --- 예루살렘 내에서의 예수님의 최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 누가복음 19:11-27: 우리는 지난번에 여리고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 구원하여주시는 내용까지 살펴보았다.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삭개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비유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19:11).
1.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신 동기는 다음과 같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1).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사역을 향하여 가시는 마지막 단계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만 하는 이유는 이미 9:51에 언급되어 있다.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그들: 제자들, 종교인들, 대중들)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으므로 “민족해방의 구원사역”이 이제부터 시작된다는 기대에 부풀어 “하나님의 나라(=메시아 왕국)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게” 된다.
2.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다르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현실에 집착하여 내일과 영원을 잊고 행동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홀로 “구원의 길”을 향하여 가시면서 사람들이 “현실(지금)을 살면서,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이 비유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신다. 특별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비유의 교훈이 마음속에 새겨져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심판의 대상이 되어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됨을 경고하고 계신다(27).
3.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사역을 하시는데 왜 미움과 배척을 받으시는가? 영적전쟁의 놀라운 역사로 인함인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사역이 하나님의 권세로 나타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눅4:36). 이러한 말씀사역은 12제자들에게도 훈련을 거쳐 알게 하여 주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9:1-2),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9:6)고 하였다. 또 70인의 전도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사역으로 놀라운 구원사역을 체험케 하여 주셨다(눅10:1-20).
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을 통한 구원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앞으로의 깨달음을 위하여 계속하여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신다. 또 제자들은 궁극적으로는 말씀으로 구원사역에 헌신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의 필요성은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5. 비유의 말씀은 현재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내용을 가지고 영적 비밀을 가르쳐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누차 음미하였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귀인을 “미워하고” “왕 됨을 원치 아니하여” 그 사회적 분위기가 매우 착잡하고 불안하였다(14).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그 귀인은 “적은 무리들”(10사람의 종들)에게 “은화”(한 므나씩=약 4개월분의 월급)를 나누어 주면서 “장사하라”(13)고 하면서 그것을 자산으로 삼고 잘 활용하여 이익을 남기면서 열심히 일하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6. “백성들이 그 귀인을 미워하고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였다”(4)는 내용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미움과 배척을 받아왔으나 곧 마지막 지점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게 될 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의 영적 심오한 뜻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비유의 내용과 같은 사실을 백성들은 체험하고 있었다. 주전 4년에 헤롯 대왕(베들레헴의 아기 학살 주도)이 죽은 후에 유대 지역을 두 아들이 나누어서 지배하게 된다. 이때 작은 아들(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위임되며 큰 아들(헤롯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큰 아들 ”아켈라오“는 ”분봉왕“(Ethnarch) 보다는 ”전 유대인의 왕“(Kingship)이라는 "왕권"을 위임 받기 위하여 로마 황제에게 가게 된다. 유대인들은 아켈라오와 그와 그의 계획을 미워하여 별도로 대표들을 로마에 파송하였다. 그러나 아켈라오는 왕권을 받고 와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리면서 악명 높은 헤롯 아켈라오가 되었다. 예수님은 미움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아켈라오와 같으나 다시 오시는 모습에서는 아켈라오와는 다르시다.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다시 오셔서 은혜와 평강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아울러 심판의 왕으로 오실 것도 아울러 이 비유에서 보여주고 계신다.
7. 13절의 말씀은 이러하다.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가. 여기에서 “므나”라는 것은 “은화”로써 한 므나(mina)는 약 4개월분의 월급과 맞먹는 양이다. 별로 큰 자산이 될 수 없는 돈이다. 그러나 얼마든지 투자하여 이익을 남길 수 있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장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귀인은 떠나갔다.
나. “장사하라”는 원어(Gk)는 “종사하라”(occupy) 또는 “사용하라”(us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한 므나”가 없으면 10사람의 종들은 활동능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그 “한 므나”를 사용하고 “므나”의 증식에 종사하여야 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다. 귀인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라는 말을 하였다. 귀인을 예수님으로 비유하고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님이 승천(the ascension)하여 재림(the parousia)할 때까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라. 그러면 종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자산은 무엇이겠는가? 종들이 주님에게서 받고 그것을 사용하여야 할 것은 “말씀”이며 “말씀의 투자”(말씀사역)인 것이다.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 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 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롬12: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 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마. 예수님에게서 받은 자산이 “말씀”이며 “말씀의 투자”(말씀사역)이라면 어떻게 말씀사역에 종사하며 어떻게 말씀을 사용할 것인가? 말씀투자와 말씀선포를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줄 때 10배 또는 5배의 이익이 반드시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보물과 보화”가 넘치게 주어진다고 하였다.
눅12: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 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 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눅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바. 예수님은 “므나”(말씀)을 투자하지 않고 “수건으로 싸 둔 종”을 “악한 종”(22, wicked servant)이라 또 “원수”(27, enemy)라고 부르고 “죽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말씀사역에 게으름을 부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은 결과다.
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1)고 약속하셨다. 또 히브리서 4:12-13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누가복음 19:28-21:38 -- 예루살렘 내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하여주신 “평지의 설교” 또는 “여행 중에 주신 말씀”(눅9:51-19:27)은 열 므나의 비유에서 끝을 맺고(19:27), 이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게 된다(19:28). 누가는 10장 이상을 할애하면서 “예수님의 여행사역”을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산상보훈(마태 5-7장)의 내용이 분산되어 기록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산상보훈은 산에서 “모든 진리의 핵심”을 종합하여 가르쳐주신 것이며 평지설교는 산상보훈의 종합적인 내용을 현장의 삶 속에서 적용하여주신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산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삶의 원칙을 깨닫게 되고 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경건생활의 원칙을 훈련하게 된다. 그러난 많은 시험과 유혹과 문제에 직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하게 된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은 다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무장을 갖추고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평지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면서 “어떻게 평지의 삶을 이기셨는가”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모범”을 예루살렘에서 보여주시게 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내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하여 나오는“고난 중의 말씀사역”(22:1-23:56)과 “부활의 사건”(24:1-53)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 누가복음 19:28-40(cf. 마21:1-11; 막11:1-11; 요12:12-19)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다. 이때는 유월절 절기였으며 예수님은 평화의 왕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어린나귀를 타시고 성내에 들어가게 되셨다.
1. 구약의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민족해방의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온 인류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는 구원사역의 모형으로 본다. 예수님은 모형 유월절의 실체가 되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기 위하여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된 것이다.
2. 유월절에는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어린양의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였다. 이때에는 약 2백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온 도성에 들끓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숨겨 오시다가 이때에 비로소 “구세주”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보여주시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백성들은 예수님을 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시기를 맞추어 어린나귀를 타시고 성내로 들어오시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때를 맞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예수님은 언제나 맡겨진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때와 장소에 적합한 일을 하셨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흘려지고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가 매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반드시 드려져야 하였으나 예수님의 깨끗하신 피 흘림은 모든 피의 제사를 단번에 폐지함과 아울러 구원의 완성을 이루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스가랴 9:9의 말씀대로 모든 백성의 왕으로 나타나셨고 겸손하게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이때의 나귀는 한 번도 누구를 태우지 않은 어린 새끼였으며 예수님을 처음으로 자기 등에 태웠다. 시편 8:6-7에 보면 주님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짐승도 복종케 하는 메시야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이때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펴고 대부분의 군중들도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것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다는 수락과 경배의 예의였다(cf.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나귀 등에 앉으신 예수님을 향하여 온 백성은 메시아에게만 드리는 찬양과 간구인 “호산나”(=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여 주옵소서)를 소리 높여 외쳤다. 구원의 왕 메시아는 이때 겸손하게 나귀를 타시고 희생의 제단을 향하여 가셨으나 장차 다스리시는 왕 메시아로 나타나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팔과 천사장의 소리와 함께 주께서 친히 호령하시며 백마를 타고 재림하실 것을 성경말씀은 예언하고 있다 (cf. 살전4:16; 계19:11).
셋째, 예수님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이 당신을 체포하고 죽이기로 합의하고 십자가에 처형케 하는 과정을 가속시키기 위하여 이와 같이 당신을 노출시키셨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의 환호소리를 듣고 “온 세상이 저를 좇는구나”(요12:19) 하며 당황하고 매우 놀라워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처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3. 스가랴 9:9에는 예수님의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일을 예언하면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장차 임박할 심판을 미리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실상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님에게나 백성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허덕이고 있고 우리들의 심령은 여러 가지 범죄로 인하여 상하여 찢겨지고 있고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로 우리들은 더욱 소리 높여 구원의 주 예수님을 환영하며 영접하여야 한다. 또 우리들은 부르짖으며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호산나, 호산나, 이제도 간구 하옵나니,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 누가복음 19:40-44에서 우리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1. 예수님께서 어린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실 때에 백성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19:38). 메시아를 맞아드리는 백성의 감격과 환성을 금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월적 능력을 가시신 예수님이 대망의 구원자로써 유대나라의 수도로 입성하시는데 “만일 사람들이 잠잠하고 있다면 돌들이라도 함성을 높일 만 하였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우셨다. “심한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지 하였을 때에 통곡을 금할 수 없고 솟아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울음을 의미한다. 한 때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나인이란 성읍에서 죽은 독자의 장례행렬을 따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던 과부 여인을 만나신 일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면서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눅7:11-17). 죽은 청년을 살려주시자 과부는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우셨다. 그때는 오히려 조용히 눈물만 흘리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로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서도 통곡과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위로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그와 같은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는가? 여기에서는 아래와 같은 영적 깊은 통찰력에서 기인되는 통곡과 눈물의 원인과 그 내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첫째, 예루살렘은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2).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예루”(=의)와 “살렘”(평화)가 합친 말이다. 백성들은 의와 평화를 갈구하면서 또 “평화로다,” “평화로다”를 노래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 도성에는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종교지도자들 까지도 권력과 금력 쟁취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평화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평화에 관한 일”이란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임재)”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저들은 평화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저들은 평화가 무엇인지 모른 채 불의와 싸움으로 멸망의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둘째,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곧 멸망하게 될 것을 미리 보시고 심한 통곡의 눈물을 흘히셨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멸망이란 곧 세상의 종말을 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과 함께 이민자로 정착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불리어졌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생활기반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을 버리면 유대인이 아니며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지면 유대인은 하나님을 잃고 생활기반도 잃고 산산이 흩어지고야 만다. 그런데 저들은 자기들의 종교행위에만 들떠 양을 희생하여 가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피바다로 물들였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참다운 믿음은 잃어버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백성이 흩어져버린 것을 미리 보고 계셨던 것이다.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44)는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후70년에 로마의 세력은 143일간 저들을 포위한 후에 6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예루살렘 도성을 황폐케 하였다.
셋째,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권고(=보살핌)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 “권고 받는다”는 것은 “방문(visitation)을 받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방문은 매우 반갑고 귀한 일이다.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에 영접하면 축복과 번영이 이루어지고 배척하면 심판과 저주를 받는다. 저들은 찾아오신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메시아 왕의 방문(visitation)을 배척하였다.
3.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으므로 심한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 리셨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그 귀한 말씀을 배척하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통곡과 눈물의 대상 이 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지신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들의 생명과 생활의 토대는 오직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자의 삶 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을 보면 서 예수님 중심에서 떠나 살고 있는 삻을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것이다.
* 누가복음 19:45-48(cf. 마21:12-17; 막11:15-19; 요2:13-22)에는 예수님의 두 번째 성전청결 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성전청결이란 성전답지 않은 요소와 인간탐욕과의 관계를 깨끗이 씻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1. 예수님은 성전을 일컬어 한 마디로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여 주셨다.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달라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는 두 가지가 언제나 핵심요소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도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 세계를 향한 복음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어진다.
2.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만을 위한 예배장소가 아니었고 이방인들도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전 외곽에는 이방인의 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방인이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이방인을 위한 전도계획을 수립하고 실천되어야 할 장소가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잘못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선교의 장소,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과 훈련의 장소인 성전이 인간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향되었을 때에 성전청결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3. 예수님께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다 내어 쫓았을 때에 회복된 성전기능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첫째, 이제까지 성전 안에서 볼 수 없었던 소경과 저는 자들이 보이게 되었다. 어그러진 인간을 고쳐주시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졌다가 다시 새롭게 나타났다. 성전에서는 고침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아야 성전의 존재의미가 영원히 남게 된다. 예수님은 그때에 환자들을 고쳐주셨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비로소 치유와 회복의 참다운 예배처소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활동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상한 일”(마21:15)로 보았다. 예수님의 바른 활동이 그르게 보여질 정도로 그들은 성전에서 그른 일만을 일삼았던 것이다.
둘째, 이제까지 성전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 찬양의 함성이 들려졌다.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천군천사의 찬양과 아울러 어린아이와 같은 모든 성도들의 찬양이 다시 들려지게 된 것이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넘쳐야 하며 인간의 탐욕은 사라져야 한다. 예수님의 성전청결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시8:2) 귀한 작업이었다. 성전예배는 언제나 감격과 감사의 찬양소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져야 한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린아이들의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성도들의 찬양이 분노의 애상이 될 정도로 그들은 성전에서 자기들의 영광에 도취되어 살았다.
셋째,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하던 메시아 예수님 그리스도를 섬기는 찬양이 성전에 넘치게 되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참다운 성전활동은 언제나 메시아 예수님의 이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성전은 예수님의 대속사업이 완성되는 순간,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외치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나감과 아울러 존재의의를 잃고 말았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어버렸고 대제사장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4. 예수님의 두 번째 성전청결은 참다운 성전예배를 배척하였던 유대인을 향한 심판의 채찍이었다. 오늘날 성전 된 육체를 가진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영광과 향락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잘못 사용하면 주님의 채찍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돌이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치료의 역사,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격과 감사가 새롭게 나타난다. 우리들의 몸은 기도와 찬양하는 집으로 참다운 성전활동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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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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