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 (눅7-8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누가복음 7:1-10(cf. 마8:5-13)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8:10).
1. “이만한 믿음”이란 “such great faith”(NIV), “so great faith”(KJV)이다. “이만한”(Gk. tosoutos)이란 “so strong, so great, so much”라는 뜻이다. “믿음”(Gk. pistis; faith)란 요한복음에 많이 나오는 “믿음”(belief)과는 다른 뜻을 가진다. “belief”는 행동으로 표현된 믿음이며, 여기의 “faith”는 행동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확고한 신념”을 의미한다. 무엇을 보기 전에 지식과 정보를 듣고 알고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그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렇게도 강하고 위대한 믿음”을 백부장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을 예수님은 보고 아셨다.
2. 또 백부장은 그러한 믿음을 그의 말 가운데에서 확실하게 표현하였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7:7). “Bu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 “But just(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실현성” 또는 “행동화”를 확실히 믿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언어”의 영역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그대로” “되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보셨다.
3. 또 백부장의 배경에 잠재하고 있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본 믿음이다. “말씀만 하소서” 라는 요청의 배후에는 “권위”(authority)가 자리 잡고 있다. “나도 남의 수하(=손아래)에 있는 사람이요”(눅7:9)라는 말은 “I myself am a man under authority”(NIV)이다. 권위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어서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백부장의 권위의 출처는 로마정부요 또 시저(Caesar) 황제다. 로마와 황제의 권위로 백부장의 일을 권위 있게 행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아울러 예수님의 권위를 보게 된 것이다. 자기는 지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보았다. 그는 제한적 육성의 권위와 무제한적 영성의 권위를 분명히 파악한 믿음의 소유자다.
4. 백부장은 신적권위(divine authority)를 소유한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춘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주여, 나는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할 수 없고 주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눅7:6, 7).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지도 않았고 집에 모시지도 안 하였다.
5.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 합니다”(I do not deserve to have you come under my roof)리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나온 말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을 “더럽다”고 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 예수님을 이방인 자기 집에 들어오게 하여 더럽다는 오명을 씌우지 하지 안하였다.
둘째, 사회 관습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권위가 자기 집 지붕 밑에서(under roof) 조금이라고 집의 주인인 자기의 소유권 아래에 존속하지 못하게 하였다. 백부장은 철저하게 자기는 예수님보다 낮은 자임을 자인하였고 예수님의 자비만을 요구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6. 백부장은 자기의 집에 거느리고 있는 종(slave, 노예)을 사랑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란 표현에서 “사랑하는”(Gk. entimos)라는 말은 “경의를 표시하다”(honor), “존경하다”(respect), “귀하게 여기다”(valuable)라는 뜻이다. 영어 번역에서 “valued highly"(NIV, 높은 가치를 부여하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노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은 사회 환경과는 판이한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7. 백부장은 또 피점령 지역의 주민인 유대인을 사랑하였다.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7:5)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파송된 백부장은 실상은 “정보요원”의 임무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냉담하게 칼날과 같이 처리하였다. 여기의 백부장은 따뜻한 성품을 보인 믿음의 사람이었다.
8.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놀랍게 여기셨다”(marveled)고 하였다. 이 말(Gk. ethaumasen)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베푸신 말씀의 가르침과 설교, 병 고침과 귀신 쫓으심이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였다”(amazed)고 말한 단어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에만 사용되는 특수한 용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도리어 사람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랍게 여기신”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놀랍게 여겨주시는 독특한 사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여주셨다. 하나님이 뽑아서 사용하는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NIV. I tell you the truth; NASV. Truly I say to you), 즉 “내가 너희들에게 진리를 말한다,” “참으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고 하셨다.
10.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독특하였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 “여기서 말씀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저기에서 내 하인이 치료되겠습니다.” 이것은 사람 편에서 원격치료의 능력을 먼저 요청한 믿음이었다. 치유의 유형 중에서 가장 놀라운 치유의 요청이다. 예수님 편에서 먼저 원격치료를 선포하신 일은 있다. 어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와서 죽어가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시므로 원격치료를 하여주신 일이 있다(요4:43-54).
11. 예수님은 따라서 이방인의 구원이 확산될 것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 지구상 어디에서든지 이방인의 구원이 일어날 것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의 내용과 직결되는 이방인의 구원이 바로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구원이다(행10장). 이사야 56장은 마지막 때의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사56: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2.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시면서 백부장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시고 “거의 죽게 된 자”를 살려주시는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성취를 보여주시는 일환이다.
* 누가복음 7:11-17에서 예수님은 죽은 사람까지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주시는 메시아의 사역을 보여주시게 된다.
1.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사역을 전개하여 나갈 때에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신분과 정체를 확실하게 규명하기를 원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7:19, 20). “마침 그 때에 예수님은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시면서”(눅7:21) 이렇게 대답하여 주신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2.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장”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데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눅7:16절을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보고 “두려워하였고”(fear),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glorified God),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A great prophet has appeared among us),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KJV. God has visited his people; NIV. God has come to help his people)고 말들을 하였고 이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갔던 것이다(눅7:17).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표현들이 이러한 것이다. “두려움,” “영광,” “큰 선지자,” “방문"(도우심)이란 용어들이다.
3. 여기에서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사람들은 표현하였으나 저자 누가는 데오빌로(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각하에게 이 예수님은 “주님”(the Lord;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 “주 예수님”께서 과부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Don't cry!)고 말씀하셨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대로 놓고 어떻게 눈물을 거둘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울지 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오직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자 뿐이다. “죽어있는 자를 살려내는 자”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의 실존이다. “울지 말라”고 하였으니 울지 않도록 해 주어야만 하는 책임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언행의 일치(말씀과 치유)를 보여주셨다.
4.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죽은 아들이 누어있는 관(Gk. soros; coffin, bier=들것)으로 가까이 가신다. 유대인의 법으로 “죽은 시체”는 만질 수 없다. 더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움”과 “시체”를 만질 수 있으시다.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시체”를 “생명체”로 만들 수 있는 창조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5.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 죽은 자가 어떻게 소리(음성)을 들을 수 있을가? 그러나 죽은 청년을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들려주심으로 죽은 청년을 일으키셨다. 죽었던 자는 말씀을 듣고 자기 스스로 일어나 앉았고 숨을 쉬게 되었고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은 이렇게 생명을 회복하여 주셨고 과부의 눈물을 씻어주셨다(cf. 계7:17; 21:4-7).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 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 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 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 이 되리라
6. 저자 누가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을 기록하면서 틈틈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사실을 볼 때 사람들은 이렇게 “영광의 임재”를 보고 듣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구절들을 보자.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glorified of all)
눅5: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눅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눅13: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눅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행 4: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행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21: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7. 말씀의 권위로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예수님과 말씀의 능력으로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왜 예수님은 말씀으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보자.
첫째,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말씀으로 기적을 베푸신다. 메시아의 구원 사역은 일시적 순간적 기쁨이나 쾌락을 주기보다는 영속적인 평안을 제공하여주는데 있다. 예수님의 구원은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온전하게 하여주신다.
둘째,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말씀으로 기적을 베푸신다. 말씀의 기적이 나타날 때 메시아의 오심이 증거 된다. “그 날(메시아 출현의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라”(사29:18).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6). 이렇게 메시아의 출현은 기적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
셋째, 생명 창조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말씀으로 기적을 베푸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려주시는 설교”이면서 동시에 “보여주시는 설교”다. 말씀으로 진리와 천국복음을 가르치실 때 백성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 고쳐짐을 받는다(마4:23). 예수님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셨다.
* 누가복음 7:18-35에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높이 평가하여주시는 내용과 아울러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세례요한과 메시아)를 배척하고 박해하는 시대적 상항을 설명하여 주신다.
1.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어떻게 평가하셨는가?
가. 눅7:26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선지자(A prophet)냐? 옳다.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much more than a prophet)고 말씀하신다. 세례요한은 한 사람(a prophet)의 선지자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선지자가 아니고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말라기 3:1의 말씀대로 지정된 “그 한 사람”(the one), 즉 “그 한 선지자”(the prophet)이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the one)에 대한 말씀이라”(27). 세례요한만을 두고 예언된 말씀을 성취한 “그 선지자”(the prophet)이다. 메시아의 바로 앞에 나온 “내 사자”(God's messenger)이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였기에 중요한 인물이다. “새 시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오리라고 한 엘리야는 바로 세례요한을 두고 예언되었다.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의 말라기에서는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으나 그 이전에 구원의 축복을 선포하는 엘리야가 오리라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 엘리야였다.
나. 눅7:28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요한을 평가하신다. “여자가 낳은 자”란 “혈육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2. 예수님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눅7:31) 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여주셨다. “이 세대”(this generation)란 예수님과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다”(눅7:32)고 하셨다.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복음이 어떠한 형태로라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본질상 “빛의 자녀들”(the sons of light,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예수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5)고 말씀하여주셨다. 여기에서 “지혜”는 의인화(擬人化)로 표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지혜)을 듣고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한 자들이다.
눅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누가복음 7:36-50에는 예수님께서 한 여인의 죄를 사하여주시는 내용이 실려 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갔을 때 한 여인이 믿음으로 나와서 옥합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는 사랑의 대접을 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다.
1.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면 함께 앉아있던 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이가 누구냐?”(Who is this?)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사건들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의 신분에 의심을 가지고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저자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계속하여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하여주고 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눅7:49).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7:48)고 선포하신 일에 대한 놀라운 반응이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죄 사함”을 예수님은 당당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여기에서 다시 확인하였던 것이다.
2.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고(눅7:1-10), 죽은 청년을 살리셨고(눅7:11-17),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고 바라는 그 오실 분으로 확인되었고(눅7:18-35), 시몬의 집에서 죄를 용서하여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눅7:36-50)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3.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권세는 “죄의 용서”와 더불어 “구원의 선포”가 동행하며 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도 아울러 선포하여주셨다.
4. 그 여인의 행위는 “회개의 결과”를 보여준 것이었다. 여인의 회개는 철저하였다. 눅7:37-38절에서 구구 절절히 그 철저함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 발에 입마추고,” “향유를 부으니,” 등등이다. 사람의 “회개”는 주님의 “용서”를 받는다. 용서를 받으면 “형벌”이 면죄되므로 “감사”가 생긴다. 아울러 용서하여주신 분을 “사랑한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함이 많으니라”(눅7:47)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5.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러한 “은혜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다. 시몬은 비판, 불평, 미움, 저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이고 예수님의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는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다.
* 누가복음 8:1-3에는 예수님과 동행한 여인들의 기록이 나온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이 여인들은 먼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눅8:2).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통하여 그 몸과 마음이 변화되어 새롭고 강건하게 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봉사할 수 있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도울 수 있다.
2.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동네 출신 마리아가 있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려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정신상태가 매우 악하였고 죄악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구약의 “미리암”에서 나온 이름으로 “반역” 또는 “고집쟁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나 그녀는 이름의 뜻과는 달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역을 돕는 협조자가 되었다.
3. 요안나라는 여인은 구사라는 헤롯왕의 재정출납을 맡은 사람의 부인이었는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질병도 고쳐주셨다.
4. 그 외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치료를 받고 복음사역의 동역자가 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12제자들을 섬겼다”(8:3).
5. 여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고(요19:25),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보고 이 소식을 전하였고(눅23:55), 초대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탈월한 공헌을 하였고(행1:14; 12:12; 16:13-15), 사도 바울의 선교를 도왔고(빌4:3), 수많은 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 누가복음 8:22-25(cf. 마8:18, 23-27; 막4:35-41)에는 예수님께서 거친 풍랑을 잔잔케 하여주신 기적의 내용이 나온다.
1. 풍랑을 잔잔케 하여주신 후에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가 누구냐?(Who is this?)”(눅8:25).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 그들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도대체 바람과 물결이 생명체인가 아니면 인격체인가? 광풍은 “미친바람”이다. 광풍과 풍랑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의 태도와는 달랐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의 “꾸중을 듣고” 바람, 바다, 풍랑은 그들(?)의 세력을 무효화 하였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9).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막4:39).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겼다”(눅8:25). “두려움”과 “놀라움”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일으키는 반응이며 언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셔서 당신의 능력과 권세를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눅8:25) 하며 나타난 기적과 하나님의 임재(theophany)를 보고 놀랐다.
2. 예수님이 누구신지 인식하지 못한 제자들은 자기들이 모르고 있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꾸중을 들어 마땅하였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faith?) 주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많은 말씀의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꾸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칭찬의 대상이 된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과 사뭇 거리가 멀었다. 백부장의 믿음은 “위대한 믿음”(great faith)이며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신(amazed) 믿음이 아니었던가? 목격자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이렇게 기록하면서 저자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Who is it?” “Who is this?”의 질문의 해답을 명쾌하게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3. 환난과 재난을 당할 때의 기억할 일은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 해결자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시다.
둘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시89: 9. 주께서는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시65: 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8.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9.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시107: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 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 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 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 누가복음 8:26-39(cf. 마8:28-34; 막5:1-20)에는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내용이 나온다. 마태는 두 사람으로 썼고 누가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기록하였다.
1. 귀신들린 사람에게서는 사단의 나쁜 영향력과 결과를 볼 수 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여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다스리는 힘을 잃는다. 옷을 벗고 벌거숭이로 다니면서 자해하며 밤낮 가리지 않고 괴성을 지른다. 가정과 친구, 직장과 사회생활을 잃고 산과 들에서 산다. 그리하여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고립되어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귀신은 무저갱(無低坑, 바닥이 없는 갱도, 지옥)에 들어가야 될 자로 알고 있다. 귀신 들린 자는 자신의 고유 이름이 없으므로 “레기온”(군대)이라고 하였다. 많은 귀신이 들어와 있으며 사단의 지휘권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본래 로마 군대의 단위는 이 “레기온”(legion, 6천명 단위)이었다.
3. 귀신은 예수님의 빛이 비쳐질 때에도 천국의 영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기의 신분을 알고 자신을 포기하며 절망한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무저갱에 들어가게 하소서.” 받을 심판만을 알고 있다.
4.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말씀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여주신다. 귀신에게 명령하신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눅8:29). 예수님은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하여주셨고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여주셨고 사회생활로 환원시켜 주셨다. 귀신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쫓겨나간다.
5.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또 “사람이 짐승보다 귀하다”(마12:12). 주님은 무엇을 희생하고라도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것이라”(시50:10)고 하셨다. 예수님은 2천 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하면서 구원을 베풀어주셨다. 사람들은 재물의 손실을 더욱 안타까이 여기면서 예수님을 그 거라사인의 땅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도록 떠나게 하였다.
* 누가복음 8:40-56(cf. 마9:18-26; 막5:21-43)에서 예수님은 혈루증 환자를 고쳐주시며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1. 혈루증은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든지 피를 계속 흘리는 병이다. 유대인의 법으로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여 놓았고(레15:19-31) 접촉도 부정하게 여기고(민19:22) 격리시켜서 살도록 하였다. 12년간 이 혈루증 질병을 가진 여인은 결혼생활도 못하였고 성전에 가서 예배도 드릴 수 없이 외로이 살았다.
2. 불결한 자신을 들어낼 수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짐으로써 병을 고쳐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용감한 행동을 감행한다.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지나가는 그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다. 여인은 혈루 증세가 그치는 것을 직감한다.
3. 문제점은 예수님께서 들고 나오신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눅8:45). 율법의 규정을 어긴 여인을 찾아내어 잘못을 규명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기 때문이다.” 옷을 스쳤는데 그것이 주님의 몸을 댄 것이란 말인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주님의 옷을 스친 무리는 많았다”고 베드로는 해설하였다. 무의식 속에서 예수님의 옷을 스친 자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 가”(맨 끝)를 스친 것과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여인의 중심(마음)과 예수님의 아심은 이때에 연결되어 예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의지로 나타난 것이었다.
4. 여인의 용감한 믿음은 꾸중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과 축복의 대상이 되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8:48). 이미 믿음으로 혈루병은 치료되었다. 이제는 그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았다. 몸과 마음과 영혼은 이렇게 구원되었다.
* 누가복음 8:49-50에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능력
1.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수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눅8:49).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8:50).
2.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내셨다. 죽은 여아는 의식이 없다. 어떤 소리라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창조의 근원과 연결될 때 사망의 세력은 무효화 되고야 만다. 예수님은 생명의 능력으로 사망을 물리치신다. “아이야, 일어나라!”(달리다굼, 눅8:54). 예수님의 말씀을 죽은 아이는 듣고 말씀에 순종하여 곧 일어났다. 그 부모는 놀라워하였다(amazed, 눅8:56).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놀라운 것이다. 그 구원이 몸, 마음, 영혼,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게 메시아 예수님께서 친히 성취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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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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