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브리서 연구 (총론 및 사고구조)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But we see Jesus)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2:9).
* 히브리서는 서두에서 그 아들(the Son), 예수님을 가리키며 서신 마지막까지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의 위격(位格, the person)에 대한 실상을 잘 정리하며 모든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보고 바로 따를 수 있게 하여주고 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 신약서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서신을 열거하라고 하면 단연 로마서와 히브리서를 언급하게 된다. 이 두 서신은 깊은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의 진리를 전개하고 있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the work)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으며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the person) 또는 위격(位格) 자체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대상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며 오직 그 예수님을 바르게 조명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여주기를 목표로 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But we see Jesus. 히2:9)고 선포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But) 오직 예수님을 보면서 사는 것(We see only Jesus.)을 지상과제로 삼는다.
*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봄”(Seeing Jesus)에서 이탈될 때에 그들의 신앙은 표류하고 목표와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예수님 안에서 완성하시는 역사”를 세위 놓고 진행하여 오셨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역사의 흐름 속에서 히브리적 구조를 형성하여 놓으셨고 그 히브리적 구조 속에 유일신(monotheism) 사상의 독특성을 확립하셨고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모든 인간은 헬라의 철학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는 구원의 길이 없으므로 헬라의 철학적 구조에서 출애굽 하여 광야를 통과하여야 가나안에 이르는(=천국에 도달하는)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 히브리서는 헬레니즘의 영향권 아래에 사는 유대인(=히브리인)을 위하여 쓰여진 서신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표제는 “히브리인들을 향한 편지,” "The Epistle(=letter) to the Hebrews"로 기록된다. 유대 땅 팔레스타인을 떠나서 온 세계 지중해 연안에 퍼져 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Diaspora)에는 유대교를 떠나서 기독교인(Christian)이 된 유대인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번역된 칠십인역 헬라어 구약성경(LXX)을 읽으면서 성장하였으나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히브리적 전통과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헬라적 생활과 언어에 몸을 담고 사는 이중 구조에서 방황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히브리적 사고구조(Hebraic mindset)와 헬라적 사고구조(Greek mindset)가 무엇인지 분명히 규명하고 신앙의 길잡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 두 구조에서 형성되는 영향력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대결과 갈등으로 인간의 행보에 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보게 되며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바르게 대처하여야 한다.
* 신약성경에서 이 두 사고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는 본문을 살펴본다. 요18:37-38을 보면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오고가는 질의응답이 나온다. 빌라도는 헬라적 사고구조를 가지고 말하였고 예수님은 히브리적 사고구조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두 사고구조(mindset)는 그 근거가 전혀 다른 데서 나오고 있으므로 대화가 성립되지 않고 중단되어버린다.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은 잠잠하셨고 대화는 중단되었다.)
가.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truth?")라는 유명한 질문을 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혹은 집정관)으로 임명을 받고 파견되어 온 로마인으로써 군사적 종교적 행정 분야의 권력을 장악하였고 심지어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을 임명하고 성전의 기금까지도 관장하였던 최고의 권력가요 지성인이었다. 빌라도는 “진리”(truth)를 헬라의 철학적 사고구조에 입각하여 “왕의 권력과 소유”와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히브리적 사고구조를 가지고 “진리는 왕 (자체)”라는 사실을 언급하시며 “왕 존재의 됨됨이(Being)와 영향력”과의 관계를 가르쳐주셨다. 헬라의 사고구조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색(thinking) 자체에 몰두한다. 방법론의 옳고 그름을 추구한다. 반면에 히브리적 사고구조는 진리가 존재하는 근원을 찾기에 심혈을 기울인다. 사고하는 존재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전자는 진리의 사고와 방법론을 탐구하며 후자는 진리의 존재와 목적론을 추구한다. 쉽게 말하면 생각의 구조와 존재의 구조가 다른 것과 같다. 생각 자체냐 또는 사람 자체냐의 문제에서 초점을 어디에 두는가가 다른 것과 같다.
나. 서양 지성의 역사(western intellectual history)는 주전 400년 전의 플라토(Plato)에까지 이르며 변증법 또는 논리학의 발전을 가져온다. 우주의 가치와 생성이 초월적인 근원인 “최고의 선”(the Good)에 있음을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세워진 사고체계는 헬레니즘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한편 히브리적 사고구조(mindset)는 고대 희랍의 추상적 사고의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나타난 모든 현실의 실체(reality)는 계시(revelation, 보여줌)에 의하여 이해되므로 그 계시자와의 만남에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그 계시자는 곧 여호와(YHVH)이시며 진리는 여호와 자체이시며 진리(truth)와 사고(thinking)는 인간 자체의 사고구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계시자 여호와”와의 만남(encounter)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 “선이 무엇이냐?” “시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누구냐?” “선은 누구냐?” “시간은 누구냐?”라고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타난 현실”이 있게 한 주인공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Exodus)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시간적 개념을 가지고 과거의 일로 보려는 것이 아니고 “출애굽”의 사건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하나님 자신과 출애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사건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다. 유대인 랍비와의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과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학생A: 외부에서 일어나는 세상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상문제는 세상이 골머리를 앓게 그냥 두는 것이 상책이지요.
랍비의 대답: 학생A의 말이 옳군요.
학생B: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모두 세상인데요! 눈을 감고 세상을 외면하고 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랍비의 대답: 학생B의 말이 옳군요.
학생C: A의 말은 옳은 것 같아요. 자기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또 B의 말도 옳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문제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A의 생각과 B의 생각이 똑같이 않기 때문에 A도, B도 틀렸다고 봅니다. 일치된 견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랍비의 대답: 학생C의 말도 옳군요. (랍비는 의견들보다 학생들을 존중히 여겼다.)
*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잠잠히 서계시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헬라의 철학자들과 같이 추상적 문제를 놓고 사색을 위한 질의응답을 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과의 만남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빌라도의 질문에 해당하는 해답을 이미 주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요14:6)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온전하신 인격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과 동일체(identity)를 이루고 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요14:6).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예수님에게서 계시되었다. 참 생명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다. 오직 예수님이 “더 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주신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intercessor)이시며 대제사장(High Priest)이시며 구원의 주님(Savior)이 되신다. 이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사랑을 즐기게 하신다.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는 예수님을 보노라”(But we see Jesus. 2:9)고 증언하였다.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2) 그 예수님을 보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적 과제와 의무이며 따라서 기독교(Christianity)는 행위의 종교(a work religion)가 아니며 인격체(the person) 예수님을 만나는 관계를 제시하는 종교다.
* 고린도전서 1:20-24은 히브리적 사고구조가 헬라적 사고구조를 능가함을 강조하고 있다.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를 공부하면서 히브리적 사고방식(mindset)을 가지고 예수님의 인격(The Person of Jesus Christ)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우리들의 사고구조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일체감을 이루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감동(moving)과 느낌(feeling)이 있는 체험(experience)이 요구된다. 성경연구는 지식의 충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변화(transform)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유념하자.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본다”(We see Jesus.)고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더 나음”(better)을 추구하자는 의도를 분명하게 전하여주게 된 것이다.
* 성경학자 메릴 C. 테니(Merrill C. Tenny)는 히브리서는 “더 나은 것들을 추구하는 서신” (The Epistle of Better Things)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Merrill C. Tenney. New Testament Survey, Eerdman Pub. Co.: Grand Rapids, Michigan; 1985; p.360.). 히브리서 저저는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심은 받은 자”(Christ is exalted)이므로 그 누구보다도 또 그 무엇보다도 “더 나으며”(Better) 또 “초월적”(Superior)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더 나음”(Better)과 “초월적임”(Superior)을 추구하는 영적 인격체 형성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심은 받은 자”(Christ is exalted)라는 사실은 “영원함”(“Eternal” 5:9; 6;2; 9:12, 14, 15; 13:20.)과 “하늘”(“Heaven” or “Heavens” 1:10;4:14; 7:26; 8:1; 9:24; 12:25, 26.)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에 사는 유한한 인간의 사고를 능가하는 초월성을 포함하고 있다.
* 테니는 “더 나음”(Better)이라는 총주제(Theme)를 가지고 히브리서 전체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더 나음”에는 “초월적”(Superior)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I. 더 나은 전달자: 그 아들 (1:1-2:18) The Better Messenger: The Son
II. 더 나은 사도 (3:1-4:13) The Better Apostle
III. 더 나은 제사장 (4:14-7:28) The Better Priest
IV. 더 나은 언약 (8:1-9:28) The Better Covenant
V. 더 나은 제사 (10:1-31) The Better Sacrifice
VI. 더 나은 길: 믿음 (10:32-12:29) The Better Way: Faith
VII. 결론: 믿음의 실행 (13:1-25) Conclusion: The Practice of Faith
*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나음”(Better)을 예수님은 완성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우리 형제자매들의 본분이다. 그러기위하여서 히브리서 저자는 서신(편지)을 받고 읽는 자들에게 “ . . . 합시다”(Let us)라는 제안을 누차 제시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경고, 권면, 명령, 보호, 투쟁, 등등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신앙의 향상과 더 나음을 위하여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보게 된다. “더 나은”(Better)이라는 사고구조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헬라적 사고구조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더 나음”을 추구하는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놀라운 현상들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 완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1.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4.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 6: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6.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7.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8.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9. 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0.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히브리서에 나오는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함”(perfection)이다.
1.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2.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3.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4.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5.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6.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7.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8. 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9.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히브리서에 나오는 중요한 용어 중의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의 “참여자들”(Partakers)이다.
1.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Consider Jesus)
2.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3.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4.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5. 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구원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제시하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하나님이신)는 죄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신 사실을 다음의 구절에서 증명하여 준다.
1.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3.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4.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으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속죄”과 “영원한 기업”을 우리들에게 마련하여 주셨다.
1.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 의 근원이 되시고
2.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eternal redemption)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3.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eternal inheritance)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가? 결코 아니다. 구원의 제한성을 분명히 알고 기억하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He is able to save completely those who come to God through him.)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고 하였다.
* 구원의 제한성으로 인하여 히6:4-8과 히10:26-28의 두 부분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전체를 바르게 이해하면 이러한 구절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히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