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롬14-16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3:14; 14-1; 15:7).
* 롬12-16장에서 전개되는 로마서의 실천편은 “의로운 관계”(Righteous Relationship)에 해당하며 여기에서 “관계의 신학”(Relational Theology)을 정립하고 있다. “의로운 관계” 를 이루는 신앙생활의 원칙은 한 마디로 “드림”(presentation, consecration, 헌신)이다. 롬12:1-2에서는 “드림”의 내용으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12:1)는 말씀으로 구체화 하고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자기를 내어드리고 헌신하는 삶”에서 언제나 “의로운 관계”가 이루어지고 유지된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 롬14-16장 전체는 “성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특수한 사명을 위한 헌신”으로 집약된다.
1. 믿음이 연약한 자와 강한 자를 하나로 묶는 헌신(롬14:1-12)
2. 믿음이 강한 형제자매를 위한 헌신의 원리(롬14:13-23)
3. 주 예수님의 삶의 표본에서의 섬김의 원리와 적용(롬15:1-13)
가. 예수님을 본받기(롬15:1-7) The Imitation of Christ
나. 예수님의 형제자매(롬15:8-13) Christian Brotherhood
다. 이웃사랑의 동기와 방법(롬15:14-16) Motives and Method
라. 사명자로 입증됨(롬15:17-21) A Worker’s Vindication
마. 사명자의 바른 계획(롬15:22-29) A Worker’s Plans
바. 사명자의 요구사항(롬15:30-33) A Worker’s Need
4. 교회의 봉사자(롬16:1-2) A Servant of the Church
5. 별같이 빛나는 성도들(롬16:3-16) A Galaxy of Saints: Commentation and greetings
6. 외부를 내다보는 시야(롬16:17-24) A Last Look Outward: The apostles warning
7. 높은 곳을 바라보는 시야(롬16:25-27) A Last Look Upward: Concluding doxology
* 로마서 12-16장의 핵심 축을 이루는 용어는 “드림” 즉 “산 제물로 드리다”라는 말씀이다. 이제 14장에 들어서면 “드리라”는 말씀에 버금가는 핵심 용어가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곧 “받으라”라는 말씀이다. 롬12:1의 “드리라”와 롬14:1(cf. 롬15:7. 예수님의 표본)의 “받으라”라는 말씀은 우리말의 개념으로는 상반된 견해 즉 “주고받는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으나 실상은 두 용어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 12:6-8에는 여러 가지 은사들을 나열하였고 고전12:4-11과 엡4:11에 기록된 은사들과 종합하면 모든 “은사들의 상호관계” 안에는 첫째, 일체성, 둘째, 다양성, 셋째, 조화성 이라는 뗄 수 없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로 인하여 성도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정, 교회, 사회) 고립될 수 없으며 아울러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앙생활을 영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계”를 생각하면 “드림과 받음”은 하나의 같은 맥락의 사항임을 깨닫게 하여 준다. 먼저 기록된 말씀을 주제(theme)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롬12장-13장: 성도가 향하여가는 이웃과의 관계로서의 “드림”(present).
• 롬14장-16장: 성도가 향하여오는 이웃과의 관계로서의 “받음”(accept).
* 로마서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Accept him whose faith is weak, without passing judgment on disputable matters. NIV)
1. “받으라”는 명령형 동사는 “accept”(NIV. 받아드리다, 수락하다, 용납하다), “receive” (KJV. 받다, 맞이하다), “welcome”(RSV. 환영하다, 기꺼이 맞이하다)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자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던지 “있는 그대로”(as it is) “받아드리는”(용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형제자매를 배척하지도 말고 비판하지도 말라고 교훈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일체성-다양성-조화성의 구성요소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받아드릴 수 없는 자라도 “하나님은 그를 받으셨다”(3)고 하였으며 “그 종은 주인에게 세움을 받고 있다”(4)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자들을 “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며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one who is weak in the faith 또는 whose faith is weak)를 “기꺼이 용납하고 환영하고 받아드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faith)라는 것은 믿음의 대상(인물, person)을 향한 “행위의 믿음”(belief)이 아니며 믿음(사고 또는 개념)의 사항(사실, fact)에 대한 “지성적 결단(확신)”을 의미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이후에 전개되는 “먹고(고기) 마시는(포도주) 일”과 “절기”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말씀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신앙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일반생활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실들의 취급방법을 언급한다. 실제로 당시 로마교회의 상항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그들은 유대인의 생활습관에 젖어있으므로 “먹고 마시고 절기를 지키는 일에 민감하였고 제한을 받으며 살았다.” 제한적 요소로 인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못 함으로 이러한 유대인들을 “믿음(생갈, 확신)이 연약한 자”라고 하였다. 반면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얽매이는 일이 없음으로 “강한 자”라고 구별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3.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다름”(이질성)과 “비슷함”(유사성)과 “같음”(동일성)과 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 살고 있다. 완전한 일치란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힘쓰는 것에서 삶의 다양성이 나타나고 있다. 다윗은 백성들의 일체감(the unity)에 대한 아름다음을 시편133편에서 열거하였다.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It is like precious oil poured on the head, running down on the beard, running down on Aaron's beard, down upon the collar of his robes.)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4. 예수님은 앞에 다가와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을 위한 제사장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드리셨다. 이 기도는 제자들의 일치(unity)를 위한 기도였으며 아울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였다. 요한복음 17:20-21의 기록을 본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that all of them may be one)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one).
5. 기독교 공동체는 일체감(unity, one)을 유지하는 다양성(diversity)을 지닌 것이 그 특성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20에서 이렇게 피력하였다.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Now the body is not made up of one part but of many.)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If they were all one part, where would the body be?)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As it is, there are many parts, but one body.)
6. “기꺼이 용납하고(accept) 환영하고(welcome) 받아드리라(receive)”는 실천사항은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사랑을 나타내는 구체화된 외적표현이다. 이것을 실천하면 “일체감”과 “다양성”을 아울러 포용하고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문제가 연속하여 발생할 따름이다.
* 로마서 14장에서 제기하고 있는 음식에 관한 문제의 성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울이 살던 시대의 수도 로마에 있던 가정교회들의 인적상항은 단순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얽혀진 공동체라고 하지만 구성인원은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혼합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었다. 특별히 예루살렘을 떠나서 디아스포라의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적 유대인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영적 성도들이었다고 크랜휠드(Cranfield)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경건생활의 일면은 구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탈피한 생활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약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이해가 되지만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다른 생활문제였다.
2. 구약성경에서는 채식주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먹을 수 있도록 처리된 고기만을 유대인들은 먹었다. 이러한 고기(Kosher meat)를 찾기에는 당시 로마에서는 매우 어려웠던 관계로 유대인들 중에서는 차라리 채식만을 하겠다는 “채식주의자”(?)가 생겼던 것이다. 롬14:2을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채소만 먹기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별명 아닌 별명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믿음”이란 곧 “채소만 먹는다는 고집”을 의미한다. 또 이런 이들은 모든 음식을 먹지 않고 일부분(채소)의 음식을 먹으므로 “약한 자”로 불려졌다. 반면에 고기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먹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방인 성도들이었다. 모든 음식을 아무 구애 없이 먹을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된 것이다.
3. 가능한 예화를 들어본다. 이방인 성도가 고기를 사서 집으로 가는데 유대인 성도가 “자네, 무얼 그렇게 묵직한 것을 들고 가는가?” 하고 묻는다. “이거 소고기인데 마침 값도 좋고 질도 좋아서 듬뿍 샀네, 맛있게 양념해서 구워먹으려고 하는데 오늘 우리 집에 오게. 우리 같이 즐기세.” 그런데 유대인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대답한다. “자네, 그 소고기 Kosher meat 라는 걸 확인하고 샀는가?” “아니, Kosher meat인지 Kosher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야, 맛있게 같이 먹자는데!” “어, 나는 그런 고기 먹을 수 없어. 자네 혼자 즐기게!”
4. 이런 식으로 주 예수님의 한 몸 된 형제자매가 일체감(unity)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일체감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비판과 비방이 일어나 결국은 “천국의 모형인 교회” 안에서 “화평과 기쁨과 질서”을 잃고 “불일치”의 요소가 서로 다른 생활습관으로 인하여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서 14:1-3의 권유의 말씀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다.
5. “약한 자”나 “강한 자”의 구별은 따로 사람을 지칭하여 “누구는 약하다,” “누구는 강하다”라고 지칭할 성격의 표현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당하면서 어떤 때는 “약하게 주춤거리고” 어떤 때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는 강하고 어떤 때는 약하다. 결코 누구를 “약한 존재,” 또는 “강한 자”로 낙인을 찍을 수 없다. 성도들 간에는 지엽적이고 사소한 생활의 문제로 인하여 “사랑과 화평”을 잃고 결국은 “반목, 경멸, 질시”로 틈바구니를 만들뿐 아니라 적대시하는 위험상항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6. 성경말씀은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형제자매를 “비판하지 말라,” “받아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성경에서 금기로 여기거나 죄악으로 여긴다고 언급하지 않은 사항들을 열거하여 본다.
가. 영화(movies)와 비디오(videos):
나. 화장품(cosmetics)과 성형수술(cosmetic surgery):
다. 술(alcohol)과 포도주(wine):
라. 담배(tobacco)와 대마초(마리화나, marijuana):
마. 화투(card playing)와 트럼프(trump card):
바. 춤(dancing)과 무용(ballet):
사. 유행(fashion)과 풍조(vogue):
아.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Bible translation used):
자. 운동(exercise)과 스포츠(sports):
차. 음악의 유형(music style):
카. 재물의 부요(material wealth):
* 로마서 14:5-6에는 “날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여기서는 안식일 지킴(Sabbath observance)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지킴을 타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들을 다 귀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Each one should be fully convinced in his own mind.)고 권유하고 있다. 날을 지키는 일에도 “약함”과 “강함”이 작용되고 있으나 “약한 자”나 “강한 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계속하여 권유하고 있다.
* 찰스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이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목회할 당시에 요셉 파커(Joseph Parker)라는 또 다른 훌륭한 설교가가 동역자로 활약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파커는 극장(theater)에 다니길 즐겨하였기 때문에 스펄전이 그런 행위는 경건하지 못하다고 지적을 하였다. 한편 스펄전은 담배 피우기(cigar)를 일삼았다. 어떤 사람이 스펄전에게 너무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꼬집었다. 스펄전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담배를 한 개피 씩 입에 물고 피우지 결코 한꺼번에 두 개피 씩 입에 물고 피우지는 않는다.” 파커나 스펄전은 극장구경이나 담배피우기로 인하여 죄를 범하였다고 단정지울 수는 없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하루는 스펄전이 런던의 어느 길을 걷다가 “스펄전은 우리 회사의 담배(cigar)를 피우고 있다”라는 광고판을 보게 된 것이었다. 스펄전은 자기가 교인들과 형제자매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그 순간부터 일평생 담배를 끊고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권유는 마음에 심어야 한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위의 구절 롬14:13, 15절 중에서 바울은 “약한 자”나 “강한 자”가 모두 “네 형제”라고 하였고 그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죽으신(피 값을 치루고 구원하신) 형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3)고 하였다. 비판의 원인이 된 음식이나 날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노라”(As one who is in the Lord Jesus, I am fully convinced that no food is unclean in itself.)
* 1928년도에 펜실바니아 주의 몬트로즈(Montrose)에서는 유명한 설교가 반하우스(Dr. Donald Grey Barnhouse)를 모시고 약 200명의 성도가 모인 집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했던 한 중년부인은 매우 놀란 표정과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설교자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하였다. “목사님, 저 뒤에 양말(스타킹)도 신지 않고 앉아 있는 젊은 애들 두 명이 있어요. 저 애들을 야단치고 양말을 신고 오라고 말해 주세요!” 매우 당연하고 강경한 요구였다. 이에 대한 반하우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성경말씀에 예수님의 젊으신 모친 마리아는 양말(스타킹)을 신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스타킹을 신기 시작한 때는 15세기 이타리아에서 창녀들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귀부인들이 스타킹을 신고 입으므로 유행이 되었고 후에 빅토리아 왕조 때에는 귀족들까지 스타킹을 입었답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여기 미국에서는 여름철이면 여자들이 스타킹을 입지 않게 되었고 아무도 이것을 문제로 삼지 않게 되었답니다. 시간은 언제나 바뀌고 있으며 빅토리아 왕조의 규율도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 한국에서도 해방(1945년) 직후에는 부흥사들이 교회의 강단에서 여자 성도들을 향하여 무섭게 꾸중을 하곤 하였다. “저렇게 입술을 빨강색으로 물들이고 왔네요. 아니 쥐를 잡아먹고 교회에 나온 겁니까?” “아이구, 저렇게 눈썹이 쌔까마타니, 가마솥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왔구만!” 등등 자기 마음대로 발설하던 일도 있었다. 세대가 변화하여 여자들의 치마길이가 점점 짧아지면서 강단의 강사들은 “뻘거벗고 다니지 말라”는 과도한 언사까지도 뱉어내었다. 이렇게 덕을 세우지 못한 역사가 있어왔다. 덕을 세우지 못하면 상대방을 무너뜨린다.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 로마서 15:1-13에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던 모든 생활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표본(example)으로 삼고 살아야 할 사항들을 열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소원하셨던 바는 요한복음 17장에서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드린 기도에서 반영되고 있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사도행전 교회(the Apostolic Church)는 예수님의 기도가 반영되는 일치와 발전을 보여주었으나 그 후로는 하나가 되는데 실패한 역사를 이루어 놓았다. 갈라디아(Galatia) 교회는 율법주의자들로 인하여 황폐하게 되었고 고린도(Corinth) 교회는 파당과 근친상간 등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고(고전5:1-3) 버가모(Pergamum) 교회는 불신자와의 결혼문제로 인하여 믿음을 분산시켰으며(계2:14) 라오디게아(Laodicea) 교회는 참으로 병든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계3:16). 예수님의 간절하신 기도에 미치지 못한 불일치의 참담함을 들어내고야 말았다.
*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서로 받으라”는 일체감(unity)도 실상은 성공적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쿨만(Oscar Cullman)과 같은 신학자는 초대교회 때 로마에서 베드로나 바울을 포함하여 많은 성도들이 심한 박해를 받고 순교까지 하게 된 배후에는 믿는 자 서로의 질투와 적대 감정이 외부에 들어나면서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지 못하고 생활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롬15:1-13에서는 일체감(unity)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표본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원칙으로 열거하였다.
첫째.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롬15:1-6)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둘째. 유대인이나 이방인(열방들)을 모두 “받아드린다”(롬15:7-13)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accept, receive, welcome)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the Gentiles)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the Gentiles)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시18:49) 함과 같으니라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the Gentiles)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신32:43)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the Gentiles)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시117:1)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the nations)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the Gentiles)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사11:10)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롬15:7-13의 기록 중에서 “이방인들”이나 “열방들”이라는 단어가 “the Gentiles"로 기록되고 있음을 유의하자. NIV에서는 12절의 전반부에서 “열방”을 “the nations"라고 한 것은 예외적이다. ”유대인“을 ”Jew"라고 표현하면서 대문자로 기록한 것과 같이 “이방인”도 대문자로 “Gentile"로 기록하여 기록상에서 대등한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가. 롬15:9-12에 기록된 말씀들은 “이방인들을 위한 구약의 인용구들”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구약의 핵심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이미 로마서의 강의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열방들)의 구원을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유대인 민족을 형성하셨던 구약역사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사도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믿음을 심는 일이었다.
나.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하게”(15:15) 라고 하면서 자기의 생애를 복음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롬15:16-21에서는 자기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며 일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 어떻게 능력 있게 나타나고 있음을 간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자세히 읽으면서 음미하자)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다. 바울은 로마서 15:14-16:27에서 로마서의 서론인 1:1-15에서 언급하였던 내용들을 다시 결론적으로 정리하기를 원하고 있다.
1.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로마서 서신을 기록한 목적이 재차 반영되고 있으며 바울 자신의 장래 계획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생애의 목표는 곧 우리들 모든 성도들의 목표이기도 한 점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2. 실제로 롬15:14-16:27은 로마서 서신의 맺음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확신한다고 말하였다. 오해를 막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의무에 대한 헌신을 약술한다(15-21). 그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 이것은 이적의 표적으로 확증되었다(18-19).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해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20, 21절).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려는 자신의 소망을 말한다(22-29). 또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이 그들로 지원해 주기를 요청하면서(30-32) 평강을 기원하는 축도로 끝맺는다(15:33). 그 후 16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이 된 여러 성도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문안한다. 그의 인사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도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동역자들과 함께 문안한다(21-23). 그의 마지막 축도는 하나님을 힘 있게 찬양함으로 끝맺는다(25-27).
라.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특수한 목적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골격을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다. 그것은 이미 “이방인을 위한 복음에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언급한바 있다. 로마서 1:16-17을 본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나타난바 된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하여져서 믿고 순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로마서의 마지막인 16:25-27에서 다시 확인하고 있다.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 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 따라서 로마서 1장의 서두와 16장의 말미에서 기록하고 있는 “복음”(gospel)의 내용과 핵심을 정리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복음은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세계선교(Worldwide Evangelism)와 직결되는 “신비의 계시”(the revelation of the mystery)라는 점을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다. 두 부분의 비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 로마서의 1:1-17과 로마서16:25-26의 유사점
가. (1:1) 하나님의 복음 (16:25) 나의 복음
나. (1:3)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16:25)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
다. (1:11)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 (16:26)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라. (1:5) 모든 이방인 중에서 (16:26) 모든 민족이 믿어
마. (1:5)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16:26)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바. (1:2)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약속함 (16:26)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사. (1: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16:26) 이제는 나타나신바 됨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전15:1-4에서 언급한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3.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고난 받아 죽고 사심에 관한 기록은 700 B.C.에 미리 이사야 53장에 자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다. 이러한 내용의 성취는 눅24:44-46에서 증언한다. 전도자 빌립도 이 사실을 아프리카 사람에게 설명하였다(행8:28-35).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는 시편 118편을 인용하면서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행2:24-32; 4:10-11; 10:43). 바울의 설교 역시 시편2편과 16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성취를 강조한다(행13:33-37).
4.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주제”를 아브라함의 예를 인요하며 설명하고 있다(창15:6; 롬4:1-8). “하나님의 의”(God's righteousness)에 관한 계시(revelation)는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다(롬3:24).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명한다(6, 7, 8, 11, 13, 15, 16, 18). 또 로마서 15장에서도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을 강조한다(9-12, 21).
5.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갈3:6)의 예를 아브라함에서 찾으며 그 약속은 이미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갈3:8).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6. 바울은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후반부 구절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설교한 “복음”(the Gospel)은 “성경대로”(according to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되었음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설교였다(고전15:3-4). 바울이 강조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빈 무덤과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의 모든 주제의 핵심사항은 구약성경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결코 “신비함”이 없는 말씀의 성취다.
7.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에 감추어지고 몰랐던 “복음의 신비”(the mystery of the gospel)가 나타나서 “복음전파의 중요한 핵심”(the very core of the gospel preaching)을 형성하고 있음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에베소서 3: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the administration of this mystery)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8. 복음의 내용을 “복음의 비밀”(the mystery of the gospel)라고 부르는 데에는 독특한 요소가 내장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엡6:19; 골1:26-27; 4:3).
엡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the mystery of the gospel)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골1:26. 이 비밀(the mystery)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the mystery)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the glorious riches of this mystery, which is Christ in you)
골4: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the mystery of Christ)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the mystery)을 나타내리라
9. 엡3:6에서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말씀 한 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함께 한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됨”(united together in one body)은 이전 세대에는 몰랐던(unknown) 사실이다. 교회를 통한 놀라운 말씀선포는 바로 이 사실이며 이것이 “복음의 비밀(신비)”이며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한 몸을 이루고 하나의 독특한 생명의 기관(unique and living organism)을 형성한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경륜이며 비밀인 것이다. 고전12:12-13의 기록을 본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0. 로마서에서는 “비밀”(mystery)에 관한 교훈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와 같이 발전된 구체적인 교훈은 없으나 비밀의 기본 바탕에는 공통적인 개념이 내장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한 몸을 이룬다는 특수성에 대하여서는 로마서 6장; 7:1-4; 8:9-10 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특별히 롬9-11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 이방인과의 장래 연합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 롬16:1-16, 21-24에는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문안의 글을 기록한다. 롬16장을 읽기 시작하면 연속하여 언급되는 말은 “문안하다”(Gk. aspazomai; greet)라는 단어다. 로마서 16장 안에서만 이 단어가 22회 반복된다. 본래 “쌍방의 두 친구가 기쁘게 얼싸 안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서로 인사하다”(존경과 공손함으로)로 표현된다. 바울과 로마의 가정교회 교우들과는 아름다운 친구로써의 깊은 친교가 밑바닥에 놓여 있음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1. 뵈뵈를 추천한다.(1-2):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집사)이다. 바울은 지금 집사 뵈뵈를 교회의 대표로서 로마교회에 “추천한다”. 이 말은 뵈뵈가 교회의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자, “비중 있는 사역자”란 말이다. 이것은 그녀의 사역의 공식적인 추천과 보증이다(고후3:1-2). 그녀는 믿음 안에서 자매이며 “여집사”로서 공적인 직위를 가졌다. 그녀는 바울의 보호자로써 생활(경제)에 책임을 질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그녀가 바울과 복음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이다. 뵈뵈는 지금 로마교회에 이 편지를 가지고 간다. 그래서 “합당하게 영접하라”는 말은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그녀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를 가볍게 대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대하라.
2.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3-5a):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동역자”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신실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붙이는 말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늘 함께 등장하는데 항상 부인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온다. (고전16:19에서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다) 브리스길라는 초대교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여성 지도자임을 보여준다(행18:18; 고전16:19; 딤후4:19).
3. 에배네도(5):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5). 새로운 지역의 ‘처음’이 얼마나 어려움과 막막함. 그래서 이 사람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전하는 자나 개종하는 자나 모두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4. 마리아(6): “너희를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 여성 마리아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그 유익을 위하여 특히 힘썼다. “수고하다”라는 동사는 바울의 복음전파와 목회사역에 종종 사용된다.
5.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they are prominent among the apostles)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그들은 1) 사도의 칭호로 받을 정도로 값있는 자들이며, 2) 사도들이 그들을 탁월한 사람으로 평가하였고, 3) 사도라고 불러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등등의 칭찬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유니아(7)가 여자 이름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Junia (NRSV, NKJV, 공동) - 남성 단축형 Junias (NIV, NASB, NEB, JB) - 여성형) 아무튼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함께 문안인사에 들어간 것은 이들 모두가 차별 없이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음을 말한다. 이런 기록들은 초대교회에서 여성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활약이 매우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6. 이들과 문안하십시오(8-16)
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10a): 그리스도께서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나.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10b):
다.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11b):
라.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13):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루포의 아버지, 때문에... 그래서 그는 특별한 .... 죄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운수 나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바울은 그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말한다.
7. 다시 생각나는 사람들(21-24)
가. 디모데(21) - 나의 동역자(my fellow worker) 가장 중요한 제자요 일꾼
나. 더디오(22) -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the writer of this letter, NRSV / he one writing this letter for Paul, NLT). 고대 사회에서 필사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문직이다.
다. 가이오(23) -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 Gaius, whose hospitality I and the whole church here enjoy(NIV).
라. 에라스도(23) 이 성의 재무관 / Erastus, who is the city's director of public works(NIV). 이런 사람들의 물질로 인해 교회가 세워졌다.
* 로마서는 바울 서신가운데 가장 논증적인 책으로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를 구축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런 면에서 고찰해볼 때 이 서신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을 주된 축으로 하여 서술된 기독교 최고의 신학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로마서는 구원의 원천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구원의 근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이며 구원의 조건이 믿음임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서신의 모든 내용이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만이 죄악성으로 타락한 삶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소망임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의(義)의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의(義)을 믿는 신앙의 기반위에서 그 의(義)를 성령님 안에서 실제 삶 가운데서 살아 나타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사람의 생활을 살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고 변론한 후 실제적인 생활가운데 그 의(義)을 적용시킨 것 같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의와 거룩함과 진실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삶의 제사로 하나님께 우리 몸과 모든 것을 믿음 안에서 드림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 된 삶을 살아야한다.
-------------------------------------------------------------------------------------------------------------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