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믿음의 실상이신 예수님 (히11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1-3).
* 히브리서는 1:1로부터 시작하여 10:18(전반부)까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각적인 방법과 구조를 동원하여 “승천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의 진리 체계인 우월성”을 구축하였다. 이제 10:19-39에서는 서신의 후반부(11-13장)에서 전개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신앙적 실천 체계”를 정리하고 있다. 특별히 10:22-25에서는 실천편(11-13장)의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를 먼저 아래와 같은 주제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논리편의 예수님과 실천편의 성도들이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뜻(말씀)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11장: 믿음장) 믿음의 담력(믿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 Let us draw near).
둘째, (12장: 소망장) 소망의 담력(소망): 소망을 굳게 잡자 (23. Let us hold fast).
셋째, (13장: 사랑장) 사랑의 담력(사랑): 사랑으로 격려하자 (24-25. Let us consider).
* 히11장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내용은 특별히 10:38-39의 말씀과 직결되며 이 요절 가운데에서 인용된 하박국 2:4(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ut my righteous one will live by faith.)은 “믿음의 핵심사항”으로써 “시야를 언제나 예수님에게 돌리도록 하라” (참고.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는 강력한 권유의 말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체와 목표는 대제사장 예수님이시며 믿음은 성도들과 예수님을 연결하고 만나게 하여주는 도구와 방편이 된다. “왜 믿느냐 또는 무엇을 믿느냐”고 할 때에 “믿음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게 된다. 여기에서 믿는 사람 자신의 확신이나 마음의 결단(“. . .을 하리라”)은 결단코 믿음으로 볼 수 없다. 대상이 없는 자신만의 사고구조(헬라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고구조는 언제나 하나님(인격체)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 히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나.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But the righteous shall live by faith")라는 하박국 2:4의 말씀은 롬1:17과 갈3:11에도 인용되고 있다. 똑 같은 인용이지만 사용된 방법이 매우 다르다.
(1) 롬1:17에서는 “의”(righteousness)를 “불의”(unrighteousness)와 비교하면서 “의”를 강조한다.
(2) 갈3:11에서는 “믿음”(faith)을 “율법의 행위”(works)와 비교하면서 강조한다.
(3) 히10:38에서는 “삶”(life)이란 위대한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참 생명” (true life)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의”와 “믿음”과 “삶”은 모두 하나님(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려주시는 축복이며 선물이다.
* 히11:1의 말씀(“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KJV.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에서 정리하여야 할 단어는 “실상”(substance)과 “증거”(evidence)의 두 가지다.
1. 먼저 히11:1의 번역된 구절들을 살펴본다.
공동번역: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새 번 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NIV: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NASB: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2. “실상”(substance)이라는 단어를 “보증,” “확신,” “실물,” “sure,” “assurance” 등등으로 번역하면서 “어떤 사고의 주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실상”(Gk. hypostasis)이란 원어가 히1:3과 히3:14에서도 나온다. 그런데 히3:14의 구절(“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에서 “확신한 것”(Gk. hypostasis; confidence, assurabce)과 같은 단어다. “우리가 확신한 것”이라는 주체적(subjective) 개념을 언급하고 있으나 실상은 “확신한 것”의 내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일”(3:14)이며 또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일”(3:12)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예수님)을 확신한 것”이라는 객관적인 목표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만일 주체적인 개념을 따라서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나의) “보증,” “확신,” “실물,” “sure,” “assurance” 등의 주체적 내용으로 해석하게 되면 “믿음을 자기에게 돌리고 있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것은 “예수님 중심의 히브리서의 논리에서 이탈된다.” 이렇게 되면 바른 이해를 거스리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결코 “주관적인 전후관계”(subjective connotation)로 번역되거나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히11:1에서 저자는 “믿음은 . . . 이다”(Faith is . . .)라는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믿음 자체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며 “믿음의 결과,” “믿음의 영향력,” “믿음의 내용물,” “믿음이 주는 그 무엇”을 나타내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받아서 소유하며 결국은 실상(실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1장 내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By Faith, 믿음의 수단으로) 여러 가지의 결과를 받아내고 만들어내는 역사를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 . .을 준다”(Faith gives . . . )고 해석하여야 한다. 믿음의 주관성(subjective)을 말하지 않고 믿음의 객관성(objective)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주체가 믿음의 대상인 객체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4. “실상”(Gk. hypostasis, substance)이라는 단어는 히1:3에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形象)이시라”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고 하였다. 그러므로 11:1의 “실상”과 1:3의 “형상”은 같은 뜻을 지닌 같은 단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한다(창1:26, 27; 5:1, 3; 9:6, 고전11:7, 약3:9).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고후4:4, 골1:15),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음을 언급하였고(롬8:29) 아울러 성도들은 마지막 때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할 것임을 언급하였다(고전15:49; 빌3:20-21).
5. “실상”(실제의 모양, 형상)이라는 단어는 주관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해석되었으나 히브리서의 믿음은 “substance,” “being,” “title deed” 등으로 나타나는 객체로 설명한다.
6. 히11:1에서 언급하는 “바라는 것”(hoped for)이란 원어에서 “현재피동형분사”로써 “우리가 바라는바 그것”(what we hope for)을 의미한다. “바라는 대상”(object)이란 “기대하는바 영원한 하늘의 축복과 대제사장 예수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예수님과 하늘나라)을 준다”고 해석하게 된다.
7. 히11장에는 구약의 영웅적인 성도들이 나열되고 있다.
가. 구약의 신앙인들은 신약의 신앙인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바라보았던 믿음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과 같은 것으로 구약과 신약이 대비되며 일체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 아브라함은 전생애를 기울여 “하늘의 영원한 본향(a better country)”(11:13-16)을 실상으로 믿고 살았던 믿음의 조상이다. 모세는 하나님이(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보상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있었다(11:26-27). 11:26에서 모세는 영원한 보상이 있음을 분명히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았다고 한 기록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12:28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We receive a kingdom which cannot be shaken)고 설교의 말씀으로 권유하고 있다.
히11:14. For those who say such things make it clear that they are seeking a country of their own./ 15. And indeed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at country from which they went out,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 16. But as it is, they desire a better country, that is, 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히11:26.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8. 지금까지는 히11:1의 상반부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문장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그 하반부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실제로는 상반부의 반쪽 문장과 하반부의 반쪽 문장이 “그리고”(and)라는 등위 접속사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문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반부의 문장해석은 상반부의 문장해석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 그 핵심사항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믿음은 . . . 이다(is)”라는 주관적 정의를 내릴 것이 아니라 “믿음은 . . .을 준다(give)”라는 객관적 목적을 찾아내어야 한다.
둘째, 믿음은 어떤 가능한 영적 결과(a possible spiritual result)를 만들어내는지를 찾아내어야 한다.
셋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으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증거”란 무엇인지 찾아내어야 한다.
넷째, 상반부와 하반부의 반쪽 문장 둘이 한 문장이 되어 똑 같은 해석을 하였으므로 그 결과로 일관성 있는 “바른 믿음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9.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NIV.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NASB.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KJV.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의 해설.
가. “증거”(Gk. elenchos)라는 단어는 객관적 목적을 표현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번역체인 “확신”(certain, conviction) 보다는 “증거, 증명”(evidence, proof)이라는 표현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신한다”라는 식으로 주체적 해설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객관적인 표현으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준다”고 해석하여야 한다. 여기에서도 믿음은 무엇이라는 식의 정의를 내릴 것이 아니라 믿음은 무엇을 주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증거와 증명”이 될 인물과 사건을 나열하였다.
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체(reality)와 하나님의 능력(power)과 하나님의 일(work)”을 “어떻게 믿음은 보이는 실체로 볼 수 있게 하여 주는가” 하는 사실을 히브리서 저자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믿음으로”(By Faith)라는 표현방법을 도입하여 믿음이 주고 있는 내용들(인물, 사건)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 구약의 신앙인들이 지상에서 행한 모든 활동(회막에서, 회당에서, 가정에서)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바라는 것들, things hoped for)의 일부분을 “제시한 증거”였으며 신약의 신앙인들에게는 그 제시한 활동들을 현실세계에서 “보여준 증거”였으며 아울러 “하늘의 볼 수 없는(unseen) 것들”(하나님의 능력과 영원한 구원)을 볼 수 있게 하여준 “증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증거”는 “그리스도 중심”(Christ-centered)의 “증거”(evidence)를 제시한다.
라. “증거”(證據, evidence)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뚜렷한 근거”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다음에 무지개로서 “증거”(창 9:12)를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보증하시고 증거를 주신다. 예수님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5:36)라고 말씀하셨다. 사도요한도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하면서 “아들에게는 생명(영생)이 있다”고 증거하였다(1요5:9-12). 아울러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마.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의 모든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only through Jesus) “하늘나라의 본향”(the heavenly homeland)에 “오직 믿음으로”(only by faith)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11:39-40; 12:1-3).
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 히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NIV.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KJV. For by it the elders obtained a good report; NASB. For by it the men of old gained approval.)에서 “선진들”은 “이로써”(by it) 즉 “믿음으로”(by faith) 히11:1의 내용을 입증하는 신앙인들로 거론이 되었다. 히12:1에서는 “선진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so great a cloud of witnesses)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이름과 믿음의 사역들을 열거하고 있다. 아벨(4), 에녹(5), 노아(7), 아브라함(8-10, 17-19), 사라(11-12), 이삭(20), 야곱(21), 요셉(22), 모세(23), 이스라엘 백성(29-30), 라합(31) 등이다.
* 히브리서 11:1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는 것들”(the unseen)은 현실의 어떠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받는”(by faith gives) 위대한 결과이기 때문에 히11장 전장에서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기록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기록하고 있다.
가.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나.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다.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마.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바. (10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사.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 (14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자.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차.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카.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prepar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 이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와 직결된 말씀이다.
1.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문구에서 “말씀”(word)은 요한복음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Logos“의 “말씀”이 아니고 “Rhema”의 “말씀”이다. Logos로 표현되는 “말씀”은 “존재 자체,”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뜻하고 있으나 Rhema로 표현되는 “말씀”은 “말씀의 활동결과”를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사실과 결과”를 반드시 수반하고 있다. “말씀”(Rhema)의 결과는 반드시 나타나고 현실적으로 눈에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Rhema의 말씀을 준다(gives).” “이러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말씀의 활동결과를 보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2.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3)라고 하였다.
가. 이 말씀은 천지창조의 기록을 보여주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찾아보게 하여준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있으라,” “나뉘라,” “내라,” “비추라” 등의 명령의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보게 된다.
나. 그런데 “모든 세계”라는 말에서 “모든 세계”(Gk. aionas)라는 단어는 “모든 세대”(ages, 복수형)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모든 세계”라는 표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세대”(ages, 복수형)를 의미한다. 영어의 KJV이나 NASB에서는 “the worlds”라는 복수형으로 표기하였다. 일반적으로 “world”라는 단어는 물질적 세계를 의미하는 반면 “ages”라는 단어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인간의 세대를 의미하고 있음은 좋은 참고가 된다. 히브리서 1:2에서는 “aionas”를 사용하고 있는데 매우 좋은 비교가 된다.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다. 위의 히1:2에서 “모든 세계”가 곧 “aionas”이며 “그(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aionas)를 지었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신 “로고스”이시다.
라. 또 위의 히1:3에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씀”은 곧 “레마”(Rhema)다. 예수님은 “레마”로 만드신 만물을 운행하신다.
마. 그러므로 “모든 세계”(the world)와 “모든 세대”(the ages)는 예수님이 만드시고 운행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바.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by faith) 우리가 알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과 새로운 창조의 운행을 행하고 계시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3. 이러한 “믿음의 결과”(by faith)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는 신앙적 결론의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신”(creation out of nothing; creation ex nihilo)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창조의 근원이시다. 또 예수님은 유한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유지하고 보존하여 주신다.
4. 히브리서가 보여주는 “믿음의 원리”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10장까지의 원리와 11장부터의 실천은 이렇게 “예수님 중심”(Jesus centered)으로 일관성 있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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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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