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메시아의 가르침, 산상보훈 (마5-7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 (신학박사 Ph.D)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 마태복음 5장-7장은 예수님이 산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며 설교다. 우리는 이 산상설교를 산상보훈(수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하늘)나라의 고귀한 헌장과 같고 하나님(하늘)나라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놓았고 또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헌장과 같다고 하여서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이렇게 된다”는 식의 조건이 연결된 조항들이 아니다. 또 “하나님(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이렇게 살아라”는 조건부적 명령도 아니다. 법의 조항도 못 지키며 율법도 거스르며 사는 인간들인데 그것보다 더 엄한 명령과 조항을 따르고 지키란 말인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고 불가능한 요구일 뿐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지켜야만 하는 또 다른 계명들을 주시지 않으셨다. 우리들을 법에 얽어매어놓지 않으신 것이다.
* 그러면 산상보훈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처음에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하늘)나라의 백성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본질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살펴본다면 먼저 “하나님(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하며 그 후에는 자연발생적인 그러한 상태가 나타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본질적인 백성 됨”으로 돌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준다.
* 오늘 우리들이 연구하고 있는 본문(text)은 마태 5장-7장의 산상보훈 전체 문장이다. 전체 문장(text)의 이해를 위하여서는 전후관계 또는 문맥(context)의 이해와 문장(text) 자체 안에 있는 내용(contents)의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전체적인 안목으로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부분적인 안목이 전체 이해에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 문맥(context)을 살펴보자. 문맥을 따라 산상보훈 이전을 보자.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셨다(3장). 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자기(아들)은 없고 하나님(아버지)만 계시고 하나님만을 완전하게 의존하는 자이심을 확인하셨다(마4:1-11). 그런 이후에 시작된 사역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고 지시하여주신 “하나님(하늘)나라 세움”을 목표로 삼고 “천국복음”을 전파(선포)하셨다(4:17). 그리고 바로 가르침을 베풀어주신 것이 곧 산상보훈이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시작은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5:2)가 되며 다음과 같은 마지막을 보여준다.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가르침으로 끝을 맺으셨다는 기록이다. 마태복음에서 이와 같이 긴 가르침은 오직 여기에(5-7장)만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이 가르침의 기본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지탱하는 토대요 뿌리다. 모든 원리를 여기에서 가르치며 선포하고 있다. 설교의 기본 틀은 언제나 선포(kerygma)와 교육(didache; 가르침)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늘 맞물려 돌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 실증을 여기(산상보훈)에서 보여주셨다.
* 문맥(context)에 따른 산상보훈의 이후를 보자. 예수님의 선포(설교)와 가르침에는 언제나 생명과 빛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가 곧 “치유”(healing)다. 산상보훈 이후에는 곧 예수님의 사역(문둥병자의 치유, 백부장 하인의 치유, 베드로 장모의 치유, 풍랑을 잔잔케 하심, 군대귀신 들린 자의 축귀 등)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치유란 곧 하나님(하늘)나라를 설립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곧 천국복음(4:17, 23)을 전파하시고 그 하나님(하늘)나라가 임한 현실의 증거로 모든 앓은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의 고침을 보여주신다. 즉 하나님(하늘)나라가 임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의 나라가 패배하는 증거로써 귀신이 떠나가고 병 고침 받는 사건이 나타난다. 영적전쟁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주신 것이다.
* 이제는 산상보훈 자체(text)의 내용(contents)을 보자. 산상보훈은 크게 세 부분, 서론(5:1-16), 본론(5:17-7:27), 결론(7:28-29)으로 구성된다.
1. 서론(5:1-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로 시작한다. 팔복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믿는 자는 이렇게 하나님(하늘)나라의 복(makarious)을 소유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신다.
2. 본론(5:17-7:27):
본론의 서두(5:17-18)에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구약의 말씀)의 모든 기록은 “완성”(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과 “성취”(다 이루리라)를 이룬다고 선포하신다. 모세가 산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말씀”(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들어내는 표준이 되었고 죄를 깨닫게 하고 “불의한” 백성의 위선을 보여주는 조항으로 존재하여 왔다. 이제 갈릴리의 산상에서 예수님은 불의로 연결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의”로 연결되어 계시의 말씀이 성취되어 하나님(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상항을 열어주신다. 결론적으로 하나님(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로 세운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righteousness)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고 하셨다.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자기 의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의”(righteousness)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천국백성이 되는 혜택이 주어진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6)고 하였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이 예수님의 의로 연합되고 축복된 상태가 된다는 길잡이가 된다.
3. 결론(7장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로 끝난다.
* 예수님이 선포하고 가르치신 “의”를 어떻게 이루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인지 우리는 마태복음을 잘 읽으면서 오해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의 공로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마태가 언급한 조건적 기록을 살펴보자.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우리는 천국백성이 되는 구원의 문제를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 문제가 우리의 행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하여주신다(마19장).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예수님은 마5:20에서 우리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를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7장 12절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퇴색되어진 율법의 정신을 회복한 부분과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 산상보훈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서론(5:1-12): 도입(1-2), 팔복(3-12). 빛과 소금(13-16).
- 본론(5:17-7:27):
- 더 나은 의(5:17-20),
- 율법 정신의 바로 행함(5:21-48),
- 은밀한 가운데의 행함(6:1-18),
- 물질주의의 배격(6:19-7:11),
- 적극적인 선행과 황금율(7:12), 경고(7:13-27).
- 결론(7:28-29): 선포와 교육의 권위.
*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보다 더 나은 의”란 무엇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백성들 가운데 대표자들이었다. 서기관들은 성문법과 불문율인 장로들의 유전을 포함한 모든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 전문 학자들이요, 예수님 당대의 율법 교사들이었다.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특별히 컸다. 그들의 의의 실체를 알기 위하여 마태복음 23장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3장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주신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삶에 대한 설명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셨을 때,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낮은 의와 불충분한 의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가르침은 순종할 것이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가르치신다(23:3).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더 낮은 의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그들은 말은 하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다(23:3b).
(2)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석할 때 사랑과 자비가 없다 (23:4; 참고, 9:13; 12:7).
(3) 그들은 넓은 경문을 달고 옷술을 크게 하여, 길에서 그들의 경건을 자랑한다(23:5).
(4) 그들의 직업적인 영향력은 자기 권력 확대만을 위하는데 사용한다(23:6-7).
(5) 그들은 그들의 개종자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23:15).
(6) 그들은 율법의 사소한 것에 얽매여 진짜 중요한 문제를 무시하게 하는 눈먼 안내자들이다(23:23).
(7) 그들의 청결에 대한 관심은 안보다 겉의 의식적인 청결이다(23:25-28).
(8) 그들은 살인자들이요(23:29-33) 협박 자들이다(23:34-36).
* 마태복음에는 “의”(righteousness)라는 단어가 7번 (3:15; 5:6, 10, 20; 6:1, 33; 21:32) 나타난다. 그 중에 두 번(3:15; 21:32)은 구원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언급하며 나머지 5번은 산상 수훈에 나타난다. 산상 수훈에 나타나는 단어 “의”(Gk. dkaiosune)는 단순히 구약 율법과 같은 어떤 표준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개인들에게 적용되어지면서 “관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된다.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과의 신실한 관계를 강조한다. 따라서 산상 수훈에 나오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한다.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5: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 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은 마5:21-48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획득하는 방법을 구체적인 예화로 설명하여 주신다. 살인(5:21-26), 간음(5:27-30), 이혼(5:31-32), 거짓 맹세(5:33-37), 복수(5:38-42), 원수(5:43-48) 등이다. 이 여섯 개의 설명에서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러한 표현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서기관들의 해석을 대조 비교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서기관들은 율법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랑에 기초를 둔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의 성취”(22:37-40; 롬 13:10)를 말씀하여 주신다. 예수님은 율법의 그 어떤 것도 변경하거나 갱신하지 않고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보여 주셨다.
(1) 살인에 대하여(마 5:21-26)
예수님의 청중들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신 5:17)는 계명의 문자적인 의미를 지키면 그것으로서 만족하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 사람은 명백하게 나타난 행위, 즉 살인의 행위에서 율법의 위반이 들어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명백하게 나타난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사고와 감정, 즉 분노에까지 적용한다. 다시 말하면, “분노는 살인의 시초이기 때문에 분노는 살인과 같다”(요일 3:15). 또한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라가” 또는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살인과 같다고 한다. 살인한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은 세상 법정에서는 재판을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재판을 받게 된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말한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마5:22).
(2) 간음에 대하여(마5:27-30)
서기관들은 간음치 말라(출 20:14; 신 5:18)라는 계명에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내와 실제로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서기관들은 항상 계명은 명백한 행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계명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뛰어넘지 않는다. 서기관들은 간음을 다른 사람의 아내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자”는 당연히 “모든 여자”(any woman)로 이해하여야 한다.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개념은 서기관들의 개념보다 훨씬 더 넓다. 게다가, 예수님은 간음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신다. 음욕은 간음의 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28절)고 경고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간음(음욕) 죄를 짓도록 유발하는 수족들을 잘라낼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물론 과장법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의 심각성, 특히 간음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간음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의 법정에 서야한다(29-30절). 만일 우리가 더 나은 의를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29-30절).
(3) 이혼에 대하여(마5:31-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혼이란 이혼사유는 무엇이든지 간에 이혼 증서에 의해서 정당화되어진다고 생각한다(마19:3). 그들은 이혼은 신24:1에 따라 법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면에서 그들에게 대답한다.
가.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은 간음을 한 사람이다(마19:9; 막10:11).
나. 어떤 사람이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은 간음을 한 사람이다(마 5:32).
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을 한다면, 그는 자기 아내로 하여금 간음을 하도록 한 사람이다(마5:32).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이유의 이혼도 매우 큰 죄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4) 거짓 맹세에 대하여(마 5:33-37)
예수님은 구약의 여러 부분의 몇 구절들, 예를 들면 레19:12, 민30:2, 신23:21-23을 요약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잘못이라는 것을 청중들에게 공개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한 그 말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로서 맹세를 한다. 그들은 성전, 제단, 하늘, 땅, 또는 그들의 머리와 같은 하나님 이외의 것에 기초한 맹세들은 지키지 않더라도 아무 일이 없다고 점차 생각하였다. 그래서 율법 교사들은 어떤 맹세가 완전히 구속력 있는 맹세인지를 결정하였다(마23:16-22). 그들은 많은 종류의 맹세를 하였다. 예수님은 그런 맹세의 남용을 책망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5) 복수에 대하여(마5:38-42)
예수님께서 38절에서 말씀하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절은 출21:24, 레 24:20, 신19:21에 나온다. 이 구약의 세 구절들은 법정에서 범죄자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근무하는 재판관과 같은 공적인 행정 관리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율법의 주어진 목적과는 달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개인도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법에 따라서 사적으로 복수를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 어떤 사람은 민35:19은 개인적으로 복수를 허용하도록 하는 유일한 율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민35:19의 “만나다”라는 동사의 히브리어는 법정에서 재판이 끝난 후, 사형을 집행하도록 재판관이 범죄인을 넘겨줄 때, 그 범죄인을 넘겨받는 입장에서 “그를 넘겨받거든 (만나거든)”이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이때 그 범인을 넘겨받은 살해당한 자의 친척(피의 보수자)이 먼저 그 범인에게 손을 대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율법은 개인이 사적으로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강력한 인내를 요구하며(39절), 악한 사람을 대할 때 그들에게 큰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 그 관용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요청 받은 것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다(40-42절). 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은 고통 속에서 강인한 인내를 가지고 있으며,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적극적인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다.
(6) 원수에 대하여(마 5:43-48)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마5:43)는 구절에서, 앞부분은 율법에 나오지만(레 19:18) 뒷부분은 율법에 나오지 않는다. “...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43절의 내용의 앞부분은 율법에 나온다 하더라도, 43절 전체는 여전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율법주의의 시각에서 레19:18절을 레위기 19장의 문맥을 통해서만 해석하여 “이웃”을 단지 유대인들로만 이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주실 때, 그는 “이웃”을 유대인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의미하셨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원수”는 이방인이다.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너희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지만, 율법은 그들에게 타국인을 사랑하라고 말하며(레19:34), 그들의 원수에게 공평하게 대하라(출 23:4-5)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율법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신다.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무제한적인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해를 비취시고, 그들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한”에 대한 아람어는 “자비하심(merciful)”(눅6:36)이라는 뉘앙스를 포함하는 “완전한 (complete, whole, perfect)”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는 “성숙한 (mature)”이라는 의미가 있다.
* 마태 6:1-18은 은밀한 가운데 행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한다:
구제(2-4절),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이다. 이 가운데에는 주기도문(9-13절)이 은밀히 행해야 하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의 핵심으로 포함되어 있다.
1. 은밀한 구제: 자기의 의를 나타내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의로운 행위.
2. 은밀한 기도: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도제목으로 삼으라(10절)고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다음에 우리의 이웃들과의 관계 회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빚)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죄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용서는 관계의 회복이며 의를 소유를 의미한다.
3. 은밀한 금식: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원을 아뢰는 행위
* 마태 7:1-5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비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7:1에서 그는 마치 격언과 같은 금지의 명령을 한다: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라. ”여기 쓰인 “비판하다”라는 동사는 건설적인 의미에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비판임을 알 수 있다. 2절에서 “비판하다”라는 동사와 명사가 같이 나오는데 본문의 문맥에 의하면, “비판”이란 단어는 다른 사람, 특히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3-5절)의 잘못된 행동을 사랑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험담하는 “영속적인 인간의 망상”을 언급한다. 비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비와 긍휼이 없는 자기 자신의 의를 표준으로 삼고 형제를 비판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5:44)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없다. 자기가 형제를 비판하고 헤아리는 그것으로서 자기도 똑같이 비판당하고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다. 2절에서 언급한 “비판”은 법정에서 재판관이 내리는 판정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재판관과 같은 행세를 하게 될 때 우리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 마태 7:12은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황금률이라고 부른다. 황금률의 내용은 외경 토빗 4:15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예수님은 이것을 적극적인 의미로 바꾸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이웃을 위해 선한 열매를 맺도록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무엇이든지 너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먼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마7:12절의 “그러므로”는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구약성경)을 추가하면서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결실)는 바로 황금률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마태 5:3-12의 팔복은 “현재 누리고 있는 복”과 “미래에 누릴 복”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복과 마지막 복은 “현재형”이며 중간에 나오는 여섯 개의 복들은 모두 “미래형”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그 때의 제자들과 무리는 이미 첫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을 누리고 있었다. 두 번째 복부터 일곱 번째 복까지는 성취될 미래의 복이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현재형)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미래형)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임이요 (미래형)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미래형)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미래형)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미래형)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미래형)
8.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현재형)
팔복을 듣고 있는 그들은 “이미”(already) 하나님(하늘)나라를 현재형으로 갖고 있다. 첫 번 째 복과 마지막 복의 구절에는 “천국”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언약백성이 된 것이다. 팔복의 말씀을 지켜야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누려야 할 미래의 여섯 가지 복들은 “아직”(not yet) 남아있다.
이렇게 팔복은 하나님(하늘)나라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긴장관계 속에서 함께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팔복은 하나님(하늘)나라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긴장관계 속에서 함께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마태 5:3-12의 팔복은 시간적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관계(relationship)의 측면에서도 구별이 된다. 개인적인 복, 타자를 위한 복,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복의 구분이다. 개인을 위한 복에서 타자에게로, 결국 하나님을 향한 복으로 외연이 넓어지고 그 지평이 확장된다. “팔복’”은 수평에서 수직으로 상승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다시 하나님으로 올라간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복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복의근원이 되신다.
첫째, 개인적인 실존을 위한 복: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나를 향한” 그리고 “나를 위한” 복이다.
둘째, 타자를 위한 복: 팔복 중에서 두 가지 복은 타자를 향한 복이다. 하나는 “타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화평케 하는 자”이다. 즉 긍휼히 여기는 자와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셋째, 하나님을 향한 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은 마태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서는 “의”(righteousness)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마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서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로 규정한다(롬1:16-17; 3:22). 그렇다면 마태는 바울서신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의”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태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는 다른 차원에서 언급하고자 다시 한 번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를 언급 했을 것이다. 마태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인간내면적인 “의”의 개념이 아니라, 극적인 행동을 통하여 박해를 받는 “행위적인 복”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팔복”을 듣고 있던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던 이들 특별히 정치, 종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시인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하늘나라”를 소유한 이들이다. 그 박해는 반드시 “그 나라”에서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마5:11-12). 박해와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할 영광이요 상급의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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