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배불리 먹이시는 메시아의 사역 (마14-15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마15:32)
* 마태복음 14장-17장은 저자 마태가 네 번째로 묶어놓은 이야기들이며 16장에는 “교회설립의 헌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신앙적 기초”가 무엇인지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써 “교회의 설립”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가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그러한 영적 만족을 채워주시는 양상을 이 네 번째의 이야기 묶음 속에서 보여주시고 계신다. 메시야의 권위와 능력으로만 행할 수 있는 일들이다. 어떠한 세속적인 세력과 종교적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계획하신 “천국 건설”은 방해할 자가 없는 것이다. 17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예고되는 가운데에서 교회의 기초가 세워진다는 것과 18장에서는 교회로 부름 받은 백성들의 삶과 훈련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은 말씀하여 주신다.
* 마태복음 14-15장은 네 번째 이야기 묶음 중에서의 첫 부분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세례요한이 살해됨(14:1-12)
2. 예수님의 놀라우신 기적의 사역(14:13-36)
가.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14:13-21)
나. 물 위로 걸으신 예수님(14:22-27)
다. 물 위로 걸어본 베드로(14:28-33)
라. 많은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14:34-36)
3. 정결예식에 관한 문제와 해법(15:1-20)
4. 이방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님(15:21-39)
* 마태14:1-12에서: 세례요한을 살해한 헤롯 왕(cf. 막6:14-29; 눅9:7-9)과 복음의 진전
1.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이 나가서 각 촌에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는 모은 일을(눅9:6) 들은 그 당시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는 몹시 당황해 하면서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이 살아나서 이런 복음전도의 능력을 나타낸다고 믿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우리들은 이 기록을 여기의 본문에서 찾아보게 된다.
2. 헤롯 안디바는 자기 아버지 헤롯 대왕 못지않게 잔악하고 이기적이며 정욕과 사치에 젖어 살던 분봉왕(=유대 땅의 1/4을 다스림)이었다. 그는 자기 이복동생 빌립1세의 부인과 결혼한 범죄로 인하여 세례요한의 꾸중을 받았다(레20:21는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다).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범죄행위를 하면 그 악영향은 막대하다. 따라서 정치나 종교계의 지도자들의 이러한 타락상을 선지자들은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세례요한은 서슴치 않고 헤롯 안디바 왕에게 회개할 것을 공식적으로 지적하였다. 정치배후의 실권을 가졌던 왕의 아내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체포하고 투옥하였다.
3.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는 자기 딸을 시켜 절묘한 춤으로 헤롯을 유혹하여 결국은 세례요한의 목을 베고야 말았다. 헤롯은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를 처형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복음사역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처단해야 할 것을 결심한다.
4.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의 보고를 접하고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라”(눅13:32)고 말씀하신다. “여우”란 여성 명사다. 헤롯과 헤로디아를 향하여 하나님의 일은 방해할 수 없고 주님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신다(눅13:31-35).
눅13: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 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 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 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5.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쓰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을 당하실 때 대면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때 예수님은 한 마디의 말씀도 하여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귀한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 후 헤롯 안디바는 아랍 군대의 공격을 받고 카리귤라 황제에 의하여 불란서, 스페인 등으로 추방되었다가 거기에 죽고 말았다.
6. 세례요한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셨으며 헤롯의 눈에 들어나는 일을 피하면서 제자훈련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셨다. 한편 세례요한의 죽음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기대되었던 일로 받아졌고 그들은 헤롯이 예수님도 처형하여 주기를 요구하며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도 완악한 마음들과 배척의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별도로 천국건설의 설계를 진행하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천국의 중간지점으로 볼 수 있는 “교회”(부름 받은 성도,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의 기초를 다짐하는 일이였다.
* 마태14:13-21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cf. 막6:30-44; 눅9:10-17; 요6:1-5)
1.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일은 사복음서에서 다 읽을 수 있는 큰 기적의 사건이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이라고 요한복음에서 언급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기적”(miracle)을 “표적”(sign)이란 용어로 표현하였다. 예수님의 기적은 표적이 되어서 무엇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요한복음 저술의 목적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signs)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 예수님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과 함께 잠간 쉬기 위하여 한적한 빈들에 나오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은 빈들에까지도 걸어서 찾아와 예수님을 뵙고자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말씀을 가르치셨고 저녁때가 되자 이제는 먹을 것을 주려고까지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방황하는 모습으로 보시고(마9:36) 매우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런데 장정만 세어도 오천 명(도합 2만명)이나 되는 군중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3. 제자들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자”고 제안하였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보낼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14:16)고 명령하셨다. 제자 빌립은 저들을 먹일 비용으로 200데나리온(한 데나리온=하루 품삯)이 필요하다고 계산하면서(요6:7) 불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4.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사간과 장소와 환경의 여건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이는 사역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생명의 말씀을 공급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을 깨닫게 하여준다. 어떤 좌절과 실의에 빠지기 전에 우리들은 먼저 믿음을 가지고 “친히 어떻게 하여야 하실 것을 미리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실천해야 한다.
5.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五餠二魚)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발생한 사실 속에는 여러 가지로 기억되는 일들이 있다. 먼저 오병이어를 선뜻 내어 놓은 귀여운 어린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반찬용으로 첨가된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아이가 먹을 한 끼의 점심식사였다. 어린아이는 자기의 것을 쉽사리 남에게 주지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소유욕이 강하다. 자기의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자기의 음식을 내어놓았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정성으로 바친 적고 작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크고 귀한 일을 하신다.
6.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손에서 축복의 음식이 되었다. 제자 안드레는 어린아이의 점심을 예수님께 드리면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요6:9)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었다”(마13:19)고 하였다. 사랑과 축복이 담긴 예물은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 과부의 정성어린 동전은 부자의 교만한 지폐보다 더 귀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룬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7. 오병이어는 나누어질 때에 수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50명, 100명, 이렇게 떼를 지어 앉게 하시고 축복의 오병이어를 나누어주셨다. 분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마13:20)고 하였다. 모두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온전함에 이르는 역사는 예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속에 “만족과 성취”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하늘의 영적 축복은 육적 배부름의 쾌감과 만족도 공급하였다.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은 12바구니에 담겨져 보관되었다.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2)로 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두어지는 모든 재물은 낭비됨이 없이 유효적절하게 사용되도록 잘 관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과 건강도 잘 관리하여야 부요를 누릴 수 있다.
9.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다. 우리들은 풍요한 영적 양식의 결여로 인하여 배고픔을 겪고 있다. 풍성한 말씀의 잔치를 기대하면서 우리들의 적은 정성을 내어놓으며 예수님의 축복과 하늘의 은총을 사모해야 하겠다. 성경말씀 한 구절을 귀하게 여기며 한 순간이라도 더 주님과 교통하려는 기도의 양을 채워 영의 만족을 기다려야 한다.
* 마태14:22-33에서: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cf. 막6:45-52; 요6:16-21)
1.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이 거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와 풍랑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삶의 만족을 체험케 하여주신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기다리던 메시아로 알고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요6:15). 예수님의 영적 축복의 귀중함 보다 육적 만족에 사로잡힌 백성들의 모습이 여기에서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배우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기들의 스승을 왕으로 세우려는 선동에 가담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아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려 산으로 떠나가면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떠나서 배를 티고 건너편 마을로 가게 하였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흩으시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2. 제자들을 따로 내어보낸 것은 저들이 풍랑 속에서 훈련되어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풍랑 속에서 어려운 시련을 겪은 일이 있었다(마8:23-27). 제자들이 다시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하는 필요성을 채워주시는 것이었다.
3. 예수님은 제자들만 보내었으나 오히려 따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천국보좌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사실과 같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 육지에서 10리 정도 되는 바다 가운데서 거센 바람과 물결 가운데에서 밤새 씨름을 하며 고난에 처하여 있었다. 예수님은 새벽이 되기 전 깊은 밤중 4경(3시-6시)이 되어서야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구약에서 선지자 요나는 풍랑의 시련을 통하여 잘못된 신앙의 교정을 받았던 것을 보면 풍랑의 시련을 우리들은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교정이라는 두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시련이던 관계없이 그 가운데에는 주님이 늘 함께 계시므로 성도들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4.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성도들을 지체로 삼고 나가는 참된 교회는 함께 하시는 은혜 속에서 영적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으며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함을 얼마든지 간증할 수 있게 하여 주신다.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나갈 때에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순탄한 항해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한다”(요16:33)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가르쳐주셨다.
5.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아무리 거친 바람과 물결이라도 다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셨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주님의 귀는 그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므로”(시34:15, 17) 우리들은 이러한 고난을 두려워할 것 없다.
* 마태14:22-34에서: 바다 위를 걸어본 베드로 (cf. 막6:45-52; 요6:16-21)
1. 예수님은 풍랑을 헤치고 물위로 걸어오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난 기쁨을 참지 못하여 자기도 거친 바다 위를 거닐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기적을 체험하였다. 제자들은 거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며 무서워하였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은 안정을 잃고 있었다.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여주셨다. 심한 바람소리와 물결소리 가운데에서도 부드러운 주 예수님의 음성은 분명하게 들려졌고 주님의 음성과 더불어 제자들은 안정을 다시 찾는 축복을 누렸다.
2. 베드로는 주님을 다시 만난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 하며 믿음의 요청을 하였다. “오라!” 예수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서 풍랑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예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었다.
3.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제자였다. 예수님이 풍랑 위에 계시니 자기도 그러기를 바랐고, 예수님이 변화산의 영광 가운데 계시니 자가도 그 영광 가운데 함께 있기를 바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 자기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바랐다. 어떻게 하던지 예수님을 닮아보려는 베드로의 믿음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게 하여주셨다.
4. 그러나 베드로는 의심과 더불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의심”이란 “두 갈래 길에서 불안하게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만 보고 나갔을 때에는 물위에 있었으나 풍랑을 다시 보게 될 때에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믿음을 중단하고 의심할 때에는 더 이상 물위를 걸어갈 수 없었다. 또 믿음을 중단하였던 그는 예수님을 떠나고 배반하게도 되었다. 그러나 언제라도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늘 찾아주셨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14:31) 소리 높여 외쳤을 때 예수님은 즉시 베드로를 잡아주시고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 모든 풍랑은 그치고 잔잔하여졌다.
5.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아지기를 노력하였으나 연약한 자신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박혀 죽겠다고 자원하여 순교 당하였다. 우리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자(히12:2).
* 마태15:1-6에서: 장로들의 유전(전통)과 하나님의 계명 (cf. 막7:1-13)
1.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15:3)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도 않고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도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에 주신 말씀이다.
2.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의 율법이 있다. 하나는 모세가 손으로 전하여 준 “기록된 율법”(the written law)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가 장로들에게 입으로 전하여 준 “구전의 율법”(the oral law)이다. 장로들이 가르친 규례와 법칙은 서기관이나 랍비들에 의하여 전통적인 종교의식으로 가르쳐졌다. 이러한 전통은 마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계명과 같이 여기고 지켰다. 그러므로 전통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도 마치 10계명을 범한 것과 같이 취급하였다.
3. 식사하기 전에 물로 손을 씻는다는 것은 위생적으로 손을 깨끗하게 하려는 실질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게 접촉되었을지도 모르는 손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종교적 의식과 형식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출혈, 월경, 산후의 여인을 깨끗하지 않다고 하였고, 죽은 시체를 불결하다고 하였고, 또 이방인을 더럽다고 하였다. 발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동물은 먹되 피와 내장의 기름기를 제거한 코셔(Kosher) 고기만 먹을 수 있으므로 되지나 토끼의 고기는 제외되었고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먹지 못하였으므로 장어, 가재, 조개 등은 제외되었고 메뚜기를 제외한 벌래들은 먹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또 장로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쉽타”(shibta)라고 불리우는 마귀가 사람들의 손에 앉아 있으므로 만일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때 그 마귀가 몸속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따라서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 도전하여 왔던 것이다.
4.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씻지 아니하는 손에 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으시고 “고르반의 규례”를 예로 들면서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셨다. “고르반”(Korban)이란 말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가가 가진 재물이 “고르반”으로 바쳐졌다고 선포되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키는 것 같이 보였는데, 실제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들은 전통과 유전을 지키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거리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능력을 잃었고 하나님의 참다운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
5. 믿음이 바로 들어가기 전에는 인간의 제도를 하나님의 가르침 보다 앞세우게 된다. 사도바울도 바른 신앙을 발견하기 전에는 “자기 동족을 위하여 연갑자 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자기 조상의 유전(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다”(갈1:14)고 고백하였다. 우리들도 교회가 세운 규칙과 제도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교회의 법은 지키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때가 얼마든지 있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 마태15:7-11에서: 사람의 가르침을 경계하라 (cf. 막7:5-9)
1.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셨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9; 사29:13)라고 탄식하였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도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what) 말씀하여 주셨으며, 왜(why) 그 말씀을 주셨으며, 어떻게(how) 그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가를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그 말씀을 형식적으로 지키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우리들은 입술이나 손과 발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쳐야 한다.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롬10:9-10), 먼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고(마22:37), 먼저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며(골3:16),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엡6:6; 롬6:17), 먼저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즐겁게 바칠 수 있어야(고후9:7) 한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시51:10) 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마음의 변화는 이러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말씀을 실천하며 적용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에 의한(by), 하나님을 위한(for), 하나님의(of) 믿음을 받고 사는 것이다. “믿습니다”라는 말을 계속하면서도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소원과 자기가 받을 축복을 기대하고 믿고 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계획을 모르기도 하며 생각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현실과 직결되고 근시안적인 자기중심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며 복음의 진행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에게 사람의 죄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8)고 가르쳐주셨다. 이렇게 “입에서 나오는 것”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동일시 하셨고 더욱 구체적으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15:19)이라고 일러주셨다. 마가복음에는 항목을 더 추가되어 기록되어 있다. 즉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막7:21-22)이다. 예수님은 종교체제의 위선과 범죄를 지적하시면서 참다운 신앙을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중에서 찾아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부름 받은 ”교회“(성도)는 바른 믿음을 나타내어야 하는 과제를 그들 속에 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마태15:21-28에서: 이방(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만족을 주신 예수님 (cf. 막7:24-30)
1.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셔서 수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의 믿음을 따라서 그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가시게 된 것은 수많은 유대백성들이 따르는 것을 피하고 또 종교인들의 간섭에서 해방되어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이방 계열에 속한 이 여인은 어떻게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다.
2.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여인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였다. 본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차별하고 무시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유대인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마15:22).
3. 예수님은 이미 이 여인의 어려움을 아셨고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구원의 복음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임을 잘 아신다. 그러나 복음의 기초와 발전은 제자들을 통하여 순서를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를 이루셔야만 하셨다. 따라서 모든 제자들이 듣는 중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노라”(마15:24)고 하셨다.
4. 여인은 더욱 매어달리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며 엎드려 절을 한다. “자녀들을 먼저 배부르게 먹여야 할 터인데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아니하다”(막7:27)고 하신다. “개들”이란 유대인들이 흔이 사용하던 “더러운 들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집안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바둑이’”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사용하신 용어는 이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5. 그 여인은 예수님의 표현에서 더욱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접근하게 되었다. “주여, 옳습니다마는 상 아래에 있는 ”바둑이“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막7:28). 이때 예수님은 곧 여인에게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주셨다. “여자야, 네가 그렇게 대답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7>29),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하시며 축복을 선언하여 주셨다.
6. 이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흉내를 내며 메시야를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객관적 관계 보다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일원”으로 그 여인을 받아주셨다. 이방인을 가족으로 가슴에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도 로마 군인 백부장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 볼 수 없었던 믿음의 소유자”(눅7:9)로 높이 평가하여 주셨고, 이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여 주셨다. 백부장의 종이나 이 여인의 딸은 직접 예수님을 만나지도 않았으나 그들의 병이 나았고 귀신도 물러갔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로움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이렇게 어느 누구에게나 열어놓으신 것이다.
* 마태15:32-39에서: 사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cf. 막8:1-10)
1. 예수님은 떡 일곱 개와 생선 몇 마리를 가지고 이방인 사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셨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별개의 사건들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갈릴리 지방의 벳세다 광야에서 봄철에 행하여졌다. 이때의 군중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였으며 예수님과 하루 종일 함께 있다가 저녁때에 기적적으로 배부름의 체험을 하였고 12바구니에 차는 조각들을 거두었다. 이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2. 그러나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데가볼리라는 이방지역의 광야에서 여름철에 행하여졌다. 이때의 군중들은 주로 이방인들이였으며 그들은 예수님과 사흘 동안이나 함께 있다가 떡 일곱 개와 생선 몇 마리를 가지고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기적적인 음식 초대를 받고 배불리 먹었으며 일곱 광주리에 차는 조각들을 거두었다. 이때 이방인들은 조용히 받아먹기만 하였고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소동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3. 이방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기적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 예수님은 단순하게 그 무리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려는 목적으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고 말씀하여 주셨다.
4.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떡과 생선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그것을 공급하여 주었다. 이방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은 일곱 광주리에 채웠다는 것은 열두 바구니의 양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광주리”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피신할 때 성곽에서 티고 내려올 정도의 큰 광주리이며 열두 바구니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바구니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더욱 넘치고도 남을 만한 양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셨던 것이다.
5. 예수님의 복음은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주셨으나 유대인을 통하여 이제는 그 복음이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베풀어졌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1:16). 사랑과 자비로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신앙세계가 확립되어 가는 것을 우리들은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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