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하나님의 계시로 종말을 예고함 (마24-25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24:42)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4:44)
* 마태복음의 다섯 번째 항목(Section Five)인 19-25장은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올바른 판단(The Judgement)의 표준이 하나님의 계시(말씀, 기도)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 중에서 오늘의 본문 24-25장은 세 번째 부분이면서 마태복음의 다섯 설교 중에서 마지막 설교다.
첫째 부분 (19-20장): 아버지의 계시를 표준으로 삼으신 예수님
둘째 부분 (21-23장): 아버지의 계시로 환난을 이기신 예수님
셋째 부분 (24-25장): 아버지의 계시로 종말을 예고하신 예수님
* 마태복음 24-25장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의 말씀이다.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감람산에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성전을 나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장차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2)고 예언하셨다. 제자들은 산에 오르자마자 예수님의 예언에 대하여 첫째,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둘째,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는지의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여기에 해답을 주신 말씀이 바로 “감람산 설교”다. 이제 마태24-25장의 간추린 내용을 적어보자.
1.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24:1-2)
2. 다가오는 환난 (24:3-14)
가. 거짓 교사들 (24:3-8)
나. 환난의 시기 (24:9-14)
3. 마지막에 관한 징조들 (24:15-28)
4. 인자의 다시 오심 (24:29-44)
가. 인자의 오실 징조 (24:29-31)
나. 무화과나무의 교훈 (24:32-35)
다.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 (24:36-44)
5. 비유의 이야기들 (24:45-25:30)
가. 집주인과 종의 비유 (24:45-51)
나.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25:1-12)
다. 달란트의 비유 (25:13-30)
6. 심판 (25:31-46)
* 여기에서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예수님은 이 설교의 말씀을 하시면서 종말 자체에 관한 예언을 하신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해석하지 말자는 것이다. 24-25장의 설교 내용은 “심판 극복의 경고와 안내”라는 제목 아래에서 음미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24-25장의 요절을 찾으려면 24장 42절과 44절의 핵심을 마음에 심어야 한다. 이 요절들을 표어로 적어보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러므로 준비하고 있으라!” “주의하라!” “삼가라!” “기도하라!” 등이다.
* 또 감람산 설교(마24-25장)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그 내용과 교훈을 배워야 한다.
첫째, 이 설교의 내용은 유대인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 제자들의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 및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예수님의 재림과 왕국건설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대답도 유대 땅이라든지(6), 안식일이라든지(20),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등과 관련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 관한 예언은 오직 누가복음 21:20-24에만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마지막 때의 징조와 예수님의 재림,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대환난 등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대환난 기간을 “야곱의 환난의 때”(렘30:7)라고 하였고, 스바냐는 “여호와의 큰 날”(습1:14)이라고 하면서 환난, 고통, 황무, 패괴, 캄캄함, 어두움, 구름, 흑암 등이 임하는 날로 표현하였고,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는 분노와 형벌의 때”(사26:20-21)라고 하였다. 다니엘 선지자는 더 분명한 이해의 열쇄를 제공하면서 “7년 대환난 기간”(단9:24-27)을 예언하였다.
둘째, 이 설교의 내용은 우리들이 속하고 있는 교회의 들림에 관한 예언(살전4:13-18; 고전15:5)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도 아직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엡3:4)로 감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를 위한 재림의 때는 직접 언급하지 않으셨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나(고전1:22) 교회는 하늘로서 내려오시는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만을 기다린다(빌3:20). 교회가 들림을 받기위하여서는 어떤 징조나 표적이 요구되지 않으며 언제라도 주님께서 홀연히 순식간에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대환난 이전에 교회는 들림을 받으며 대환난 이후에 들림 받았던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재림하게 된다고 말하며(계3:10-11; 19:11-20:6) 또 일부 학자들은 대환난 이후에 교회가 들림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들은 어느 해설이 바르고 신빙성이 있다는 평가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다.
셋째, 이 설교의 내용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고와 안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하였다. 세대의 징조나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볼 때에 유대인이나 교회 성도들은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더욱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도중에 누차 “주의하라! 조심하라! 삼가라! 기도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셨다.
넷째, 이 설교의 내용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난의 초기와 중간기와 후기로 구분되어 있고 마지막 기간에 주 예수님은 지상에 다시 오셔서 모든 원수를 무찌르시고 약속하신 왕국을 이루신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감람산 설교를 읽고 공부하면서 우리들의 세대와 마지막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소망을 안개와 같은 세상에 두지 않고 영원한 주님의 세계에 둘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 마태24:3-14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7년 환난의 초기에 관한 예언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7년 환난의 초기를 “재난의 시작”(8)이라고 표현하시고 그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셨다.
1. 먼저 “재난”이라는 말을 성경원어에서 “해산의 고통”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경말씀에서는 7년 환난을 여인의 잉태와 관련하여 해산의 고통으로 묘사하고 있다(사13:6-8; 렘4:31; 6:24; 13:21; 22:20-23; 살전5:3). 해산의 고통은 잉태의 괴로움이 조금씩 조금씩 더하여지고 계속되다가 아기를 분만할 때에 갑자기 발생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7년 환난이 발생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 여러 가지 일들을 예수님은 일일이 나열하셨다.
2. 그 첫 번째 일들은 거짓 신앙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출현이다. 역사의 기록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거짓 신앙을 가르치는 거짓 스승이나 예언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도 이미 경고하셨고(마7:15-20), 사도바울(행20:28-31)과 사도요한(1요4:1-6)도 경고하였다. 참된 구원을 줄 수 없는 적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이 환영하게 되는 정치적인 이변은 대환난의 시작을 가져오는 징조로 예언되고 있다(단9:27; 요5:43).
3. 예수님은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연이어진다고 하셨다. 세상 끝날 까지 수많은 전쟁은 계속 될 것이다. 따라서 전쟁발생의 소식들은 환난의 때나 주님의 재림시기를 예고할 수는 없으나 환난시대의 고통을 제시하고 있다. 또 처처에서 일어나는 기근과 지진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온다고 하셨다. 전쟁으로 인하여 기근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을 잘못 사용한 결과다. 그런데 지진의 발생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증거임을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다(계6:12; 8:5; 11:13; 16:18). 그러나 모든 재난의 징조를 가지고 마지막 때를 교리적으로 규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4. 다음으로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미움은 기혹한 박해와 실상으로 증가하여지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를 씨로 뿌리고 지금까지 수확을 거두어 왔다. 유대교와 이방종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가족과 친구의 명분도 초월하고 박해와 고난을 가하는 사례가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들은 선교사들의 보고에서 듣고 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은 날이 갈수록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은 외면을 당하는 세대의 출현을 알려주고 있다.
5. 이러한 모든 일들은 갑자기 임하는 고통의 증상들이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을 두 가지 요점으로 강조하셨다.
첫째,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4). 어떤 꾀임이나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른 신앙을 지키는 중요한 요건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둘째,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6). 하나님께서는 낳으신 백성, 거듭난 자녀들을 결코 내어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나 수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받는 모든 고난은 결국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배려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자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요10:27)고 말씀하셨다.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충성스러운 믿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 마태24:15-22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7년 환난의 중간기에 관한 예언이다. 이 환난의 예언은 교회에 속한 이방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는 세계정세를 볼 수 있게 하여주며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
1. 예수님은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되는 때”(15)를 지적하셨다. “가증한 것”(the abomination=증오, 싫은 것)이란 “우상”을 의미한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스러운 우상이 세워지고 예배를 강요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을 예수님은 재확인하여 주셨다.
2. 다니엘서 9:24-27을 보면 “칠십 이레”(=70x7)라는 “490년”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파괴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꿈과 기대로 늘 채워져 있었다. 거룩한 성전이 없이는 대망의 메시야를 맞아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44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었다. “일곱 이레”(=7x7)의 49년의 기간에 성전이 재건된 이후 “육십 이 이레”(=62x7)의 434년이 지난 때에(=49+434=483)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이때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의 예언은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못하고 거짓 메시야(=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하는 또 다른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 기간이 바로 남아있는 “한 이레”(=7년)에 해당한다.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7년 환난”(=한 이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3. 다니엘 9:26에서 언급한 “한 왕”이란 곧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계시록 13-14장에서 짐승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화를 약속하여 주고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도록 허락하며 유대종교 특유의 희생제물과 예배의식을 보장하여 준다. 적그리스도는 유럽의 연합체의 국가를 다스리는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잠간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다니엘 9:27에서 이 7년 기간 중의 “후 삼년 반”에 적그리스도는 결국 “가증한 것”(the abomination)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운다고 하였다.
4. “가증한 것이 세워지기까지”의 세계정세는 에스겔 38-39장에서 보충하여 예언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알고 그를 영접한 이후에 이스라엘 국가는 소련의 침공을 받는 일이 생기게 된다. 소련의 침공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진멸되고야 만다. 소련이 퇴각하는 때를 절호의 기회로 삼고 적그리스도는 이때에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이전의 약속을 파기하고 자기가 성전을 장악하고 자기를 섬기고 예배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7년 중의 “후 3년 반”의 때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the abomination of desolation)이 거룩한 곳에 세워지는 때”이다.
5.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가하게 된다. 이때에 일어날 고난과 박해는 너무나도 심하기 때문에 “큰 환난”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21)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누가복음 21:20-24에서 주후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파괴될 때의 참상과 비슷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분명하게 다른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6. 7년 환난이 시작되기까지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같은 자연적인 심판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7년 환난의 기간 중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심판이 예고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배울 때마다 우리들도 안일한 현실생활에서 신앙적 각성을 하여야 할 것이며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마태24:23-31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7년 환난의 후기에 관한 예언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7년 환난을 당한 후에 재림하시는 인자 예수님을 마지하게 되는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였으나 그 중에는 택함을 받은 자들(24:22, 24,31)이 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관심이 매우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잘못 판단하여 거짓 그리스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여 주신 내용임을 곧 알 수 있다.
1. 유대인들은 기사와 이적을 따르는 경향이 있으므로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는 그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일것이라고 하셨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을 일삼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잘 걸려 넘어진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참된 표적은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으나 거짓 표적은 믿고 영접함으로써 적그리스도에게 휘말려 잡히고야 만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메시야를 만나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다든지 골방에 찾아간다든지 하는 괴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2. 예수님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임하리라”(27)고 하시면서 임하시기 바로 직전에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는 일”(28)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이것은 곧 계시록 16장과 19장에서 예언하고 있는바 장차 이방나라들이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벌리고 대학살을 몰고 올 대사건을 의미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우주와 천체에 큰 이변이 생겨날 것도 예언하셨다.
3. 그때에 예수님은 구름을 타시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시며 그때에는 모든 족속들이 재림하신 예수님을 일시에 보게 될 것이라고 허셨다. 데살로니가 전서 4:17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공중 재림”은 여기에서 언급한 지상 재림과는 다르다. 공중 재림은 교회의 성도들을 불러드리는 사사로운 사건이며 지상 재림은 7년 환난 이후에 교회와 관련 없는 구원과 심판을 만국 백성에게 베푸실 공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31절 말씀에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라”고 하신 내용은 지상 재림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중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며, 데살로니가 전서 4:16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라”고 한 내용은 공중 재림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나팔소리는 구약시대로부터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소리로 들려졌다(레23:23-25; 민10장; 욜2:1).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나라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막론하고 나팔소리는 “모아드림과 진행”을 의미하며 그 소리의 형태는 때를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7년 환난에 관한 구체적인 시기와 내용에 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주장으로 엇걸려 있으나 공통적인 가르침은 알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언제인지는 모르나 반드시 들림을 받는다는 사실(살전4:13-18; 고전15:51-58), 유럽의 연합체 국가의 지도자는 이스라엘과 7년간의 동맹을 체결하나든 것(단9:26-27), 동맹 체결 후 3년 반 이후에 적그리스도는 동맹을 깨뜨리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 내에 자기의 형상을 세운다는 것(살후2:3-4; 계13장), 적그리스도는 온 세계인이 자기에게 복종하고 예배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슥12장; 계13:13-14; 19:11), 예수님은 지상 재림 하셔서 적그리스도를 없애고 유대인의 영접을 받고 왕국을 건설하신다는 것(계19:11; 슥12:7-13:1), 예수님은 지상에서 천년 동안 다스리신다는 것(계20:1-5) 등이다. 따라서 이러한 예언에 관한 내용들은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우리들에게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믿음을 잘 간직하도록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마태24:32-51은 매우 가까이 온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과 관련된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무화과나무의 비유, 둘째, 노아의 때에 관한 비유, 셋째, 도적이 들어 닥치는 비유다.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언제 어느 때에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르지만(36)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35)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 첫째,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의 움직임과 예수님의 재림이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2-33)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이 움직이는 모든 일을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이미 재림의 시기는 매우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는 지금 세대는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인 것을 알 수 있다.
2. 둘째,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은 시대적인 특성을 보여줄 때에 임하게 된다. 그 시대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기까지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39)는 것이 특징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사실은 장차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공할 7년 환난의 기간 중에도 가적적인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한편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의 승천은 교회가 반드시 들림을 받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창5:21-24; 히11;5; 살전5:1-10).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생활을 즐겼다는 예화를 드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활을 즐기는 사실을 비난하신 것이 아니며 그들이 그 일에만 몰두하여 있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말씀하셨다. 생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구원을 즐기라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버려두고 덜 좋은 것만을 탐닉하다가 멸망을 받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그 얻은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것과 같다. 그 때에 밭을 가는 두 사람 중에서 또 매를 가는 두 여자 중에서 더 좋은 구원을 예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나 여인은 예수님이 세우시는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구원과 멸망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교회의 들림과 관련하여 설명하신 것이 아니다.
3. 셋째, 예수님의 재림은 도적이 들어오는 사례와 비교된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도적을 당한다. 그러므로 도적을 당하지 않으려면 도난방지를 위하여 생각을 많이 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앞의 비유에서는 “그 날과 그 때”를 언급하셨으나 도적의 비유에서는 “그 경점”(=밤 시간)을 언급할 정도로 급박한 상항을 말씀하셨다. 택함을 받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견딜 수 없는 환난의 기간도 단축하시며(22) 도적같이 신속히 임하여 구원을 베푸신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4.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에 유의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5, 46)라고 하셨다. 우리들에게 맡겨진 재능과 소유물로 때를 따라 나누어주는 자가 곧 충성과 지혜의 종이라고 하셨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움직임에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런 깨달음이나 생각도 없이 자기생활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을 때에 택함 받은 성도들은 더욱 충성과 지혜의 생활을 하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마태25:1-13에서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성도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마지 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교훈을 주셨다.
1. 열 처녀란 신부의 친구들이다. 열 처녀는 신부와 함께 있다가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를 데리러 오면 등불을 밝히고 신부의 가는 길을 밝혀주면서 결혼예식이 거행될 신랑의 집까지 동행하여야 하였다. 이때 사용하는 등불은 가정용 등불이 아니다. 가정용 등불은 집밖에서는 잔잔한 바람에도 곧 꺼지기가 일수였다. 따라서 열 처녀는 등불이 아니라 횃불을 각자가 준비하여야 하였다. 횃불은 막대기 끝에 헝겊을 둘둘 말고 거기에 기름을 푹 적신 후에 불을 키도록 되어있는 도구다. 한 번 기름을 발라주면 15분 정도만 불을 밝힐 수 있었다. 따라서 충분한 양의 기름을 병에 담아가지고 횃불과 함께 가지고 가야만 하였다. 열 처녀가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은 바로 횃불과 기름을 준비해 놓는 일이었다.
2. 열 처녀 중에서 다섯 처녀들은 횃불은 준비하였으나 기름을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하였으므로 “미련한 자들”이라고 불려졌다.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도 않고 또 할 수도 없게 된 자들이 곧 “미련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횃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에게 다급한 요청을 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횃불을 밝힐 기름만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그 기름을 나누어줄 수 없었다. 결국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은 신부와 신부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함께 신랑의 집에 간 후 대문을 닫아버리고 결혼예식과 잔치를 진행하였다. 뒤늦게 횃불을 밝히고 좇아 온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들과 결혼잔치와는 더 이상 관련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3. 예수님은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 하느니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5:22-23). 미련한 다섯 처녀는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여 횃불을 밝히고 신랑의 집까지 왔으나 저기들을 위하여 횃불을 밝히고 급하게 뒤좇아 온 것이지 결코 신부와 신랑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요한 순간에 하여야 할 중요한 일(사명)을 못 하였으므로 낙오자가 되었고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4. 예수님은 결론의 말씀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 하느니라”(13)고 하셨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잠자지 말라” 라든가 “졸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에서 열 처녀들은 “다 졸며 자고 있었다”(5)고 하였다. 깨어있었던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깨어있으라”는 말은 “자기의 할 일을 늘 깨닫고 실천하라”는 뜻이며 각성을 촉구하는 교훈이다. 결정적인 그 시간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기름을 준비해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5. “기름”은 “성령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세상에 살면서 하여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매우 바쁘더라도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수행하여야 한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 마태25:14-30에서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성도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지니며 또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라는 교훈을 주셨다.
1. 한 달란트라는 화폐의 가치는 한 사람의 품삯으로 20년 동안이나 지불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액수다. 도합 여덟 달란트가 세 명의 종들에게 5, 2, 1달란트씩 지불된 것은 사업을 위한 투자 자금이었다. 종들이 가진 사업운영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사업을 하도록 주인이 성공의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주인은 큰 자산을 종들에게 맡겨줄 정도로 종들을 신뢰한 관대하고도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2.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기들을 믿고 인정하여 기업경영주로 만들어준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여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였다. 오직 충성심으로 주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노력하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초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데 있다.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생산력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각각 갑절의 자산증식의 결과를 가져왔다.
3.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 하였다. 주인은 자기를 이용하여 자산증식에 몰두하고 있는 완고한 사업가로 알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사람”(24, 26)이므로 상종할 수도 없는 두려운 존재로 낙인을 찍었다. 그가 주인의 참다운 의도를 의심하게 될 때에 사업추진에 대한 의욕과 용기를 상실하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 중에는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 둘 곳은 땅 밑이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종은 주인은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믿고 그대로 돈을 땅에 묻어버렸다. 은행에 입금할 생각도 못하였다. 주인도 의심하고 은행도 불신할 정도의 타락한 인간관계를 가진 자에게서 건전한 창조적 생산요소란 기대할 수 없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책망과 저주, 가난과 슬픔, 후화와 절망 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없는 자였다.
4. 신앙인의 특성은 곧 아름다운 인간관계 및 신의와 신용을 지키는데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재능과 의지와 욕구와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이미 받은 달란트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충성스럽게 활용하는 성도가 되어야 참다운 사명자인 것이다.
* 마태25:31-46에서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에 베푸실 심판을 양과 염소를 각각 분별하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정성의 차이로 상벌이 주어지는 교훈을 주셨다.
1. 이 비유에서 구원은 선행의 결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과 같이 설명되고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비유는 감람산상의 설교 중에서 마지막 말씀이다. 이 설교는 7년 환난을 당하는 유대인과 또 그들과 관계된 세계정세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써 “내 형제”(40)란 곧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이들은 7년 환난 동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 못하므로 무엇을 사고 팔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생존의 위협을 겪으면서 이방인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만 겨우 살 수 있게 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뿌리채 뽑아내어 진멸하려는 적그리스도의 살기와 위협이 팽팽할 때에 유대인을 도와준다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믿음과 희생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그때에 이와 같이 아무런 보수를 기대하지 않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유대인 성도들을 돌보아준 이방인들을 구원받은 “양”으로 따로 분별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구원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의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여기에서 성도는 성도들 끼리 서로 사랑하고 돌봄으로써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가족관계임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을 위하여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혈 벗고 병들며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는 분들을 따뜻하게 돌보아줄 자는 같은 형제자매 외에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체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양들은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 받으며 따라서 성도들의 사랑은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염소란 저주받은 자들이며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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