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메시아의 사역과 하나님의 뜻 (마19-20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
* 마태복음에서 19-25장은 다섯 번째(Section Five)의 항목이며 신앙생활의 기본과 표준에 대한 자세를 다루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올바른 판단(The Judgement)의 표준을 세우려고 할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계시(말씀, 기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증을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아들(=어린아이)은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본보기가 된다. 이 항목(Section Five)에서 19-23장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내용이며 24-25장은 판단과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종말에 관한 설교말씀이다. 마태19-20장에서는 생활에 직결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며 마태21-23장에서는 계명의 준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 마태복음 19-20장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1. 19: 1- 2 유대 지방에 들어가신 예수님
2. 19: 3-12 결혼, 이혼, 독신생활에 관한 교훈
3. 19:13-15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심
4. 19:16-30 부자들과 그들의 소유
5. 20: 1-16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의 비유
6. 20:17-19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예고
7. 20:20-28 위대함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8. 20:29-34 두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 마태19:3에서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NIV. "Is it lawful for a man to divorce his wife for any and every reason?" KJV. "Is it lawful for a man to put away his wife for every cause?") 4-6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모세)의 가르침이나 랍비(학자)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의 기록을 가지고 설명하여 주셨다.
1. 예수님은 여기의 기록(19:4-6)에서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져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결혼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은 한 몸을 이루어서 완성의 표본과 구원의 도리가 확립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2:18-25이 제시하여주는 결혼의 원칙을 강조하여 주셨다.
가. 먼저 하나님은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가 남자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았고 “돕는 배필”(=여자)까지 지어져야 완성된다는 뜻이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어야 모든 창조의 원리가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돕는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뜻이 아니며 “하나님이 사람을 돕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부가 서로 도울 수 있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에서 나온다. 성경말씀에서 “도움”이라는 단어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이다.
출18:4.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모세의 다른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이다)
신33: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시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다. “배필”이라는 말은 “상대편, 상대역”이라는 뜻이다. 남자가 주역이면 여자는 상대역이며, 여자가 주역이면 남자는 상대역이 되어 반드시 “두 역”을 합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남녀를 서로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
라.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였다. “갈빗대”라는 말은 “옆”(side)이라는 단어다. 하나님은 “아담의 옆(side)에서 (측면을 가지고) 여자를 만드셨다.” 남자의 측면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는 뜻이다.
마. 그런데 아담은 여자(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하였다. 여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아담은 발견하였다. 이것은 신비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하나님의 특수섭리를 의미한다.
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이 찔려진 모습과 비교된다(요19:34-36). 이때 흘리신 물과 피는 교회를 탄생하는 생명의 능력이 되었다.
사. 엡5:30-32에서 성도는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하면서, 남자가 아내와 합하여 한 몸 된 육체를 이루는 비밀은 바로 예수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같다고 하였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은 교회와 가정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받게 하여주신 것이다.
2. 예수님은 창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을 인용하시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가르쳐주셨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결혼이 성립된다. 결혼하면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부모의 다스림과 보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결혼 후에도 부모를 의지하고 부모의 도움을 바라게 되면 독립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에게 종속된 노예가정이 되고 노예생활에서 오는 갈등과 고통을 겪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처음부터 모든 생물이 핵가정 제도 하에서 성장 발전하도록 하여주셨다. 독립된 가정을 이룰 줄 알아야 하고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서 내보내야 한다. 실제적으로는 부모의 집과 자녀의 집은 같은(하나의) 지붕 아래에서 동거하면 독립된 가정이 아니다. 한 지붕 아래의 가족은 한 사람에게 속하여야만 한다. 아버지와 결혼한 아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면 지도체제가 무너진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지 않겠다(“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자기 집 지붕 아래에, 즉 자기의 권한 아래에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신앙체계가 바로 정립된 것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나. 남자가 아내에게 연합하여야 결혼이 성립된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주신 여자를 감사히 받고 그 여자에게 들어가서 자기를 연합시킬 줄 알아야 한다. “연합하다”는 성경원어는 “섞는다, 혼합하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음식물을 함께 넣어서 갈면 본래의 모양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부부는 그들의 몸과 마음, 시간과 재산, 재능과 교육 등의 모든 것을 다 섞어서 혼연일체를 이루어진 참다운 연합체다. 따라서 한 번 연합하면 각자의 특성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고 공통성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이 곧 그 가정의 특성을 이룬다. 가정에서 남자나 여자나 자기의 독특성을 잃고 연합체가 되었으므로 성경에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다. 남자가 아내와 한 몸을 이루어야 결혼이 성립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한 몸”이란 “하나의 육체”를 의미한다. 결혼이란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며 영의 세계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모든 활동을 함께 하도록 하여주셨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영혼까지 연합되었다면 영의 세계에 가서도 부부는 함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육체의 죽음을 마지 할 때에 끊어진다. 따라서 가정은 각자가 이 세상에서 신앙을 자라게 하여주는 온실로 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정생활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라. 한 가정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체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으며 결코 두 남자 또는 두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몸을 이루는 한 남편과 한 아내와 더불어 일평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 마19:7에서 바리새인들은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라고 말하면서 이혼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1.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19:3)라는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야 할 것을 강조하시고 창세기 2장의 원리를 가르쳐주셨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었을 때에 그 둘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2:25). 죄를 몰랐던 그들은 부끄러움도 몰랐다. 그러나 죄를 범하는 즉시 수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가정과 교회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제도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부끄러움”(=죄악)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묶어 수치가 없는 가정으로 만드시고 이 순결한 가정을 통하여 메시아 예수님이 탄생하도록 하셨다. 이와 같이 신랑 예수님은 신부 성도와 한 몸을 이루어 수치(=죄악)이 없는 교회를 이루셨다. 특별히 가정이 파괴되면 온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함께 음란의 죄악을 범하지 말도록 경계하셨다. 수치 없는 결혼과 가정을 이루는 것은 성도의 본분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주신 것이다.
2.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을 인용하면서 만일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벌거벗은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는 계명을 들추어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고쳐주셨다. “모세는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 하니라”(8). 결혼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이혼하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허락이다. 명령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따라서 나왔으나 허락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요청하는 바를 따라 나왔으므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일도 허락을 받아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의 범죄가 가정에 밀려들어와서 이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지만, 절대로 이혼을 염두에도 둘 수 없는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더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아내를 내어버리는 이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내어버려진 사람이 구원 받아야 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계셨다. 따라서 모세는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 즉 결혼을 지키라고 가르쳐주셨다.
3. 본래 이혼증서는 아무나 작성할 수 없고 서기관들만이 할 수 있었다. 이혼증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소모되는 기간 중에도 용서와 화해, 인내와 치료의 과정을 통하여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구원과 회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결혼의 회복은 염두에도 없었고 이혼증서를 작성하는 일에 성급하였던 것이다. 양심에 화인을 입어 그 마음이 미련하여지고 어두워진 짐승과 같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버리고 불륜의 가정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의 자식들의 일을 멀리하여야 한다. 성도들은 혹시 넘어져 이혼의 위협을 받을 때에도 다시 일어나고 수치의 상처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지고 새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재결속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 마19:10에서 제자들은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차라리 독신생활을 제안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19:12)라고 대답하시면서 원칙적으로 독신생활은 결혼생활을 회피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1. 결혼생활에서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독신생활이 차라리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이기심에서 나왔다. 독신생활은 결혼생활보다 골치 아픈 문제가 적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창조의 원리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원칙이다. 성도라면 사랑과 이해, 희생과 노력으로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극히 예외적인 일로써 세례요한이나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독신생활을 하도록 하여주셨다.
2. 선천적으로 성적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이나 어떤 사회적인 제도와 규정에 의하여 성적 불구의 몸을 입은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eunuch)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성적기능을 다 할 수 있으나 천국건설과 복음사역을 위하여 박해와 고난 등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성도들이 따로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혼생활보다는 독신생활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나타낼 수 있다.
3.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독신생활에 관한 귀중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가. 독신생활은 누구의 권고를 따라 되는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독신생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개인의 믿음과 결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나. 독신생활은 조금이라도 이성을 갈망하거나 정욕을 이길 수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은 결혼과 이혼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바르게 따라야 한다. 사도바울이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는 것(고전7:32)은 그가 받은 특별한 은사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지 결코 자기와 같이 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7:35).
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결혼생활을 하던지 독신생활을 하던지 죄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자기가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신령한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라. 예수님은 독신생활의 예외적인 교훈은 “받을만한 자가 받을 수 있다”(19:12고 하셨고, 또 독신생활은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19:11)고 하셨다. 우리들은 정욕에서 해방된 자나 된 것 같이 자기를 과신하면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위선은 버려야 한다.
* 마19:13-15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고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안수하여 주시고 축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는 천국의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
1. 결혼의 열매는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가정은 어린아이와 함께 천국을 이룰 수 있도록 하여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고 아이들의 부모들을 야단쳤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2. 모든 성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배우고 닮아야 천국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언제나 배우고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의 질문과 호기심은 순수하다. 그들은 편견 없이 진리를 배운다. 그들은 개방적이어서 많은 것을 흡수한다. 또 의존적이어서 가르치는 자를 믿고 따른다. 이렇게 단순한 성품을 가져야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예수님의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첫째, 어린아이들 앞에는 어떠한 걸림돌이라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가정이 천국이 되기 위하여서 부모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예수님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주여야 한다. “하지 말라”고 좌절시키기 보다는 “하라”고 격려하는 일이 더욱 많아야 한다.
둘째, 어린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만지고 껴안고 함께 먹고 마시고 놀고 생활하면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성도의 가정과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어린아이로 구성되는 천국의 모형이다. 부모들과 아이들은 가정과 교회에서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 마19:13-22에는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와 나누신 대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젊은 부자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1. 젊은 부자는 성공적인 인물이며 겸손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학력과 경제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도덕심이 강하고 율법의 규율을 잘 지켰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일부를 열거하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젊은 부자는 어려서부터 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죄인이 아니며 의인이다.
2. 예수님은 그의 신앙에서 부족한 점을 들추어내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은 젊은 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회개”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주셨다. 회개가 없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신앙생활이다.
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있는 것을 의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예수님은 열 번째 계명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만일 열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더라면 그것도 잘 지켰다고 그 젊은 부자는 대답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의 마음속에 탐욕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셨다. 그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였다. 탐심은 우상숭배다. 탐욕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탐심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4. 젊은 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재물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었으나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다. 신앙의 기초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만다.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허물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기도는 헛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한다. 현실생활의 필요를 채우려는 기도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을 간절하게 간구하여야 한다.
* 마19:23-26에서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를 말씀하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여 주시자 그들은 몹시 놀라워하면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의아히 여겼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구원 얻은 자의 물질관을 배우게 된다.
1. 많은 재물의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로 여겼다. 넉넉한 소유를 보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고 있다. 의인 욥이 재산과 자녀와 건강까지 잃은 것을 보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큰 죄악을 저질렀다고 단정하였다. 신명기 26-28장의 기록은 축복과 저주(=복과 화)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화를 받는다는 구체적인 사실들이다. 이러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애굽에서 해방되는 큰 구원을 체험하고 광야생활을 할 때에 받은 말씀이다. 이때 그들의 신앙은 유아기의 어린 상태에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말씀은 상급과 형벌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상급과 형벌을 약속하여야 효율적인 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한 사람은 상급과 형벌을 생각하기 전에 관심과 사랑의 동기부여로 인하여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게 된다.
2. 예수님은 보이는 질병을 구쳐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영적 구원의 축복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실상은 영혼의 구원이 먼저 있고 육체의 치료는 나중에 따라옴으로써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육체의 치료를 실증으로 보여줄 때에 믿음이 생기지만 영혼의 구원이 없는 육체의 치료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물질의 축복은 영혼의 축복을 위한 실증과 도구로 주신 것이며 결코 물질의 축복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영혼의 축복을 물질의 축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이다.
3. 예수님의 제자들은 젊은 부자가 자기가 가진 소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무거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라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부요한 생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것을 부정하시는 것인가? 그러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4.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란 사람의 노력과 사람이 쌓아 놓은 부요와 업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해답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구원의 주체는 곧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만일 우리들이 “나는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여도 천국에 들어갈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이다.
5. 예수님은 재물의 소유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매우 어려워진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으나 그의 부요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겼기 때문에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축복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자가 참으로 구원 받은 백성이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보화인 믿음과 구원, 예수님과 영생만이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 마19:27-30에는 믿는 자의 상급에 관한 예수님과 제자와의 질의응답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하고 질문을 하였다.
우리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주실 상급은 “신령한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령한 축복은 물질적 축복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본래 영은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은 육체를 다스리고 있다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영혼의 축복은 육체의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한 제자들의 상급은 무엇인가?
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축복은 제자들이 받은 특수한 자격이다. 무엇을 받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 사람 자체의 가치가 새로워지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축복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의 말과 행동은 지도자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가 가정에 있든지 교회에 있든지 사회에 있든지 그에게는 지도자의 영향력이 나타난다. 자녀들을 바로 가르칠 수 있고 교우들에게 덕을 끼칠 수 있고 이웃에게 모범을 보여주게 된다.
나.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희생한 성도는 현세에서도 엄청난 영적 수확을 거두어 드린다고 하였다(눅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였고 마가복음에서는 “백 배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수확과 열매다. 예수님을 위한 희생의 대가는 현세에서 수많은 믿음의 부모자식과 형제자매를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다.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한 성도는 장래에도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위한 희생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며 투자다. 희생은 곧 생명이며 죽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희생할 수 있을가를 여쭈어보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기도제목이다.
*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또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여주셨다. 먼저 되고 나중 되는 일은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앞선 자가 뒤에 서며 큰 자가 작아지며 또는 높은 자가 낮아지는 것과 같이 서열이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서열의 바뀜을 의미하지 않고 서열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조건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성도들은 차별 없이 똑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오래 된 신앙인과 초신자를 구별하지 않으며 특히 천국복음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직업과 재산, 가정과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1) 신령한 지도력, (2) 현세의 풍성한 열매, (3) 내세의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보상으로 받는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그러나 이 보상은 노력의 대가나 공로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진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예수님은 마19:30과 20:16의 말씀을 주셨다.
2. 예수님은 품꾼을 얻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20:1-16)에서 더 분명하게 해설하여 주셨다.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은 저마다 작업시간이 달랐다. 12시간, 9시간, 6시간, 또는 3시간씩을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포도원에 들어와 일을 하였다. 그들은 각자가 하루의 품삯 전부를 받기로 계약하고 일을 하였던 것이다.
3.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해가 저물기 전에 1시간씩 일할 품꾼들을 모아들였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계약도 없이 일을 시킨 것이다. 그날의 작업이 모두 끝나자 포도원 주인은 1시간만 일한 품꾼들에게 하루의 품삯을 전부 지불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12시간, 9시간, 6시간, 또는 3시간씩 일한 품꾼들에게도 하루의 품삯 전부를 지불하여 주었다.
4. 그런데 12시간 동안이나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였던 사람들은 자기들은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가 실망하였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이다.
5. 포도원 주인은 은혜를 베풀어서 모든 품꾼들이 똑같이 지불 받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살 수 있도록 하여준 좋은 분이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번에는 뒤집어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과 똑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백성들은 먼저 되고 나중 되는 차이가 전혀 없이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은혜를 나누며 서로 아름다운 교제를 가져야 한다.
* 마20:25-28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표본을 제시하여 주셨다.
1. 예수님은 천국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다는 점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도록 종용하셨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며 섬김을 받고 있으나 천국백성 사이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 “섬기는 자”란 원어는 “다스리는 자”(minister, 목사, 장로)를 의미하고 있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자는 큰 자이지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스림과 섬김은 같다는 뜻이다. 또 “종”이란 원어는 “노예”를 의미한다. “집사”라는 직분은 “종”에서 나온 말이다. 집사의 직분은 노예의 신분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종은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노예는 종이다. 집사는 노예의 신분을 의식하고 봉사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생활을 하여야 큰 자가 되며 노예의 생활을 하여야 으뜸이 된다고 가르쳐주셨다.
3.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우리들은 예수님의 표본을 생각하며 섬기는 생활과 노예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
* 마20:29-34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도중에 여리고에서 두 사람의 맹인을 고쳐주시게 되었다. 마가복음의 기록과 종합하여 보면(막10:46) 한 맹인은 바디메오였으며 다른 맹인은 그의 친구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와 종의 모습으로 그들 두 맹인을 고쳐주셨다.
1. 두 맹인은 큰 소리를 질렀다. “주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그들이 예수님은 “주님”으로 부른 것은 큰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또는 선지자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받으실 주님으로 불렸다. 또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의 왕권과 능력을 가지고 활동하신 사적을 소문으로 듣고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크신 구원의 주님이 자기들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은 또다시 생길 수 없는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높고 위대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무례한 행동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예의를 차릴만한 정신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잠잠하라”는 책망까지 하였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더욱 높은 소리를 질렀다.
2. 섬기려고 오셨고 종(=노예)의 신분으로 활동하신 예수님은 겸손한 자세로 맹인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반응과 관심을 보여주셨다.
첫째,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중단하고 머물러 서셨다(눅18:40). 주님은 우리들의 간구를 외면하실 정도로 바쁘시지 않다.
둘째, 예수님은 맹인들을 당신에게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이때 바디메오는 겉옷(=외투)를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안내되어 왔다. 걸인 소경에게 외투는 중요한 자산이다. 중요한 것을 내어버린 것은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은 맹이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주님,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의 눈을 만지시며 볼 수 있게 하여주셨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을 때 저들에게는 새로운 광명과 새 생활이 시작되었다.
3.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희들도 종(=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계신다. 섬기는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구원을 받을 때 기쁨을 금할 수 없다. 예수님은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로 인하여 기뻐하셨다. 사도바울도 섬김의 도를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기쁨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김의 도를 실천할 수 있을 때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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