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작은 자 하나를 위한 사역 (마18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18:10, 14).
* 마태복음 18장은 네 번째로 주신 예수님의 설교 말씀이다. 15-17장에서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 이유가 “만족과 행복을 채워줌”에 있다는 배경에 관한 여러 가지 사례를 보여주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셨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에클레시아 = 불러냄을 받은 자)의 지체의 자격을 받을 때에 그러한 목적이 성취된다. 모든 지체는 오직 “믿음”으로 결속되며 아울러 오직 믿음으로만 “만족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마16장에는 “교회설립의 헌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신앙적 기초”로써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가 분명하게 한 지체(베드로)의 입으로 고백되었다. 모든 지체는 머리와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룬다. 그 영광스러운 몸을 이루기 위하여 머리 되시는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받아드리고 천국백성을 삼는데 필요한 길잡이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고난과 죽음의 피로 세우신 교회의 머리와 지체는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있다. 모든 지체가 중요한 생명의 지체인 겉과 같이 하나의 지체도 주 예수님의 중요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이제 마18장에서는 그 “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므로 바로 세워지고 바로 성장하고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합체를 이루어야 할 것을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는 요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모든 교회는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영혼의 연약함과 방황함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그의 회복을 위하여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가 전체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 “하나”가 전체의 슬픔의 대상이 된다. “하나”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이다.
* 마태복음 18장 전체를 놓고 보면 각 지체의 생활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1.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대하며 함께 산다(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2. 서로 대할 때 그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
3. 누구에게도 공격적인 자세를 대하지 않는다(18:7).
“실족하게(cause to sin)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4. 작고 연약한 자를 보살핀다(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5. 교회에서 시행하는 영적 훈련을 받는다(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6. 교우들과 함께 기도한다(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7. 제한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용서한다.(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 네 번째 설교인 마태복음 18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기(18:1-4)
2.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사람 되기(18:5-6)
3.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의 화(18:7-9)
4. 작은 사람을 보살펴 줌(18:10-14)
5. 교회에서 훈련 받기(18:15-19)
6.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기(18:20)
7.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기(18:21-35)
* 마태18:1-6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라는 말씀에서 훌륭한 성도의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나은지 쟁론하다가 결국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오게 되었다. 이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시청각교육의 차원에서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천국백성들은 “나”라는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다. 자기를 의식하면서 세상의 욕망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을 때 천국백성이 된다.
2.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를 알려면 어린아이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늘 자기의 부모를 믿고 따르며 자랑하는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 부모에 속하여 있음을 알고 늘 부모를 찾으며 따르며 살핀다. 자기의 생각보다 부모의 지시와 가르침대로 행동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이와 같은 태도로 섬기고 따르는 것이 곧 겸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3. 마가복음 9장 35절을 보면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아람어에서는 “아이”와 “종”은 동의어로써 같은 뜻을 전하여주고 있다. 따라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은 곧 “섬기는 종이 되라”는 말이다. 천국백성은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이며 자기를 높여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바르게 가르칠 수 있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바르게 영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린아이와 같이 또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일생을 사셨다. 우리들도 종들이 되어 서로 섬기고 서로 영접하여야 “제자의 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우월감을 가지고 산다면 스스로 속고 사는 것이며 결국 자기도 넘어지고 남도 넘어지게 한다.
4. 예수님은 우리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멸시하거나 넘어뜨려 범죄 하게 만들면 그런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단호한 말씀을 하여주셨다. “화”라고 하는 것은 어둡고 무서운 죽음의 형벌을 의미한다.
5.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섬기는 자로써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으며 이와 같이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린아이 한 사람을 일일이 보살피고 계신다. 선한 목자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며 또 그 하나라도 멸망될 것을 원치 않으신다. 마18:10의 말씀과 히1:14의 말씀을 비교하면서 성도 한 사람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여야 한다.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히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NIV. Are not all angels ministering spirits sent to serve those who will inherit salvation?)
6. 겸손한 성도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자기의 것 내어놓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들을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한다. 만일 내가 다른 형제자매의 걸림돌이 된다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엄한 경고와 강력한 표현의 말씀을 다시 음미하여 보자.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7. 만일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실족하게(cause to sins) 하였다면 우리들은 영적 대수술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제자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도 자기들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하는 일을 금하였다고 예수님께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런 능력을 행한 사람은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고 성경학자들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제자 요한은 자기도 전에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는데 자기가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우월감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형제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고 실족하게 하는 결론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제한하고 겸손한 생활을 추구하면 신앙의 성장을 보게 되며 바른 구원을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임으로 예수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15-17에는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여 우리를 넘어지게 하였을 때 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한 구체적인 세 가지 방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첫째, 그 형제를 찾아가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 형제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또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찾아간 사람은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또 두 사람의 교제가 끊어지는 결과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 형제를 넘어지게 할뿐 아니라 잃어버리게 된다. 찾아가는 사람은 훈련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갈 5: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레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둘째, 만일 그 형제가 듣지 않으면 다음 기회에 두 세 사람의 증인과 함께 찾아가서 혼자 갔을 때와 같이 아름다운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다시 대화를 나누도록 하라는 것이다. 함께 동행하는 분들은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그러한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범죄한 형제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어긋나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된다.
셋째, 만일 증인들과 함께 한 권고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보고하여 교회가 그 형제를 구원할 수 있는 최대의 지혜로운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란 성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는 그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하여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전문기관의 역할을 해야 하며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 전체가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한 형제의 범죄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교회의 문제로 알고 여기에 대하여 교회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한 사람의 실수는 교회의 가르침(잘못 가르침 또는 안 가르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르침에는 예수님의 권위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과 훈련에는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 마태18:18-20에는 교회의 중요한 활동요소로 권위, 기도, 교제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은 교회가 가진 권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무엇이던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던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권위는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 것이다. “매다” 또는 “풀다”는 말은 유대인의 생활언어의 일종으로 “금하다” 또는 “허락하다”는 내용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열쇠의 기능은 “주로 여는 일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이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을 할 때에 천국백성을 삼는 열쇠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제자들이 먼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할 때에 성도의 영적 권위는 주기도문의 말씀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둘째, 예수님은 교회가 기도의 활동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뜻으로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교회의 구성은 현실적, 실질적 차원에서 볼 때에 적은 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올바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합심하다”는 원어는 오늘날의 “관현악 연주”와 관련되는 말로써 “마음과 뜻이 일치된 행동”을 가리킨다. 마음을 합친 적은 수의 기도모임은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며 한 사람의 범죄에 대한 회개와 아울러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셋째, 예수님은 교회에는 반드시 교제활동이 요구된다는 말씀으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어떤 형태의 모임이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예배”가 있어야 한다. 예배를 통하여 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모두가 인식할 수 있고 거기에서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깨닫게 하여주심과 회개와 각성이 있게 된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성도들과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생활을 하여 범사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라”(엡4:15)고 한 것이다.
-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거짓으로 교회를 섬기려 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와 성령님을 속이고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참 마음으로 믿음과 기도와 교제에 힘쓸 것이다.
-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이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 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 마태복음 18:21-35에는 용서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1. 어느 날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하고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수자의 개념을 가지고 일곱 번이라는 말을 하였으나 예수님은 수자의 개념이 없는 “제한 없는 용서”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2. 베드로는 용서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랍비들은 “세 번의 용서가 충분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일곱 번의 용서가 큰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여겼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새 교훈”이며 “사랑의 교훈”이다. 전통적 개념과 낡은 사고에 매여 있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도들은 오직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살 때에 그 사랑을 깨닫고 자기도 조금씩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용서는 곧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기록하거나 기억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4. 예수님은 빚진 종을 탕감하여 주시는 왕의 비유를 드시고 용서에 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남겨주셨다. 먼저 이 비유는 은혜로 값없이 받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성도 형제들 사이의 문제해결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왕이 일시적으로 빚을 탕감하여 주게 되는 사실에 대한 오해가 없게 된다.
5.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면 용서 받은 종의 세 가지의 단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그는 빚을 진자였다. 그는 왕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돈을 도적질 해내었다. 한 달란트란 하루치의 일 값인데 이 빚 진자는 27명에게 일 년간 지불할 수 있는 거금을 횡령한 것이었다. 이 사실이 들통 나서 잡혀 들어온 그는 비록 자기는 빚을 다 갚겠다고 하였으나 전혀 불가능한 것을 알고 왕은 자비를 베풀어 탕감하여 주었다. 이 빚진 종은 용서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었으나 왕의 사랑과 자비심 때문에 일방적으로 호의를 입게 되었다.
둘째, 그는 채권자였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 액수는 하루치의 일 삯도 안 되는 미미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는 채권자의 횡포를 부리어 무자비하게 자기 친구를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먼저 감옥살이를 하고 있어야 할 범죄자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셋째, 그는 결국 감방에 갗인 죄수가 되었다. 왕이 그 종을 옥에 집어넣으면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친구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넷째, 우리들은 이 비유에서 사랑과 자비가 없는 마음이 바로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친구를 용서해 줄 수 없는 사람은 스스로 사랑이 메마른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의 사랑의 빚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지고 살고 있다. 내가 범죄하고 실수하였을 때에 그들이 용서하고 사랑하여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랑과 자비와 겸손으로 형제들을 용서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