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6일 토요일

14. 하나님의 계시로 환난을 이김 (마21-23장)

14. 하나님의 계시로 환난을 이김 (21-23)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21:44).
 
* 마태복음의 다섯 번째 항목(Section Five)19-25장은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올바른 판단(The Judgement)의 표준이 하나님의 계시(말씀, 기도)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항에 처하게 되어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말씀하시고 행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의 삶의 표본이 되고 있다. 마태19-20장에서는 제자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성도의 생활규범을 정리하여 말씀하셨으며 마태21-23에서는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셨다. 마태21-23장의 간추린 내용을 적어보자.
1.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입성 (21:1-11)
2.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심 (21:12-17)
3.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21:18-22)
4. 예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질문과 대답 (21:23-27)
5. 두 가지 비유의 이야기 (21:28-44)
6. 예수님을 대항하는 모의 (21:45-46)
7.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 (22:1-14)
8.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 (22:15-22)
9. 부활에 관한 논쟁 (22:23-33)
10. 가장 큰 계명 (22:34-40)
11.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22:41-46)
12.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경고 (23:1-12)
13. 바리새인들을 향한 일곱 가지 화 (23:13-36)
14. 예루살렘을 향하여 통곡하신 예수님 (23:37-39)
 
* 마태21:1-11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다. 그리스도(=메시야) 이심을 숨겨 오시다가 이때에 비로소 세상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신 것이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스가랴 9:9의 말씀대로 백성의 왕으로 나타나셨고 겸손하게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다. 이때의 나귀는 한 번도 누구를 태우지 않은 어린 새끼였으며 예수님을 처음으로 자기 등에 태웠다.
 
2. 8:6-9에는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며 모든 짐승도 복종케 하신다고 하였다.
  시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3. 이때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펴고 군중들도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다는 수락과 경배를 드린 것이다 (cf.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4. 나귀 등에 앉으신 예수님을 향하여 온 백성은 메시야에게만 드리는 찬양과 간구인 호산나”(=“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여 주옵소서”) 소리를 높이 외쳤다. 스가랴 9:9에는 예수님의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일을 예언하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5. 우리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허덕이고 있고 우리들의 심령은 여러 가지 범죄로 인하여 상하였고 찢겨 있으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들도 소리 높여 구원의 주님을 환영하며 영접하여야 한다. “호산나, 이제도 간구하옵나니,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 마태23:37-24:2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파괴 될 것을 예언하셨다. 누가복음 19:37-44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심한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다. 왜 그리하셔야만 하였는가? 통곡과 눈물의 내용이 무엇인가?
 
첫째, 예루살렘은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19:42).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에루”(=)살렘”(=평화)이 합친 말이다. 백성들은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평화에 관한 일이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으나 백성들은 평화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이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누가복음 2:10-14의 내용을 보자.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군중들은 땅에서 누리도록 선포된 평화를 하늘에 돌려보내는 찬양을 하고 있었다. 19:37-38의 기록을 보자.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둘째,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곧 멸망하게 될 것을 미리 보시고 심한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이란 곧 세상의 종말을 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을 버리면 유대인이 아니며 예루살렘이 없어지면 유대인은 생활기반을 잃고 산산이 흩어지고야 만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이 흩어져버릴 것을 미리 보고 계셨다.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  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주후 70년에 로마의 세력은 143일간 저들을 포위한 후 6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예루살렘 도성을 함락하여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셋째,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권고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 “권고 받는다는 말은 방문을 받는다”(visitation)는 말이다.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에 영접하여 드리면 축복과 번영이 이루어지고 배척하면 심판과 저주를 받는다. 저들은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메시아의 방문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 마태21:12-17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에 입성하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청결을 감행하신다. 성전청결이란 성전답지 않은 인간탐욕의 요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성전을 일컬어 한 마디로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달라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도를 의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 세계를 향한 복음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어진다.
 
1.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만 위한 예배장소가 아니었고 이방인들도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전 외곽에는 이방인의 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방인이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이방인을 위한 전도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여야 할 장소가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잘못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선교의 장소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과 훈련의 장소인 성전이 인간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향되었을 때에 성전청결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2. 예수님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애어 쫓았을 때에 회복된 성전의 기능이 나타났던 것을 보게 된다.
첫째, 이제까지 성전 안에서 볼 수 없었던 소경과 저는 자들이 보여 졌다. 예수님은 그때에 환자들을 고쳐주셨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비로소 치유와 회복의 참다운 예배처소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활동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상한 일로 보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바른 활동이 그르게 보여 질 정도로 그들은 성전에서 그른 일만 일삼아 왔던 것이다.
 
둘째, 이제까지 성전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 찬양의 함성이 들려졌다. 어린아이와 같이 모든 성도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찬양과 경배를 드렸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넘쳐야 하며 인간의 탐욕은 사라져야 한다. 예수님의 성전청결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8:2) 귀하신 작업이었다. 성전예배에는 언제나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져야 한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린아이들의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분노를 금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자기들이 받고 있는 영광에 도추되어 있었다.
 
셋째, 이제까지 들어볼 수 없었던 메시아 예수님을 섬기는 찬양이 성전에 넘치게 되었다. “호사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참다운 성전활동은 언제나 메시아 예수님의 이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성전은 예수님의 대속사업이 완성되는 순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하며 예수님께서 친히 외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나감과 아울러 성전 건물의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성전건물이나 몸 된 성전청결은 심판의 채찍임을 알려준다.
 
* 마태21:18-22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잎사귀는 있는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히지 못하리라.” 말씀대로 저주받은 무화과는 곧 말라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훈을 남기시기 위하여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사용하신 것이다.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과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나라, 그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로 전락되고 부패되었을 때 예수님의 채찍을 맞아야 하였고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선과 교만 외에는 아무런 신앙의 열매를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1. 본래 무화과나무는 처음부터 열매가 나타난다. 나무가 자라가면서 열매도 함께 익어가는 것이 무화과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무화과는 열매가 없었고 잎사귀만 무성하였다. 처음부터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잎사귀만 무성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성품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버렸으므로 저주를 받았고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옮겨졌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린 것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후 40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과 함께 흩어진 백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천국과 구원의 열매를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주셨다. 그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언약이었다. 그 언약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존속하여 왔는데 이스라엘이 심판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들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이상히 여기면서 어찌하여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질문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11:22)고 말씀하시면서 신앙의 원칙을 다시 설명하여 주셨다.
 
3. 신앙인은 종교적이며 의식적인 행위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가 무르익도록 하여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권능을 가지시고 열매 없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으므로 이제는 열매 맺는 신앙인들(=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시켜 나가야 할 것을 시사 하셨다. 무화과나무에게 일어난 무서운 심판의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는 큰 각성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없어도 얼마든지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일들도 능히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제자들로서는 기도의 생애를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건설과 구원의 사역을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탁하지 않으시고 믿음과 기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제자 각 사람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 미태21:23-27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나와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합니까? 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반문하시면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주신다.
 
1. 예수님은 어느 누구라도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셨다. 본래 인간의 권위라는 것은 합법적,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추원들에서 볼 때 인간 활동을 조절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인정하는 학문적 배경,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으나 영향력이 막대하였다.
 
2. 예수님은 영적감각이 마비되어 있는 그들에게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문하신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세례요한의 사역은 어느 조직이나 기관의 직위나 후원을 받지 않았으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역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고 세례요한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와 세례요한의 권위가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절대적인 권위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계신 것이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기 때문에 그의 권위를 인정하면 예수님의 권위를 자동적으로 인정하게 되며, 그를 부정하면 수많은 백성이 받은 회개와 세례를 부정하게 되는 결론이 나온다. 세례요한을 인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묘한 처지에 빠진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 한다고 대답하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때 예수님은 나도 너희에게 나의 권위에 대하여 말하여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3. 우리들은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모든 가르침이 과연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 말씀의 표준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요7:16-17에서 말씀하셨다.
16.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4. 세상의 권위는 지배력이다. 그러나 성도의 권위는 영향력이다. 지배력은 있다가도 없어지며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반면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아름답고 지혜로운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순종하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 마태21:28-3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포도원을 가진 아버지가 맏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나가서 일하라고 명령한다. 맏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아들은 실상은 아버지와 아무 상관이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아들이므로 아버지는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는 것이며 아버지이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서 집안일을 보는 것이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명목상의 아들에 불과하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 참다운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였다.
 
2.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자부심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참다운 아들의 자격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다.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대적인 대각성이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 천국건설의 분명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더욱 분명하게 그들 앞에 전개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3.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어보셨다. “그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 “둘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인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일러주셨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참 자녀의 자격을 상실한다. 뉘우치고 돌아서는 회개와 믿음은 언제나 요구되는 귀한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둘째 아들과 같이 되어 줄 것을 원하고 계신다.
 
* 마태21:33-4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포도원을 소유한 주인은 포도원 사업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다 갖춘 후에 포도원의 운영을 농부들에게 맡겼다.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정한 때에 주인에게 바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아들까지 보내어 포도원의 수입을 거두어 드리려고 하였으나 포도원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을 없애버리고 포도원의 운영을 다른 농부들에게 맡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은 극상품 최고의 포도나무를 심고 최상급의 포도원을 만들어서 가장 좋고 많은 수확을 계획하였으나 기대하지고 않았던 들포도를 맺었기 때문에 포도원의 진가를 잃어버리고 결국 황폐하게 되었다. 이사야 5:7의 말씀은 이러하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 이었도다
 
3.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포도원과 같았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가꾸고 기르는 포도원의 농부들과도 같다.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만 채웠다. 따라서 예수님의 엄하신 경고가 내려졌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심판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빼앗겨졌다는 것이며, 둘째, 그 하나님의 나라가 열매를 맺고 수입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아는 이방 백성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본래의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천국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을 때까지는 천국백성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에게 돌려보낼 영광을 가로챘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시편 118:25의 말씀에서 호산나”(=이제 구하옵나니 구원하옵소서)로 찬양의 소리를 높이 불렀으나 종교지도자들은 배척하였다. 예수님도 백성들이 인용한 시118편을 인용하셨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23). 머릿돌은 천국건설의 기초다. 돌과 반석은 구약시대로부터 견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머릿돌이시다. 이 머릿돌은 천국건설의 기초이며 심판의 표준도 된다. 따라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44)고 말씀하셨다.
 
5.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고 하셨다. 자기를 예수님에게 던져버리고 깨어지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우리들은 거두어드린 포도원의 열매와 수입을 주님에게 드려야 한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의 아름다운 손길을 베푸는 최상급의 포도원과 농부들이 되어야 한다.
 
* 마태22:1-1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혼인잔치의 비유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권유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잔치 집에서 내어주는 예복을 입지도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천국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자격을 빼앗겼다고 해설하여주셨다.
 
2. 예수님께서 연속적으로 말씀하여 주신 (1) 두 아들의 비유, (2)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3) 혼인잔치의 비유의 세 비유는 역사적인 흐름에서 일어날 일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관한 예언적인 비유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아들은 천국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과 아들을 살해한 자들 역시 천국백성의 자격을 빼앗겼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성령님의 권유를 받는 기회와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성령님의 부르심을 거절할 때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1-32)고 예고하셨다.
 
3. 성경말씀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사도행전 7장까지는 구원의 복음이 오직 유대인(=이스라엘) 백성을 위주로 전하여졌다. 하나님의 계획은 먼저 유대인에게!”(1:16; 3:26)라는 원칙대로 역사를 진행하셨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교회를 세우심)을 거역하고 교회를 핍박하였고 성도들을 살해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천국잔치에 들어가는 영광을 빼앗기고 그 귀한 특권이 이방인들에게 옮겨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본문의 비유에서 잔치에 초청을 받은 그들은 초청을 안내하는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므로 잔치주인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진멸하기까지 하였다. 초대교회의 집사 스데반은 순교의 현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스렸다”(7:51)고 증언한 것은 그들의 죄악상을 한 마디로 함축한 내용이었다. 유대인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척하고 성령님까지 거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약으로 보장하여 주신 장자의 특권을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빼앗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5. 갈라디아서 3:14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유대인과는 다른 상항에 처하여 있다. 우리들을 향하신 성령님의 사역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말씀이며, 둘째,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더불어 시작된 교회의 교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의 성도가 되지 않고서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들 이방인들을 향한 강한 메시지이다. 복음의 메시지가 들려질 때마다 성령님의 가르치심으로 알고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우리들에게는 요구된다. 유대인을 지나서 이방인에게 오신 성령님은 언제 우리들을 지나가실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오늘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6. 천국의 주인은 유대인들에게는 초청장을 미리 주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각자에게 예복을 주셨다. 예복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천국잔치의 영광을 즐기는 자격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예복을 입으라는 천국주인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된다. 만일 우리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결박을 당하여 어두움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유대인도 청함을 받았고 이방인도 예복을 받았으나 만일 순종하지 않으면 택하심을 받은 천국백성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경고하셨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고 하였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천국백성의 자격을 영원히 간직하여야 한다.
 
* 마태22:15-22에는 세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1. 예수님의 권위가 종교기관의 후광을 입지 않았다는 점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고 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절대적인 신적 권위에 앞도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많은 대중이 듣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배척하는 자는 누구라도 천국백성이 되는 자격을 상실한다고 권위 있게 가르침으로서 바라새인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서라도 예수님에게서 결점을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후퇴하지 않고 이번에는 교묘한 질문을 던진 후에 나오는 답변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씌우려고 계획하였다. 그렇게 할수록 예수님이야말로 깨끗한 어린양이시라는 것이 더욱 판명되어졌다.
 
2.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야합하여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원수지간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반로마정부파이며 헤롯당은 친로마정부파였다. 로마정부에서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poll tax)의 경우, 바리새인들은 세금을 바치는데 반대하였고 헤롯당은 찬성하였다. 그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아니오를 분명히 규명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는 대답에는 로마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넣고 그렇다는 대답에는 유대인에 대한 반역자로 규명하려는 처사였다.
 
3. 많은 군중이 둘러쌓아 보고 있는 중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동전이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반문하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21).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책잡을 수도 없었고 오히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4.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몇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다스리는 자를 존경하고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도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3:20). 우리는 속하여 있는 국가 및 사회의 법규와 질서를 존중하여야 하며 다스리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복종하여야 한다. 가이사나 다스리고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어떤 지배자도 정치인도 종교의 자유를 봉쇄할 수는 없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줄 알아야 자기의 나라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시민이 될 수 있다.
 
셋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인간을 죄악을 범한 후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인간 죄악의 대가를 당신이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참다운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 마태22:23-33에는 사두개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의 권위와 가르침에서 결점을 찾아내려고 도전하고 나선다. 그들은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였고 영의 세계를 부정하였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에 도전하였고 부활신앙은 모호하여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공격하였다.
1.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따르는 모세오경 중에서 신명기 25:5-10에 있는 결혼제도에 관한 규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였다. 형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가문의 이름을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은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취하였던 한 아내는 부활하게 되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죽은 후의 일을 판단하려는 의도는 부활을 부정하는 교묘한 수단이었다.
 
2. 예수님은 신명기 3:6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현재형의 하나님, 즉 지금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므로 시대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권한으로 주시는 것이요 결코 모세가 주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으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육체적 부활을 보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3. 또 예수님은 그들에게 천국생활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30). 하늘나라의 생활은 지상의 생활과 다르다. 저곳에는 죽음이 없으므로 결혼도 필요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서 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천사들이 결혼하지도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각각 부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이름도 각각 부르시며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4. 우리들은 성경말씀을 떠나서는 죽은 후의 일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내세울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사두개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들은 진리가 깨달아질 때마다 더욱 경외감을 가지고 묵묵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 마태22:34-40에는 율법의 중요한 가르침인 가장 큰 계명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하였다.
1. 그들의 율법조항은 하라는 긍정적인 것이 248가지였고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것이 365가지였다. 도합 613가지나 되는 조항을 모두 기억하고 잘 지키기는 불가능한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613가지의 조항을 두 조항으로 농축하고 집약하셨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신명기 6:4 이하의 말씀인 셰마를 인용하여 주신 것이다. 셰마는 유대인들이 매일 신앙고백서와도 같이 암송하는 계명이다. 이 계명은 셰마”(=들으라) 라는 히브리말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은 셰마”(Shema)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감상적인 어떤 느낌이 아니며 구체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3. 또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레위기 19:18을 인용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은 셰마의 핵심”(=하나님을 사랑하라)과 똑같은 차원에서 실천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구약 성경)의 대강령은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응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cf. 14:7-12).
 
* 마태22:41-46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메시아)에 관하여 중요한 질문을 하신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구약성경의 가르침(cf. 삼하7:12-13; 78:68-72; 5:2) 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하고 즉시 대답하였다.
1.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육의 자손으로만 알고 있으면 바른 신앙이 생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시편 110:1의 기록(=다윗의 시)을 인용하셨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22:44). 모든 성경말씀은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서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성경말씀의 저자인 다윗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시편의 말씀을 남겼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와 정확성을 부정하고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2. 예수님이 인용하신 다윗의 시는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신앙인이었다. 그리스도(=메시야)를 자기의 주님으로 알고 예배의 대상으로 섬겼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945)고 반문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3. 그리스도는 사람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한다. 성령님은 다윗을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게 하셨으므로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보면 다윗의 주님이 되시며 사람으로만 보면 다윗의 자손이 된다. 시편 110:1의 말씀은 예수님의 온전하신 신성과 인성을 가리키는 구절이며 예수님만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한 구절이하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해설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4.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을 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주님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들이 섬기는 예수님은 온 인류가 무릎 꿇고 경배하여야 할 주의 주”(Lord of lords)시오 왕의 왕”(King of kings)이시다. 따라서 우리들은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 마태23:1-12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결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다.
첫째, 그들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난 그들의 신앙의 대상은 모세였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보다는 인간의 상대적 권위를 앞세웠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며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시고 그러므로 무엇이던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답게 가르쳐야 하며 가르치는 자의 생각과 주장이 섞여 들어가서는 안 된다. 사람의 교훈이 섞일 때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파괴되어 버린다.
 
둘째, 그들은 잘못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자의 사명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일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다. 예수님은 백성에게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에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11:28-29)고 하셨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을 주지 못하고 수많은 제도와 규정을 지키라고 하면서 생활의 편리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였다.
 
셋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잘못된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데에 있었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5:16) 사람 사이에서 영광을 구하려고 하였다. 지위와 명예를 찾아다녔고 상좌에 앉거나 절 받기를 기대하였고 랍비”(=선생님)라는 칭호를 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와 같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이미 지도력을 상실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야 만다.
 
넷째, 예수님은 신앙인의 태도와 가치관을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너희는 랍비(=선생)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지도자안내자, 스승, 인도자를 의미한다. 우리들의 인생행로에 앞장서서 지도자가 되어줄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남을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2). 예수님의 이 귀한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길잡이로 삼자.
 
* 마태23:13-36에 걸쳐서 예수님은 위선적인 지도자들이 받는 일곱 가지 를 말씀하셨다. 말씀의 내용을 자세히 읽고 요약정리하고 위선적 행동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질 것이다.
 
* 마태23:37-39에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가가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심한 통곡의 눈물을 흘리신 내용을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슬픔의 시가를 읊으시는 예수님에게서는 깊은 연민과 사랑의 모습을 만나보게 된다.
1. 예수님은 에루살렘을 연거푸 두 번씩이나 불러가면서 사랑이 담겨진 시가를 읊으셨다. 마르다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시던 예수님(10:41), 베드로를 시몬아, 시몬아!” 부르시며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노라고 안타까워하시던 예수님(22:31), 바울을 부르실 때에도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고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던 예수님(9:4)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 심한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으셨다(=하나를 향한 애절함).
 
2.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성장하여 온 백성이었다(32:11; 2:12; 17:8; 36:7; 91:4 ).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셨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7). “한 사람, 곧 나를 향한 사랑의 애가로 알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