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6일 토요일

16.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 (마26-28장)

  16.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 (26-28)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니라”(26:56).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 마태복음 26-27장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기록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하신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 26장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긴 절수를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내용이 다양하다. 고난의 내용은 마가복음의 기록과 거의 같으나 마태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강조하는 사항은 특이한 것이다. 특별이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주신 놀라운 예언의 말씀은 성찬을 행하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큰 기쁨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심어야 할 것이다. 26:27-30의 기록을 보자.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위의 기록에서 28절에 나오는 언약의 피라는 말씀은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을 언급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새 언약의 성취를 성만찬에서 확인하여 주셨고 아울러 이 성취가 아버지의 나라”(29)에서 새롭게이루어지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심으로써 성만찬을 시행하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신 사실은 너무나도 놀랍고도 귀한 축복이다.
하나님(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들에게 축복의 통로를 열어주시고 계시지만 제자들(우리들)은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멀리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대조적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
 
2. 27장에서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결국은 로마 병정들의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골고다에서 받으신 십자가 처형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만큼 그 안에 숨겨진 뜻과 비밀들이 아울러 귀중하다는 사실을 성경의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사야 53:4-6, 12과 로마서 5:8과 요한복음 12:31-33은 특기할 구절들이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5: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고도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손을 씻은 빌라도는 영원히 누명을 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증거하고 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처형한 그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은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Crucify him!)를 소리 높이 부르짖었고(27:22, 23)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Let his blood be on us and on our children!) 하며 자기들을 저주하였던 것이다(27:25).
 
4.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발생한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27:51)는 사실이다. 유대인 종교(유대교)는 하나님을 성전 안에 더 이상 가두어 둘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은 만민의 가슴 속에 다가가는 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으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1)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5. 28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며 모든 계획의 성취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은 서두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1:23)고 선포한 대로 마태복음 마지막에서도 일관되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믿음과 확신으로 접근하면서 예수님은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무서워하지 말라!”(28:10)고 하시며 늘 우리들을 격려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제자 된 우리들도 제자 삼는 사역에 우리의 생애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Go and make disciples!" (28:19).
 
* 마태26:1-4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가롯 유다의 문제점을 기록하고 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사실은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1.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한 제자였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12제자는 사도라는 특수한 직책을 수행하여 바른 신앙의 기초가 되며 천국 건설의 길잡이가 되고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되도록 엄선된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배웠으며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받고 병도 고친 기적을 행하였다.
 
2. 가롯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권세와 능력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의 반열에서 탈락되었으며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17:12)이라고 부르실 정도의 비극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속성이 바른 신앙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은 12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셨으나 너희가 다 깨끗지 아니하다고 하시면서 가롯 유다의 배반을 지적하셨다(13:11). 가롯 유다의 발은 깨끗함을 받았으나 그의 마음은 더러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나(in) 예수님께 속하여 있지(of) 못하였다.
 
4. 가롯 유다는 정치적 야심을 가졌고 예수님을 정치적 지도자로 믿고 존경하고 따르고 섬겼다. 그는 예수님이 왕권을 쟁취할 때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야의 사명을 부정하셨고 오히려 희생과 죽음을 누차 강조하셨다. 예수님에게서는 더 이상 자기의 바라던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무리와 동조하고 은돈 30냥을 받았다. 이 돈은 한 사람의 4개월 품삯이었으며 또 이 액수로는 한 사람의 노예를 매매할 수 있었다(11:12; 21:32). 가롯 유다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 의하여 예수님을 한 사람의 노예로 취급하는데 동의하였던 것이다.
 
5. 가롯 유다가 소유한 신앙이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는 자가가 원하면 예수님을 따르기도 하였고 또 자기가 싫으면 예수님을 버리기도 하였다. 그의 신앙의 출발점은 자기에게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신앙은 대상과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은 변함없으신 예수님이 언제나 출발점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님을 바로 보고 바로 알고 바로 깨달아 질 때에 그 분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참다운 신앙을 유지하게 하여준다.
 
* 마태26:31-35에는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지극한 사랑의 기록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한 요한복음 13:1의 말씀은 열한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22:32) 지극한 사랑으로 베풀어졌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곧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고 말 것을 미리 아셨으나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하여 주셨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들은 사랑의 줄에 매여 있었다.
 
1. 예수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31)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들을 꾸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오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성경말씀은 인간의 연약함을 지적하면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13:7)고 하였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시험과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다. 자기의 결심과 믿음이 확고부동한 것처럼 주장하고 나설 수 없는 것이다.
 
2.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하며 물었고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대답하셨다. 구원사업은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다. 사람은 사단과 대항하여 싸울 수 없고 예수님만이 하신다. 사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쉽게 다룰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미리 중보기도를 하여주셨다.
 
3. 베드로는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않고 예수님과 함께 옥에도 가고 함께 죽기까지 하겠다고 호언장담 하였다(22:33).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다. 몇 시간 후면 주님을 버리고 도망 갈 자기들의 연약함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고 하시며 그들이 실족할 상항까지 예고하여 주셨다.
 
4. 그런데 예수님은 장차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 뵙고 계속하여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그들의 무지와 교만이 변화되어 새 사람들이 될 것을 아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중보기도가 없다면 우리들은 천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바르게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
 
* 마태26:26-29은 성만찬 예식을 세우신 예수님의 기록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후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세우셨다(참고. 22:19; 고전11:24). 이 제도는 유월절 만찬을 확장하여 모든 교회가 성만찬의 예식을 지켜야 하는 역사적인 신기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구원을 완성하였으므로 그 구원의 기쁨을 재확인하는 예식이다.
 
1.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26). 떡을 축복하셨다는 것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는 뜻이다. 디모데전서 4:3-5에서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하였다.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의 기도와 더불어 언제나 성별된 음식을 대하고 있다.
 
2.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떡은 누룩이 들지 않은 밀가루로 만든 빵이었다. 죄를 상징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떡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을 내 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요한복음 6장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떡을 받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고 영생하라는 뜻이다.
 
3. 예수님은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28).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감사함으로 성별하시고 세 가지의 뜻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이것은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 구약시대로부터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모든 일을 진행하셨다. 그 언약은 반드시 피가 흘려져야만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었다. 레위기 17:11에 의하면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였다. 이 레위기의 복음 진리는 모세가 양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릴 때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선포하였다(24:8). 또 장차 메시야의 죽음으로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라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언하였다(31:31; 42:6; 53:12).
 
둘째, 이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라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이 흘리시는 피가 모든 구약의 언약을 완성한다는 것을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셋째, 이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피라고 하셨다. 성찬에 참여한 제자들은 너희가 온 몸이 깨끗하다.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13:10)는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성만찬의 포도주는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제자들이 받은 것이었다.
 
4.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함으로 예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의 몸에 참여한 우리들에게는 영생과 구원의 기쁨이 있다는 것이 재확인되며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된 우리들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되고 있다는 것도 재인식하게 된다.
 
* 마태26:36-46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애절한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도의 모습과 내용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애절하였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만 하느냐고 하는 심각한 영적문제에 직면한 기도였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예수님을 괴롭게 만들었는가?
 
1. 예수님이 기도하신 동산의 이름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이미 괴로움을 겪고 계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고민하고 슬퍼하여 죽게 되었다(37-38)고 하였고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 몸에서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다“(22:44)고 하였다. 이때 하늘로부터 사자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도왔다(22:43)고 하였다. 여기에서 영적 싸움은 육체적 고난보다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영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였다는 것은 최대의 비극이다. 히브리서 5:7에서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2.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아버지 하나님께 똑같은 기도를 드리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 인간은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야만 하였고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담이 생긴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의 버림을 당하게 되셨다. 죄는 없으나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죽어야만 하는 마지막 순간이 도달하였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고(고후5:21)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게 되셨다(3:13). 아버지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외아들 예수님은 버려야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었다.
 
3.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셨으나 세상 죄를 위하여 버림 받고 저주를 당하셨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그 은혜를 우리들의 지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을 뿐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따라서 히브리서 5:8-9에서 예수님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4. 하나님은 죄 없으신 어린양 예수님에게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피를 흘리게 하시고 우리 죄인들이 변하여 의인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고린도후서 5:20에서 이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는 바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드리신 애절한 기도였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들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 마태26:57-68에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신 후에 대제사장에게 이끌려가셨다. 요한복음의 기록(18:13)을 보면 먼저 안나스에게 그 다음은 가야바에게 끌려가셨다. 본래 대제사장의 직분은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유대 땅을 장악한 이후로는 로마 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대제사장의 직분은 임명제로 바뀌었다.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으로서 약 10년간(주후 6-15) 봉직하였으며 그 후에는 안나스의 세 아들과 사위가 후임으로 봉직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나(주후 18-36) 그때에도 안나스가 막후의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1. 안나스나 가야바는 사두개인의 종파에 속한 대제사장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영적 세계를 받아드리지 않고 모세5경의 권위만을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제사장 가족들은 성전사업을 장악하고 있었고 성전의 수입으로 부요를 누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셔서 성전청결 작업을 감행하실 때에 그들이 성직의 권위를 남발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성전사업)에 엄한 채찍을 가하셨다. 예수님은 신적권위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감히 예수님을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처단하려는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가야바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면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이미 공공연하게 주장한바 있었다(11:47-54).
 
2. 가야바는 예수님을 체포하고 성급하게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모임은 밤중에 열수 없었으나 불법을 감행하면서 예수님을 처단할 증인들을 불러드렸다. 모세의 법은 거짓증인을 세울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19:15-21)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일을 실행하였다. 거짓증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는 말로 성전을 모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성전중심이다. 성전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스데반도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거짓증인들의 증언에 의하여 돌로 맞고 순교하였다(6:12-14; 7:45-50). 예수님은 거짓증언에 대하여 반증하지 않으신 것은 이사야 53:7의 예언대로 입을 열지 않으신 것이다. 성전을 사흘에 재건하시겠다는 영적 진리를 몰지각한 그들에게는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3. 가야바는 거짓증언으로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하였고 또 예수님의 입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도록 유인하였다(30:2; 20:7; 19:12).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 질문에 네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고 예수님은 확답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인자)로써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엄연한 사건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확인하여 주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지며 가야바와 같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었다. 가야바는 자기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포하였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손과 주먹으로 폭행을 가했다.
 
4.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안나스나 가야바와 같은 대제사장들의 죄악을 재현할 가능성이 숨어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선지자들의 글을 성취하시는(26:56) 생애였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자기의 감정이나 자신이 유도하는 언행에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
 
* 마태27:11-26에는 예수님의 무죄와 관련된 빌라도의 고민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무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 총독의 행위는 자기의 능력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서글픈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는 유대 땅을 장악한 로마의 총독이었다. 그는 고의적으로 유대인의 법을 어기면서 유대인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자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 이방 로마의 국기를 계양하였고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피를 희생 제물에 섞어 우상에게 바치기도 하였다(13:1). 이와 같이 유대인의 미움을 사는 행위로 인하여 그는 위태로운 총독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빌라도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면서 또 자기의 목적달성을 위하여서는 제도와 원칙도 희생하였고 일관성 없는 정책을 시행하는 연약한 정치인이었다.
 
2.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할 때에 세 가지의 범죄조항을 열거하였다.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과 로마정부에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회유한다는 것과 자칭하여 왕이라고 주장하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었다(23:2). 빌라도는 로마정부를 향하여 위협이 되는 셋째 조항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예수님의 혁명과 반란 조직이 어떠한 것인지 심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며 군사조직도 없고 추종자들이 전투를 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나라는 진리의 통치를 따른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18:34-37) 빌라도는 예수님이 결코 위험인물이 아니며 무죄하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3.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저주하도록 강요할 때에 빌라도는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결백성을 주장하지 못하였다. 그는 고소하는 자들과 예수님 사이를 7번씩이나 오고가면서 고소인들의 말도 듣고 예수님의 말씀도 들으면서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18:29-19:13). 그런데 마가복음 15:15를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수많은 무리의 요청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야 말았다.
 
4.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삼단계의 묘안을 썼다. 첫째, 그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언급하였다. 둘째, 그는 분명하게 예수님은 정당하며 결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셋째, 그는 예수님을 엄벌에 처하였다가 석방하자는 제안까지 하였다.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만일 예수님을 놓아주면 너는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19:12)는 말을 듣고 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고야 말았다.
 
5. 예수님을 배반하는 요소는 세 가지라는 사실을 마태복음 27장에서 열거하고 있다. 첫째, 연약한 인간의 육성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육체를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반하였던 것이다. 둘째, 막강한 사단의 권세라는 것이다. 가롯 유다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고야 말았다. 셋째, 타락한 세상의 유혹이라는 것이다. 빌라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항복하고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았다. 예수님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고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단하는 악명 높은 역사의 한 인물이 되었다.
 
6. 재력과 권력과 능력을 소유하였을지라도 진리에 바로 서지 못하면 비겁하고 누추한 자다. 만일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세상을 택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우유부단하고 명백한 확답을 할 수 없다면 그를 참다운 신앙인으로 볼 자는 없을 것이다.
 
* 마태27:15-26에서 바라바냐, 그리스도냐?”라는 유명한 질문이 빌라도의 입에서 나오는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무죄하심을 발견한 빌라도는 예수님의 석방을 위한 묘안을 찾았다. 그것은 유월절 명절에는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사람씩을 석방하여 주는 전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1. 옥에 갇혀 있는 죄수 중에 바라바는 유대인 독립 운동가였다. 그는 살인과 도적질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대인의 해방을 위하여 활약하던 악명 높은 자였다. 빌라도가 볼 때에 바라바는 예수님의 행적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석방을 선택할 것으로 빌라도는 확신하였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17). 백성들은 소리를 지른다. “바라바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백성들은 소리 높여 외쳤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몰려든 유대인들이 민란과 폭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소리에 항복하고야 말았다.
 
2. 예수님의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하여 빌라도는 스스로 무죄하다고 발뺌을 하였고 빌라도의 법정에 몰려들었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25)고 호언장담 하였다. 무죄한 예수님의 피를 흘린 대가를 받겠다는 말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이 말로 인하여 저들은 끔찍한 대가를 받고야 말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바로 그 장소에서 36백 명의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또 현대사를 볼 때에 유대인들 6백만 명은 힛틀러의 손으로 살해되는 처참한 역사를 남겼다. 그런데 그들은 무책임한 말을 해버리고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도행전 5:28을 보면 대제사장이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너희가 이 사람(=예수님)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구나!” 그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자기들이 죽이지 않았다고 착각할 정도로 양심이 마비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신 후에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은 몇 년 안 되어 폐허가 되어버렸고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 다음 해에 폐위되었다. 한편 로마 총독 빌라도는 골(Gaul)이라는 지방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자살하였다.
 
3. 여기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양심이 마비된 인간의 범죄를 사용하시면서 까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무죄하신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빌라도, 가야바, 안나스, 로마 병정들, 유대인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이 고발되고 있다. 인간 모두는 스스로 저주를 불러드렸으나 예수님은 그 저주를 잠잠히 받으셨다. 신명기 21:23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3:13)고 하였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무에 달려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셨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친히 저주를 받으셨다.
 
* 마태27:45-56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들려주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통을 겪는 중에도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만민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때부터 정오 12시까지 예수님은 밝은 태양 빛이 비치는 가운데 십자가 위에 매어달려 계셨다. 그리고 정오부터 3시간 동안은 온 땅이 흑암이 뒤덮인 중에 약 세시 경에 예수님을 돌아가셨다. 예수님이 임종을 거두실 때의 그 어두움은 일반 견해로는 해명할 수 없는 기이한 흑암이었다. 폭풍우가 닥친것도 아니며 일식 현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이 흑암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흑암이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기 전 삼일 동안 온 땅을 뒤덮었던 바로 그 흑암과 같았다. 그때 그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에 뒤이어 마지막 장자가 희생되는 재앙이 연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희생당한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죽음을 면했으나 애굽 백성의 장자는 모두 죽게 되었던 역사의 내용이다. 갈보리 언덕 위의 흑암은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희생되었다고 알려주는 선포였다. 이 흑암의 선포가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엄한 경고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영적 교훈을 보여준다.
 
2. 예수님은 어두움이 오기 전에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가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그리고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여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또 육친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말씀하시며 아들의 가치 있는 죽음을 알려주셨고 아울러 제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시며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다(19: 26-27). 그리고 흑암이 닥쳐왔을 때에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잠잠히 계셨다. 예수님은 흑암 속에서 모든 사람의 죄악으로 인한 형벌과 저주와 쓰라림을 겪어야 하셨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는데(21:2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셨던 것이다(3:13).
 
3. 예수님은 흑암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계속하여 내가 목마르다”(19:28)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인간이 겪는 갈등과 고독과 쓰라림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Gk. 테텔레스타이)(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상업용어로 빚을 다 갚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죄악의 대가인 죽음을 받으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악의 빚을 다 갚아주셨다.
 
4. 예수님께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마치시고 돌아가시자 세 가지의 놀라운 사실이 발생하였다. 첫째,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갈라졌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상징이다(10:14-26). 둘째,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셋째, 로마 군인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지칭하여 이 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하였다. 이 말은 항거할 수 없는 진리를 증거하는 고백이었다.
 
* 마태복음 28장은 부활장이다. 예수님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 놀라운 사건은 지금도 믿을 수 없다고 하여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으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 되심을 입증하셨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구원의 주님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존재가치는 전무하다고 하겠다. 성경말씀은 부활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 예수님을 따르던 남녀 제자들은 부활사건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을 찾았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성급하게 취급되었던 예수님의 장례절차를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때는 오후 3시였으며 그때부터 일할 수 없는 안식일이 시작되기까지는 약 3시간 정도만 남았으므로 여러 가지 수속절차로 시간을 쓰고 나서는 예수님의 시체를 바로 그 동산의 무덤 속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에 여인들은 무덤과 시체의 장소를 확인하여두고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가(23:56)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에 다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의 향품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사용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아셨던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옥합의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을 때에 이 여인이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6:12)고 해설하여 주셨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완전한 장례절차를 받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온전한 죽음이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다.
 
2. 예수님의 부활은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써 말씀이 곧 생명이요 빛이요 권세와 영광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부활의 첫 새벽에 하늘로서 내려온 천사는 그는 그의 말씀하시던 그대로 살아나셨느니라”(28:6)고 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을 권위 있게 선포하였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고 알러주신 대로 우리들이 말씀 안에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격체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우리들의 신앙은 부활신앙이다.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일이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말씀으로 다시 그들의 믿음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여주셨다. 그 후로부터 제자들의 믿음은 반석과 같이 견고하여졌다.
 
3.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몇 시에 다시 살아나셨는지 그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으나 말씀하신대로 제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의 육중한 돌을 굴러내었다(28:2). 무덤 문이 열렸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오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배려였다. 예수님의 신비하신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완전한 몸이므로 문으로 드나들 필요가 없다. 또 예수님이 입으셨던 수의와 머리를 싸매었던 수건은 단정하게 접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하여 전혀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질서정연한 가운데에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느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만백성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4.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4:36) 하시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을 위로하여 주셨다. 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28:3), “놀라지 말라”(16:6)고 위로하여 주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형편에 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 마태28:19-20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sion)에서 명령하신 명령형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Make disciples.)라는 한 개의 동사만 가지고 있다.
  ”가서“(go), "세례를 베풀고”(baptizing), "가르쳐“(teaching), "지키게 하라”(to obey)는 네 가지 사항은 원어에서 명령형 동사가 아니고 진행형 분사형으로써 “ . . .을 하면서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면서,” “세례를 베풀면서,” “가르치면서,” “지키게 하면서,” “제자를 삼아라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제자 삼기를 위한 사역이 우리의 독특하고도 유일한 사역 목표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19.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20.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