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방을 향한 복음선교의 시작 (행11-12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 사도행전을 원시안으로 관찰하는 안내는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담당하고 있다. 예수님의 증인들의 활동(교회의 성장)이 삼 단계라는 뜻이다.
첫째 단계(행1-6장):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전도활동으로 베드로가 중심인물이다. 이미 1:8에 언급된 대로 오순절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놀라우신 초월적 능력은 제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각 나라의 언어로 각국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들려지고 영접되었고 “많은 기사와 표적들”(many signs and wonders)이 나타났다(2:43; 4:30; 5:12).
둘째 단계(행6-8장): 사마리아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전도활동으로 스데반과 빌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데반 역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여”(6:8)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려 유대인의 마음에 회개의 열매를 맺는 씨앗을 뿌리고 후에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열매를 맺는다.
행8: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셋째 단계(행9-28장): 이방인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선교활동으로 바울이 중심인물이다. 9장에서는 사울(바울)이 소개되고, 9-11장에서는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치고 도르가를 살려냄으로써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며, 11-12장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 선포의 장을 열어줌으로써 바울의 선교가 열리는 전환점(transition)을 제시하며, 13-28장에서는 바울의 선교와 목양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이방선교를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린다. 행15:12-15을 보자.
행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위의 삼 단계 진행을 둘로 더 크게 나누어서 행12장까지는 유대인의 문화적 배경(Jewish Culture)을 중심으로 전도하고, 행13장부터는 이방인의 문화적 배경(Gentile Culture)을 중심으로 선교하는 내용이라고도 보게 된다.)
* 사도행전 11-12장에서는 이방을 향한 복음의 전환점(transition)이 심도 있게 전개된다.
첫째, 행11:19-30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안디옥에까지 퍼지는 내용을 담고 있
둘째, 행12:1-19의 기록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셋째, 행12:20-23의 기록은 헤롯 아그립바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넷째, 행12:24의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는 사도행전 전반부가 끝맺는다.
* 행11:19-30에는 안디옥 교회의 발생요인과 중요성에 대한 기록되어 있다.
1. 행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란 언급은 행8:3-4의 기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NIV. wherever they went; KJV. went every where)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라는 기록과 관련이 있다. 또 8:1에서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 행11:18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받아드리게 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1:18)고 모두 수긍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이방 로마인에게 전도한 내용이지만 이것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며 개인전도의 차원에서의 복음의 확산이다.
나. 이제 본격적인 이방 지역에서의 이방인을 향한 전도는 안디옥에서 발생하게 된다. 박해로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란 말은 디아스포라에 산재해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두루 다니며”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wherever) 또 “모든 곳에" (every where) 복음을 전하였다.
다. 그런데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19) 라는 기록에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언어와 조상과 생활풍습이 동일한 자기들의 혈족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다. 당시의 안디옥의 인구는 약 500,000명 정도 되었고 5%의 유대인들(약 25,000명)이 자기네들의 구역에 모여 살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는 비록 지역은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이지만 이방인을 대상으로 행한 전도가 아니다.
라. 행11:20에는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Greeks)에게도 말하여 예수님을 전파하였다”는 사실이 이방지역에서 이방인을 향한 선교였음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 “선교의 사명”을 “성령님의 주신 은사”로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유대인 5%를 제외한 95%의 이방인들(450,000명)을 선교대상자로 삼았던 것이다.
마. 안디옥(현재 터키의 Antakya,안타키아)은 수리아 지방의 수도이며 거대한 상업도시이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삼대도시중의 하나로 첫 번째가 로마(유럽)이며, 두 번째가 알렉산드리아(북아프리카)이며, 세 번째가 안디옥(소아시아)이었다. 지중해 바다에서 20mile 내륙지방에 위치하였고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대로를 수축하여 상업(상품) 교역의 중심지였다. 세계 각 지역의 백성들이 혼합하여 살던 “인종융합”의 현장이었다. 건축이 발달하였고 마케도니아의 선박들이 이곳에 인접한 셀류시아(Seleucia) 항구에 상품을 실어 날랐다. 이곳에도 알테미스 신전, 아볼로 신전 등이 있어서 잡신과 귀신을 섬길 뿐 아니라 다프네(Daphene)라는 사원에서는 축제와 예배를 겸한 사교의 의식을 치루면서 창녀들과 더불어 음란과 성적타락의 온상으로 악명이 높았다. 헬라 문명의 어두운 면은 이곳에서도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이런 곳일수록 복음은 요구되었다.
바.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에서 온 몇 사람의 헬라파 히브리인 전도자들의 선교적 사명과 실천으로 인하여 “순수한 이방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 전도자들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메시아 히브리인”이었으나 주님께서 별도로 예비하여 사용하신 인물들이다. 이방선교의 기틀은 이들 “선교사들”(?)이 마련하여 놓았던 것이다. 이들의 활동을 “CCM 선교”라고 명칭을 부여한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CCM”이란 “Cyprus Cyrene Mission”의 첫 글자만을 따낸 약자다. 이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방인들)이 믿고 주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사.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보내어 실상을 확인하게 되었다(22). 바나바는 아름다운 신앙의 소유자이며 “사도”로 불려 질 정도로(14:1, 3, 4, 5) 훌륭한 주님의 제자였다. 바나바는 사울보다 연장자이며 어떤 면으로 보아도 사울보다 신앙적 연륜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교의 현장에서 바나바는 언제나 사울(바울)을 앞세우고 자기는 바울의 뒤에 있었다. 그의 생애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인데 별명으로 “바나바”(Barnabas: Son of consolation, or Son of encouragement)라고 불렀다. 그는 구브로(Cyprus)에서 온 레위(Levite) 족속의 사람이며 헬라파 유대인이다(cf. 행4:36; 9:27; 11:22-29; 고전9:6; 갈2장; 골4:10).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행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 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고전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 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갈2: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골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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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행11:25-26에서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나바는 사울(바울)이 “안디옥 이방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지도자임을 실감하고 사울을 초청하여 “안디옥 교회”의 기틀을 든든하게 세우게 된다. 사울을 초청한 이유는
첫째, 교육의 기초를 세우는 지도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사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일 년 동안 가르치면서 신앙의 삶 속에서 신학과 선교의 체계를 확고하게 세워놓았다. 따라서 사울(바울)의 신학은 안디옥 교회에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제자의 생활을 배우는 지도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사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칠 뿐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배운 삶을 실천하고 큰 무리를 섬기는 지도자로서의 헌신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울의 배움(learning)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먼저 되어야 하였으며 그 영향이 무리에게도 끼쳐져야 하였다. 사울(바울)의 신앙적 체계는 이때 바로 정립되어서 이방인들이 바르게 신앙을 키웠다.
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는 구절에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이라는 명칭은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명칭은 안디옥 교회의 “많은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서 부른 이름이다. 결코 유대인들이 불러준 이름이 아니다.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을 보는 주위의 사람들 즉 불신자들이 “별명”으로 부친 이름이다. 그들은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배울 것을 배우고 알 것을 알고 실천할 것을 실천하는 제자들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른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의 복합 구조에서 발생한 용어다. “그리스도”(Christ)란 히브리어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다. "인“(-ian)이란 접두사는 라틴어의 ”-ianos" 즉 “. . .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쓰인다. 따라서 “Christianos”(Latin)에서 “Chtistian”(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the follower of Christ )즉 “그리스도인”이 나타난다. 메시아의 사상과 가르침을 현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저절로 나온다. 성경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용어는 세 번만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을 추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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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Christian) 용어의 성경기록 (3회)
(1) 행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 행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차. 사도행전의 기록들은 주후 64년경 이전의 내용들이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은 이때에 순교 당하였다. 요한 계시록이 쓰여지기 이전에도 안디옥 교회는 계속 부흥하여 발전을 이루었다. 이때에 초대교회 교부(Apostolic Father)로 유명한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는 교회의 감독으로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능력 있는 복음 설교를 선포하여 수많은 교인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안디옥 교회의 교인이 약 10만명으로 놀라운 교세를 이루었다. 신앙적 영향력이 대단하여 당시 로마 황제 트라얀(Trajan)의 미움을 받았다. 황제는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내왕하여 이그나티우스 감독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 화를 내면서 황제숭배를 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이그나티우스를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머나먼 로마에까지 끌고 가서 원형극장에서 군중 앞에서 사자들의 먹이로 내어주면서 죽였다. 이때 이그나티우스는 덤벼드는 사자에게 자가의 손과 팔을 내어주면서 “이제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한다”(Now I begin to be a Christian!)고 소리를 외치며 순교하였다(주후 107년). 놀라운 신앙, 헌신, 승리의 죽음이었다. 그의 순교의 피는 씨가 되어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교인들은 몇 조각 남지 않은 그의 뼈를 모아서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면서도 각처에 산재한 교회들에게 보내는 “7편의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이들 서신의 내용에서는 신약의 진리가 반영되며 바울의 신학과 신앙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카. 행11:27-28에는 신약시대의 예언자들(Prophets)과 예언은사(the gift of prophecy)의 활동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오순절 날에 제자들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행2:4)고 하였다. 또 구약의 요엘 선지자는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8)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일어나 성령님으로 말하되(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 성령님의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고전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apostles)요 둘째는 선지자(prophets)요 셋째는 교사(teachers)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workers of miracles)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gifts of healing)와 서로 돕는 것(able to help others)과 다스리는 것(gifts of administration)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이라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타. 행11:29-30에서 안디옥 교회는 부조를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elders)에게 보냈다고 하였다. 사도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나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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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2장에서:
1. 성경본문의 구조자체를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본문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나 (구약 성경에 기록을 예로 들 수도 있다) 또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과도 어떤 평행되는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계시의 역사적 진전이란 약속과 성취라는 면에서 재현된다. 그러므로 성경 기사 자체의 앞 뒤 문맥을 잘 살피는 것과 또 구약을 예표와 원형으로 보고 본문 구성을 잘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J .B. Jordan은 Biblical Horizons」(1992년, 2월)에서 “베드로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글의 내용에서 “초대교회의 획기적인 발전 뒤에는 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의 죽음과 부활의 모티브가 있다”고 제시하여 계시의 역사적 발전의 구조를 설명하였다.
2. 베드로가 잡힌 사도행전 12장의 구조를 예수님이 잡히시는 기사에 비추어보면 흥미롭다.
가.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인 다음(12:1-2)에 베드로를 무교절일(유월절)에 옥에 잡아 가둔다(3절). 그런데 예수님이 역시 같은 절기에 잡히셨다(눅22:33).
나. 헤롯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되 유월절 다음에 재판에 회부하고자 하였다(행12:4). 사실 유대인의 유월절에는 죄수를 놓아주는 풍습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면(요18:39; 눅23:17) 헤롯이 베드로가 석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조되는 점도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렸으나 온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사실이다(행12:5).
3. 두 사건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왜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도록 하셨을까? 본래 유대인의 지도자는 예수님을 명절(유월절)에는 잡지 않으려고 계획하였다(마26:1-5). 그렇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대로 되어졌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기록 방식도 하나님의 인도하신 대로 되어졌다.
4. 베드로의 구출(exodus)이 예수님의 부활기사와 신기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는데, 구출된 베드로를 처음 만난 사람도 여자(로데)였다(행12:13).
나.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알린 것같이, 여자(로데)가 성도들에게 가서 베드로가 문 밖에 서 있다고 하였다(행12:14).
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과 같이, 교회(성도)도 베드로가 옥에서 나왔다는 여자(로데)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선을 잡수시기 전까지는 영으로 생각한 것과 같이(눅24:37), 성도들도 로데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가 베드로의 천사를 본 줄로 생각하였다(행12:15).
마. 마침내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니까(행12:16) 베드로는 그들을 조용히 시킨 후(행12:17),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시어 감옥을 나오게 된 것을 말하고(행12:17),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들을 전하라고 말한 후에(행12:17) 자기는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행12:17). 부활하신 주님도 찾아온 여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마28:10; 요20:18)고 하신 점과 유사하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나타나셨다가 떠나버린 점도 유사하다. 주님의 종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간 점을 이렇게 구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 예수님을 잡은 당국자들과 베드로를 잡은 당국자들에 대한 성경말씀의 기록이 흥미롭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12장 18-19절에서 보는 대로 지도자들이 각각 그 일어난 일에 대하여 크게 소동하였으며, 또 각각 파수꾼들을 어떻게 처우하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종은 주인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는 진리를 성경 여러 곳에서 배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 종과 주인이 당한 일이 위와 같이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5. 구출의 계시적 성격을 보자.
가. 주의 천사가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와서 일어나라고 깨웠다. 그때 쇠사슬이 풀리자 그는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고 따라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천사를 따라 파수꾼을 지나서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 천사는 그를 혼자 남기고 떠나버렸다(행12:6-10). 이는 감옥에서의 구출이다. 계시역사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 탈출은 성경의 여러 구출 사건을 재현하는 측면에서 닮은 면이 있다. 즉 구출이 계시역사적 성격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롯이 주의 천사의 인도로 소돔에서 탈출한 것(창19)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천사의 인도로 출애굽(exodus: 출12-14장)한 것이 바로 베드로의 구출에서 다시 실현되고 있다.
나. 이 사실들은 누가복음 9:28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탈출(exodus ‘별세’)과 유사하다.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그 내용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실 예수님의 탈출(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뒤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exodus)한 것과 맥이 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출애굽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역을 내다본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출애굽의 성취이다. 부활은 사망의 굴레로부터 구원이다. 성례식(성찬과 세례)은 내용적으로는 뒤로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또 앞으로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계19장)를 내다보는 의식이다.
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감옥에서 주님의 인도로 이끌려 나오는 출옥은 곧 부활과 통한다. 한편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연결되어 야고보의 실제적 죽음과 베드로의 상징적 죽음(베드로의 옥에 갇힘)이 이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탈출(exodus)로 야고보는 하늘로 들어갔고, 반면에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탈출로 베드로는 감옥에서 나와 복음사역으로 들어갔다.
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헤롯과 유대인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신 줄을 깨닫는다(행12:11). 이 사건에서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구약 시대의 애굽인들과 소돔인들의 자리에 처하여 있었음을 보게 한다. 그리고 교회는 참 이스라엘의 자리에 처한다. 교회(참 이스라엘)에 속한 베드로가 유대인의 손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계시역사의 발진이라는 면에서 이해하게 된다.
마. 그런데 이러한 구조가 계시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계시역사적 구조 파악은 성경 신학에서 다루는 사항이다.
6. 교회의 새로운 구출
가. 그런데 사도행전 11-12장에는 또 다른 넓은 의미의 구출도 일어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선지자 아가보가 안디옥에 올라와서 성령으로 말하되 온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한다(행11:27). 베드로가 구출된 시기가 바로 이 흉년 때에 일어난 것이다. 여기 이 흉년을 요셉당시의 흉년과 연관시켜 보자. 두 흉년 사건은 모두 미리 예언되었다. 이 때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음식)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다. 이는 히브리 사람(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점과도 서로 통한다. 물론 전자는 음식(부조)을 가지고 내려가고 후자는 식량을 구하러 내려가지만 음식관계로 내려가는 점이 같다. 결국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애굽)에 있는 동안에 헤롯(바로)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넣는다.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감옥(역시 애굽)에서 주님께 이끌려 구출을 받는다. 예루살렘(애굽)의 군대(파수꾼)는 죽임을 당한다. 또 헤롯(바로)왕도 죽임을 당한다(행12:19-23). 그리고 이 행12장의 기사는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감한다(행12:25).
나. 계시 역사를 중심으로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 기사를 되돌아보자. 사도행전의 예루살렘은 원형으로서 곧 애굽이 예표론적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볼 수 있다(계11:8). 흉년의 재앙이 예루살렘(애굽)에 왔을 때, 고센(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가져온 부조로 도움을 받는다. 사실 출애굽기 8:22 이하의 기록대로 마지막 7가지재앙은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교회)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헤롯(바로)왕이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다가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행12:23). 교회는 안디옥으로 돌아온 사울이라는 사도에게 구출(exodus)되어 계속 이어간다. 그리하여 안디옥은 교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며 선교사들이 이 안디옥에서부터 파송된다(행13:1-3). 예루살렘(애굽)에서 나온(exodus) 이후에 세계(가나안) 정복이 뒤따른다.
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사라지심(승천)으로 예루살렘에 복음의 선교가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별세(exodus)로 예루살렘과 유대가 정복되었다. 이제 이와 나란히 베드로의 갇힘과 구출 그리고 사라짐이 역시 세계를 향한 복음의 선교가 시작된다. 예수님의 별세(exodus)로 베드로가 예루살렘과 유다에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고,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구출(exodus)로 바울이 세계 복음 선교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와 같이 교회의 새로운 구출(new exodus)은 계속 이어진다.
7. 이제 사도행전 전체의 짜임새를 살펴보자.
가. 베드로의 사역: 예수님의 복음전파, 가르치심과 제자 양육, 고난, 죽으심과 부활 등의 사역은 먼저 유대인에게 적용되었다.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적용되고 다음은 헬라인에게 적용되었다(롬1:16, 2:9). 베드로가 이 유대인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었다. 베드로가 유대인을 향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재현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바와 같이 복음을 전파한다. 그는 제자를 양육하되 스데반과 빌립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를 양육하여 파송한 바와 같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길로 간다. 그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투옥되며 다시 구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은 예루살렘과 유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지역의 사역은 구약(Old Covenant)적인 형태를 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복음전파를 중심으로 볼 때 이 단계는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같은 수준에 영입되고 있다. 여기에서 복음의 반대자는 복음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의 해산의 고통으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태어난 것같이, 이 유대인의 교회가 해산하는 고통으로 세계의 교회가 일어나게 되었다. 역시 주의 종의 투옥과 출옥 즉 사망과 부활이 교회발전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출발을 보여 주면서도 이방인이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오는 과정도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교회는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요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약적인 형태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나. 바울의 사역: 예루살렘과 유대인 교회의 중심은 베드로이다. 베드로가 감옥에 들어가고 주님의 인도로 다시 구출됨으로 복음의 횃불은 바울에게로 넘어간다.
(1) 사도행전 12장 직후에 사울은 바울로 되어 사역을 감당한다. 안디옥은 새로운 복음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이방인을 위한 세계 선교가 시작된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의 횃불을 야고보에게로 넘겨준다. 이 야고보는 헤롯에게 죽은 사도(요한의 형제, 행12:2)가 아니라 장로이다(행12:17, 15:13). 그리고 이방인 선교의 횃불은 바울에게로 넘어간다. 이제 예수님이 사라지듯(승천)이 베드로도 사라져 다시 등장하지 아니한다. 이 단계에서는 바울이 가장 중심된 인물이고 야고보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바울은 사도이고 야고보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배 안에서 태어나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로 되어간다. 이 단계에서의 교회의 대적은 복음을 거역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복음을 바로 받지 못한 유대인 즉 유대주의자들이다. 이 단계의 교회의 중심지는 두 곳이다.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바울이 지도자로 활약하는 안디옥이요, 그 다음은 야고보가 지도자로 활약하는 예루살렘이다. 이 두 중심지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초대교회는 양극화를 극복하는 중에 있다. 그리고 바울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지 그가 제일먼저 회당을 방문한다. 그러나 주된 관심의 대상은 예루살렘에서 이방 세계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2)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을 재현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양육하여(디모데와 디도)서신을 그들에게 보낸다. 바울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른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예수님과 베드로가 심판 받은 바로 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풀려 나온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인 교회에 함께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에 있고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이 유대인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완전히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베드로가 예루살렘-유대인 회의 초점인 것과 같이 바울도 안디옥에 중심을 두었으나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의 초점이다. 베드로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가 다시 구출되어 나옴으로 복음의 횃불이 바울에게 인도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가 다시 구출되어 나옴으로 신약의 횃불은 다가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융합된 교회로 인도되었다. 이리하여 교회의 변천 및 변혁은 완료되었다. 주의 종들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풀려나오는 것에서 볼 수 있는 사망과 부활의 모티브가 교회 발전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 천국(교회)의 확장: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계시역사의 발전에서 네 단계로 임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동일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 안에 포함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며 요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확장하여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으며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제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과 사역으로 하나님나라가 임함을 본다. 제2단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방인에게 사역을 시작한 유대인 교회의 핵심 지도자인 베드로의 사역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제 3단계는 세계교회의 지도자인 바울의 사역에서 볼 수 있는데, 바울이 인도하는 교회는 여전히 유대인에게 나아가면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신자가 하나로 융합하는 길을 모색하는 중에 있다. 마지막 제 4단계는 예루살렘 멸망과 바울이 죽은 다음에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는 단계인데 이때는 양극화 현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단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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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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