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령님을 보내주신 예수님 (행1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사도행전 제1장 8-11절 [개역 개정]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They were looking intently up into the sky as he was going, when suddenly two men dressed in white stood beside them.)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Men of Galilee,” they said, “why do you stand here looking into the sky? This same Jesus, who has been taken from you into heaven, will come back in the same way you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 사도행전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하늘(the sky)을 자세히 쳐다보았다”(행1:11전)고 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나타난 두 천사들은 그러한 목격의 부당성과 부적절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into heaven)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into heaven)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후)고 하였다. “하늘(heaven)로 가신 예수님은 하늘(sky)을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피조세계의 하늘(sky)로 가시지 않고 창조세계의 하늘(heaven)로 가시고 승천하셨다. 창조세계의 하늘(heaven)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므로 이제 창조주 예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부터 그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받는다. 하늘(heaven)로 가신 주 예수님은 하늘(heaven)로부터 가신 모습(신비한 부활의 모습) 그대로 오시는 주님이시다. 아울러 주 예수님은 창조세계나 피조세계나 그 어느 곳이나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시다. 이 놀라운 진리의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은 “하늘(sky) 보기를 중단하고” 예루살렘 성내의 한 다락방에 돌아와서 “하늘(heaven)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의 대상은 33년 동안 하늘(sky) 아래에서 육신의 생애를 살았던 과거의 예수님이 아니며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 하여주시는 하늘(heaven)에 계신 예수님이시다. 차원이 다른 신앙세계로 그들은 들어가게 된 것이다.
* 돌아온 제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고(눅24:52)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행1:14)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복(기도)를 하시면서 하늘로 올려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주님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축복(기도)”가 그들을 뒷밭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눅24: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행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눅24:51에서 “예수님은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하였고 행1:11에서는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축복(기도)는 영원한 축복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늘”이라는 용어가 눈에 뜨일 정도로 강조되고 있다. “하늘”이란 무엇인가? 어디를 지칭하고 사용되고 있는 말씀인가? 우리들은 “하늘”이라는 용어를 분명하게 규명하여야 한다. “하늘로 올려지시고” 그 “하늘에 올려져 가심 그대로 오심”이란 것이다. 이 하늘은 우리가 육안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시적인 하늘이 아닌 것을 직감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활의 새 생명을 받으신 아들 예수님은 그 생명체를 가지고 아버지에 의하여 아버지께서 계신 하늘로 올려지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존재하신 “그 하늘”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다. 피조물인 인간을 도저히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곳이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피조세계에 속한 하늘에 불과하다. 창조의 하나님은 “그 계신 하늘에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하늘에서부터 인간의 하늘을 통과하여 우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서 산다고 할 때 사람이 사는 땅은 하늘(피조물)을 포함하고 사용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의 완성을 계시록 21장과 에메소서 2장에서 우리는 그 결국을 보게 된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엡1: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 뜻을 따라서 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행1:4) 하였다. 그들은 비록 전심으로 기도하였으나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는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자기들의 자의적인 뜻을 따라 가롯 유다를 애신하는 사도를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1:15-26). 맛디아라는 성도를 사도로 제비 뽑아 12사도의 반열에 참가시키고야 만다. 사도의 선택권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다. 결코 사람이 사도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기록 중에서 예수님은 사울을 불러 사도 바울이 되게 하시는 사건이 9장에서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신앙인들이 성령님의 임재와 가르침을 받는 사고와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영적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향상을 볼 수 있으며 신앙인의 새로운 변화(New Transformation)를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해답은 바로 “성령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용”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신앙인들에게 질문하였다. 그때에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는 답변을 하였다. 지금도 “성령 받았느냐?” “성령 체험을 했느냐?” “성령 받을 때 방언도 받았느냐?” “성령을 받으라!” 등의 표현을 한다.
* 성령님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위의 질문과 답변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님을 영접하였느냐?” “우리는 성령님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성령님을 어떤 사물을 또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이 여기는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님과 사람과 관계되는 용어를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 성령님과 관련된 중요한 성경기자는 요한과 바울과 누가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가지고 기존신학에서는 “성령론”의 상이성(다른 점)이 있는 것으로 설명을 한다.
- 바울신학(바울서신을 중심으로 하여)에서는 성령님을 “구원의 영”으로 전제하고 성령이 임함으로써 사람이 구원을 받고 아울러 교회의 일원이 되므로 구원 받은 자에게는 이미 성령의 임재가 있다는 것이다.
- 누가신학(특별히 사도행전)에서는 성령님을 “복음증거의 능력을 주시는 영”으로 전제하고 성도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주시는 분으로 해석한다.
- 요한신학에서는 성령님을 “보혜사”(Counselor, Comforter)로 전제하고 예수님을 변호하고 증거하여 성도에게 위로와 안위를 주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 요한의 보혜사의 영, 누가의 복음증거의 영, 바울의 구원의 영으로 성령님을 묘사한 것은 강조점이 다른 것뿐이며 실상은 “주님(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 성령님도 한 분이심”으로 성경 기자들의 견해와 주장은 결코 충돌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상항에 따라 적용된다.
*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성령님의 사역은 아래의 세 가지 “원어동사”에서 특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성령님의 내주”하는 것을 경험한다는 뜻으로 “성령님의 충만.”
“채운다”(Gk. pleroo)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joy and with the Holy Spirit.)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Brothers, choose seven men from among you who are known to b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둘째, 권위 있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능력을 부여 받은 뜻으로 “성령님의 채움.”
“채운다”(Gk. pimplemi)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셋째, “성령님의 세례를 받는다”는 동사로 이 말(Gk. baptizo)은 회심이나 내주와는 다른 뜻을 가지며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쓰여 진다. 아래의 네 그룹들은 성령님의 세례를 받음으로 그 대표성을 가지고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진다.
1) 2장에서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님의 세례를 받은 사실이 공식적인 교회로 인정된다.
2)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은 성령님의 세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3) 10장에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기 위하여 성령님의 세례를 베푸신다.
4) 19장에서 세례요한을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님의 오심이 실현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령님의 세례를 받는다. 사도행전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이러한 “성령님의 세례”는 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던 강력한 초자연적인 움직임이며 거대한 물결과 바람으로 퍼져나갔다.
* 예수님께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고 예언하신 이 사실을 베드로는 120제자들과 함께 오순절 날에 “성령님의 세례”를 받고 그 체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의 사겐 기록에서는 “성령님의 세례”라는 기록은 없고 “바람과 불의 임함”(came)과 “성령님의 충만함”(filled)이 기록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언이신 “성령님의 세례”를 그대로 반영하는 동의어로 여겨야 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령님의 세례”가 고넬료의 집에서 발생한 사실(행10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그 경험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하신 “성령님의 세례”(Gk. baptizo)를 그대로 오순절 날의 경험인 “임함”(came, 오심)과 “충만함”(filled), 그리고 고넬료 집의 경험인 “임하심”(came on them)과 함께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 이와 같은 맥락으로 2장, 8장, 9장, 10장, 19장의 성령님은 예수님의 예언하신 “성령님으로 세례”(baptized with the Holy Spirit)를 받으리라는 사실의 “성취”(fulfilled)의 실증들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세례”를 언급하기 위하여 누가는 다음의 7가지 동사들을 사용한다.
1)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는다(baptize).
2) 성령님을 부어주신다(poured out).
3) 성령님이 오신다(come).
4) 성령님이 위로부터 오신다(from above).
5) 성령님이 떨어지신다(fall upon).
6) 성령님을 준다(give).
7) 성령님을 받는다(receive).
*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위의 다섯 사례를 살피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의 세례(오심)”은 우리들에게 어떤 목적을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먼저 2장에서 성령님을 받는 사례가 1-4절에서는 제자들(120명)의 오순절 체험과 38-41절의 제자들(3,000명)의 성령체험의 두 가지다. 이 두 가지 사례들 중에서 어떤 것이 사도행전의 성령체험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 1-4절에서는 구원과 성령 받음 사이에 일정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견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 구원 얻기에 충분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었는데 성령을 받기까지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구원과 성령 받음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존재하였다. (이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멘지스(R. P. Menzies), 슈바이저(E. Schweizer) 최문홍 등이 있다.) 오순절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 바울,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구원과 성령 받음 사이에는 분명한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였다. 사도행전의 사례들은 구원과 성령 받는 것이 별개의 사건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3천명 제자들”의 체험 사건에는 성령이 임한 묘사도 없고 다만 회개하고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베드로의 설교 중에서(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말은 현재시제인데 반하여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는 말은 미래시제로 되어 있어서 믿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 38-41절에서는 3천명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들로서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견해다. 따라서 구원과 성령 받음을 동일시한다. (이 견해를 대표하는 자들로 제임스 던(J. D. G. Dunn), 막스 터너(Max Turner),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 존 스토트(John R. W. Stott) 최갑종, 이한수 등이 있다.) 3천명 제자들의 체험을 성령 받는 표준으로 삼으면 누구나 믿을 때 성령을 받게 되므로 구원과 성령 받음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없다는 것이다. 실상은 성령체험 이전에 제자들의 믿음과 구원에는 의문점이 있었으나 성령님을 받고나서야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 바울, 고넬료의 가정,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의 성령체험도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오순절 날의 성령님의 도래 (행2:1-4)
가.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율법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은 비로소 용서와 은혜의 복음을 맞이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이적과 능력을 목도하면서 점차 구주로 믿게 되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 베드로의 고백은 제자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었음을 증명한다(마 16:16). 예수는 그 믿음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다.
나. 오순절 날 성령강림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믿는 자가 받을 성령님에 대해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시고, 그 당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당부한 사실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신 것이며 승천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리라”(행 1:4)는 것이었다. 오순절 이전에 제자들은 불순종의 태도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구원 얻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라서 마가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다가 마침내 오순절 날을 맞이하여 120여 명이 성령을 받았다.
다.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그들은 이미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었다.
둘째, 그들은 예수의 약속을 의지하여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성경은 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 1:14)고 말한다.
셋째, 성령이 임할 때 분명한 표적을 동반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득할 정도로 그 소리가 컸다. 또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현상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임하신 것을 현상적으로 나타내 주는 증거였다. 이날 성령을 받은 자들은 전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표적을 경험한 것이다. 병을 고치는 등 여러 가지 능력과 이적은 성령이 임하기 전에도 나타났지만, 방언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비로소 나타난 현상이었다. 방언은 오순절 성령체험 때 뿐 아니라 이후 사마리아인들, 고넬료의 가정,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성령 받은 대표적인 표적으로 언급된다.
* 사마리아의 성령님의 도래 (행8:14-24)
가. 본문 9-11절에는 마술의 이교적 행위를 하는 시몬이 자칭 “큰 자”라 칭하며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빌립에 의해 복음을 듣기까지 그들은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면서 예루살렘교회의 안수집사였던 빌립은 유대인의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였다. 빌립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그의 말씀과 복음증거에는 더러운 귀신들이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쳐지는 표적이 나타났다. 그 결과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세례를 받았다. 마술사시몬도 이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아직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지는 않았다(16절).
나. 빌립은 “복음의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4, 5, 12절) 다른 사도들처럼 정상적인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했다. 성경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14절)고 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이 정상적인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이 정상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마리아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빌립 집사를 통해 표적과 기사를 동반하는 극히 정상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정상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의 사례는 구원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이 다른 사건임을 보여주는 예다.
* 바울의 회심과 성령님의 도래 (행9:1-18)
가. 율법 아래에서 살았던 바울은 예수님과 복음을 거부했으므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기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중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놀라 땅에 엎드렸고,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9:4-5) 하는 소리가 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눈이 멀고 말았다.
나. 다메섹 체험 후 바울은 예수님의 핍박자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예수를 만나는 순간 구약성경이 조명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빛으로 눈이 먼 바울은 다메섹에 들어가 유다의 집에 머물면서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이때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다메섹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는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계시를 받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울을 만났다. 이때 아나니아는 준비되어있는 바울에게 안수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눈을 뜨게 되고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다. 바울은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거부하거나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안수하였을 뿐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다. 바울의 회심과 성령 받음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고넬료 가정의 성령님의 도래 (행10:44-48)
가.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였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회당에 출입하는 경건한 유대교의 이방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제 구시쯤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계시를 받았을 정도로 신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자로서 아직 구원받은 자가 아니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그는 자기 가족과 일가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를 기다렸다가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절)라고 하면서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인정하고 베드로가 선포하는 말씀에 주목했다.
나. 고넬료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성령을 받는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44절)고 하였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할 때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셨다”(11:15)고 간증함으로써 고넬료 가정에 성령님이 얼마나 신속히 임하셨는가를 증거한다. 고넬료 가정의 사건은 믿고 구원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사도행전의 다른 예들과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넬료의 예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는 것과 성령님이 임하신 것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매우 짧았을 뿐이다. 성령님은 죄의 문제가 해결된 거룩한 영혼을 인 치시는 분이시므로, 고넬료의 경우도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체험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매우 놀랐다. 그들은 고넬료와 그 무리가 성령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대답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46절)는 말씀에 있다. 베드로 일행도 성령이 임하심으로 비로소 방언을 체험했던 사람들인데,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무리도 방언 말하는 것을 보고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알고 놀랐던 것이다.
* 에베소의 성령님의 도래 (행19:1-7)
가. 에베소에 살고 있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를 따랐던 요한의 제자였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여 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자. 누가는 그의 저서(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제자”(마데테스)라는 용어를 믿는 성도들인 일반 회중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였고(눅 6:17; 19:37, 행 6:1, 7; 9:1, 10, 19, 25, 26, 28, 38; 11:26, 29 등)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와 구별하였다.
나. 사도행전 9장에는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등장하는데(36절), 그녀는 병들어 죽어서 이미 시체가 되었다. 여러 제자들이 베드로를 청하여 결국 다비다가 살아났고, 그 결과 그 지역 많은 사람이 주님를 믿었다. 이때 베드로는 다비다를 살려놓고 그녀에게나 그녀가 살아난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용 용례로 보면 본문에 사용된 “제자”란 결코 비(非)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다. 따라서 에베소에 있던 열두 제자들은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인의 집단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채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성령님 받는 것에 대하여서는 모르고 있었던 신앙인들이었다.
라. 본문 19:1에서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고 하면서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과의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이 사도행전 18:24-25에 나타나고 있다.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the way of the Lord)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the way of God)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마. 여기에서 아볼로가 배워 열심히 가르쳤다는 “주의 도(25; 道, the way of the Lord)”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다는 “하나님의 도(26; 道, the way of God)”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볼로는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the way for the LORD)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a highway for our God)를 평탄하게 하라”는 구절을 세례 요한의 회개의 사역에 적용할 줄 알았고 또 열심히 세례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세례 요한은 누구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볼로는 “성령님의 사역과 은사”에 대하여는 아직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런 사실을 바울 사도에게서 배우고 아볼로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도”에 대하여 해설하여 주었던 것이다.
바. “도”(道, the way; Gk. hodos)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율법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인가? 바울의 기록을 보면 그가 “그 도(the way)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도”(the way)라는 것은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명칭”이었다. 아볼로는 그 “도”(즉 복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성령님의 세례(오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2절)고 묻는다. 여기서 ‘너희가 믿을 때’라는 말은 ‘믿다’의 분사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흔히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다. 바울은 그 제자들이 가진 믿음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았고 단지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님으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한 요한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예수님이 바로 요한이 말한 그분이라고 가르쳐주었다(19:4). 제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나서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나서 성령님이 임하시도록 안수한다. 왜 바울이 안수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이 임하셨는가? 이는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이 결코 동일체험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왜 그들을 향해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일까? 바울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을 가지고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회심과 성령체험을 시간적 간격을 두고 경험한 바울 자신은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성령 받은 사건을 기억하였고 그가 가는 곳마다 할 수만 있으면 안수하여 성령님을 받게 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확실한 체험이 없다면 반드시 성령님 받은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믿음이 있는” 에베소 제자들에게도 “성령님을 체험했느냐?”고 물었다. 바울은 구원받은 것을 또한 성령님의 오신 증거로 받아야 한다고 그의 여러 서신에서 나타내었다(고후1:22; 엡1:13; 4:30). 12명의 제자들은 바울의 안수로 성령을 받고 방언과 예언을 하는 표적을 동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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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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