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12.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행15-18장)

12.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15-18)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6:10).
 
* 사도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의 일정(15:39-18:22)은 다음과 같다.
안디옥 ->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의 갈등(15:37-39):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로 전도 나가다) -> 더베, 루스드라(15:40-16:1) -> 루스드라에서 디모데의 합류(16:3) -> 드로아(16:6-8) ->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봄(16:8-10) -> 빌립보(16:11-12) -> 빌립보에서 루디아와 간수의 회심(행전16: 14, 33) -> 데살로니가(17;1) -> 데살로니가에서의 강론(17:2) -> 베뢰아(17:10) -> 아덴에서의 아레아바고 설교(행전17:22) -> 아덴, 고린도(행전18:1) -> 16개월 동안의 고린도 사역(18:1-11) -> 에베소(18:19) -> 예루살렘(18:22) -> 안디옥(18:22).
 
* 사도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15:39-18:22)은 그 계획과 시작부터 험난하였다.
. 사도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15:36)고 말하였을 때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였다”(15:37)고 하였는데 이미 바나바는 마음으로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을 결정해버린상태에 있었다. KJV을 보면 “Barnabas determined to take John"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바나바는 바울과 전혀 아무런 의논도 없이 마가의 동행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바나바의 생각이 지혜롭지 못하다”(NIV. not wise), "좋지 않다“(KJV. no good)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심한 다툼”(NIV. such a sharp disagreement; KJV. the contention was so sharp)이 생겨 결국 갈라서게”(NIV. parted; KJV. departed) 되었다(15:37-39). 선교동역자 두 사람이 마음과 행동하나로 묶지 못하여분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자기 고향 구브로 쪽으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자기 고향 다소 쪽으로 향하여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 선교의 앞길에는 예상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데 선교인들 사이에 사람의 주장과 생각으로 인한 갈등으로 평안한 마음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라는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글과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바나바는 사람 중심의 사역”(man oriented ministry)을 하였고 바울은 목표 중심의 사역”(goal oriented ministry)을 하였다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모든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특수성을 따르는 것이 상례이며 또 사람은 모든 기능을 다 가지고 일을 수행할 수 없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 떼 제 자리에 알맞은 일과 알맞은 사람이 맞물려 돌아가려면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의존하면서 나가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바울이나 바나바는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하심으로 사역하는 선택된 종들이다. 저자 누가는 이 두 제자들은 두 사도”(the apostles)라고 표현하며 존경하였다(14:1-5; 4). 이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의 약점을 들어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들의 회개와 화해가 성도로서 아름다운 모범이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바울은 바나바와 화해를 하였다는 증거를 남기고 있다.
 
고전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4: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사도바울은 사람의 격한 감정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 됨을 절실히 깨달았다.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성도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보여주신다.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13: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 라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바나바가 선교동역자로 선택한 마가 요한은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적 배경과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천사의 안내로 출옥한 베드로는 마리아의 집으로 직행하였다.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12:12)고 기록된 대로 마가의 어머니는 자기의 큰 저택에서 초대교회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역할을 한 존경의 대상이며 베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린 신앙인이었다.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마가복음의 저자이며 복음의 증인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배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14:51-52)라는 기록에서 자기를 가리키고 있다. 마가는 솔직하게 자기의 연약한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서 마가는 수종자”(13:5, 협조자)로 동행하였으나 끝까지 수종, 섬김, 협조를 못하고 귀향하는 연약함도 보여주었다. 바울은 이러한 청년에 대한 실망감과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셨다. 첫째, 그는 바나바와 함께 쓰임을 받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제2차 전도여행으로 구브로로 향하여 나아갔다. 둘째, 그는 바울과 함께 쓰임을 받았다. 바울은 마가가 유익한 종임을 깨닫고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라고 디모데에게 편지하였다. 결국 마가는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힌다. 셋째, 그는 베드로와 함께 쓰임을 받았다. 마가는 베드로와 깊은 동역자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벧전5:13)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알려준 예수님의 사역은 마가복음에 크게 반영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 바울이 선교동역자로 선택한 실라”(Silas)실루아노”(Latin) 라는 이름으로도 서신들에 나오는 동일 인물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존경 받았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문 서신을 안디옥에 전달한 인물이다. 또 바울의 서신과 베드로의 서신에 기록되었고 서신을 대필하는 중요한 사역도 감당하였다. 그의 기록을 보자.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고후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안디옥 교회를 위시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세워지는 모든 이방교회를 향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서 공의회의 결정에 도움을 받아 복음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대인의 방해를 의식한 그들은 제1차 전도여행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복음의 진행상황을 알기 위해서 재방문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때 일어난 사역자들 사이의 불화와 슬픔을 안고 사도바울은 안디옥을 떠나 소아시아 지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바울의 계획과 의도와는 다른 선교의 차원이 발생하리라고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도바울에게 환상으로 제시되었고 마게도니아로 인도된다. 이로 인하여 사도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등지에 이르는 제2차 선교여행을 3년간에 걸쳐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교여행이 개인적인 욕심이나 명예나 이권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영광과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라는 선교의 사명을 알고 있었다.
 
* 사도바울은 실라와 함께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다. 디모데는 소아시아 출신 청년으로 경건한 유대인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신앙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고 유대인의 전통과 규례 등의 학문적 조예가 있었다. 바울의 일차 전도 여행 때에 전파된 복음의 영향으로 그 지역에 교회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로 그의 온 가족이 믿고 제자가 되었다. 그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이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 장차 유대인 출신의 형제들에게도 걸림이 되지 않고 좋은 사역자로 섬길 수 있도록 하였다.
 
* 사도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일행이 되어 소아시아 지방을 계속하여 전도대상지역으로 삼고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을 저자 누가는 강조하고 있다.
 
첫째,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16:6).
둘째,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8).
셋째,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는데 마게도니아 사람이 바울을 초청하면서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였다(9).
 
. 전도자들은 자기들의 계획대로 전도를 진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실책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다. 그는 행16:36에 기록된 계획을 따라서 제1차 전도여행의 대상지를 목표로 삼고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뜻을 관철하면서 진행하고 있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고 있는 제자일지라도 이와 같은 실수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인데도 전도자는 자기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양 밀고나가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북쪽을 향하여 부르기아(Phrygia)와 갈라디아(Galatia) 땅을 계속 통과하였다. “They were forbidden of the Holy Ghost to preach the word in Asia"(16:6). 바울은 왜 성령님께서 금하시고 허락하지 않으시는 아시아에서의 전도(설교, 말씀사역)”을 강행하고 나갔을까?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의지하고 따랐어야 하였는데 앞을 멀리 못보고 실수하였던 것이다.
 
. 이제는 무시아(Mysia)에 이르렀고 계속하여 동북에 위치한 비두니아(Bithynia)로 진행하여 러시아의 북해(Black Sea)를 향하여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제는 성령님이 만류하시지(forbidden) 않고 예수님의 영”(the Spirit of Jesus, 7)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영몹시 괴로워하시며 만류하셨다”(suffered them not)고 하였다. 시야가 가려진 바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동쪽으로 향하여 가던 선교일행의 발걸음은 서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드로아(Troas)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의 목표에는 혼선이 오고야 말았다. 자기들의 생각으로는 큰 실수로 드로아에 도착한 것임을 의식하게 되었다.
 
. 그러한 가운데 어둡고 캄캄한 밤이 오고야 말았다. 갈수록 상항이 어려워져만 간 것이다. 이러한 난국에서 바울은 환상”(a vision)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환상은 하나님께서 계시(revelation)의 일환으로 보여주시는 지시와 인도의 일환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이러한 환상”(26:19) 중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때에 영적 각성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저자 누가는 환상의 기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예들을 보자.
 
2: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vision)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vision)을 보았다 함이라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vision)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vision)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in a vision) 하시거늘
  10: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vision)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10: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vision)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9. 베드로가 그 환상(vision)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11: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vision)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vision)을 보는가 하니라
  16:9. 밤에 환상(vision)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vision)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8:9. 밤에 주께서 환상(vision)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vision)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 성령님과 예수님의 영의 제지를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환상”(vision)을 보았을 때에 바울은 드로아(Troas)에 도착한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6:10).
 
. 우리는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느끼게 된다. 특히 사도행전 16장에는 성령님(6), 예수님의 영(7), 하나님(10) 등의 표현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교의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게도냐 환상이 역사상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마게도냐 환상으로 말미암아 유럽 문화와 문명의 역사는 세계화의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 바울이 환상을 본 이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16:10)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복수대명사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16:10, 10, 11, 13, 15, 16, 17)라는 기록 내에는 바울, 실라, 디모데의 선교 팀에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포함되어 함께 사역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중에서 빌립보에서의 사역은 큰 비중이 담겨져 있다. 마게도냐는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고장이고 빌립보라는 성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의 이름에서 지어진 것이다.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 졌으나 지리적, 정치적인 요인들을 고려할 때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 사도바울의 선교원칙 중의 하나는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그곳을 기점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빌립보 성에 도착한 바울의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지 못하였다. 회당이 없으면 회당 찾기는 빨리 중단하여야 한다. 자기들의 선교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야 한다. 그들은 적합한 기도처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던 중에 바울 일행은 강가에 나갔다가 거기서 일단의 여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의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God-fearer)는 루디아로써 마음을 이미 열어 놓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청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루디아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여 놓으신 유럽 대륙의 처음 열매였고 그녀는 복음의 씨알이 되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마음 문이 열렸을 때에 전도의 열매를 보게 된 것이다.
 
. 루디아는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She and the members of her household were baptized. 16:15)고 하였다. 구원의 사역이 그녀의 가정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잘못 해석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루디아는 독신 여성으로써 큰 사업을 운영하여 많은 남녀 사환과 종을 거느렸다. 루디아의 신앙은 그녀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복음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그녀는 바울의 선교 팀을 모두 초청하여 그녀의 집에 유하도록 강권하여 머물게 함으로써 그들은 여행에서 지친 여독을 풀 수 있었고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 빌립보 교회는 설립자인 사도 바울에게 일관된 존경심과 충심을 보였으며(1:3-5), 바울 자신도 빌립보 교회에서만 재정적 원조를 허락할 만큼 그 성도들을 신뢰하였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빌립보서만큼 바울의 기쁨을 전달하고 있는 서신도 없다. 빌립보에서는 바로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어 유럽선교의 큰 힘이 되었다.
 
.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찾지 못하여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치는 그의 선교원칙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여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후에 데살로니가(17:1), 베레아(17:10), 아덴(17:17), 고린도(18:4), 에베소(19:8)에서는 회당사역을 계속하여 수행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 빌립보에서 사도바울과 그의 일행은 기도하는 곳으로 가던 중에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이득을 제공하는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귀신 들린 여종은 선교 팀을 향하여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16:17)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며칠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괴롭게 하였다.
 
. 사도바울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와 능력이 있다. 바울은 왜 그들을 괴롭히는 귀신을 내어 쫓지 않고 몇일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하여 두었을가? 전도자 바울의 자세는 이제 모든 선교활동을 자기들의 생각과 선교원칙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과 지시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지시와 감동으로 사역을 수행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괴로움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러 날 동안에 바울 선교 팀의 소식은 귀신들린 여인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에게 들려진 것이다.
 
. 하나님의 정하여주신 때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게 된다. 사도바울이 점치는 귀신을 내어 쫓는 내용은 이러하다. “바울이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6:18).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과 더불어 수많은 무리가(16:22)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빌립보 감옥에 구금하게 된다.
 
.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감옥에서 자유의 몸이 된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내에 있는 동료 죄수들과 간수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감금된 것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빌립보서에서 언급한다(1:12). 특기할 것은 로마의 시민권자인 바울과 실라가 우리 로마 사람들”(16:21)이 받지 못할 풍습을 전한다는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주인 내외)의 고발을 일거에 제거해버리고 오히려 로마의 고위 계층과 시민들에게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빌립보 옥의 간수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드린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16:30)라고 문의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는 복음 제시를 받는다. 이러한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16:32)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간수는 그와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였다”(16:33, 34)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그와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각자의 개인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
 
*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몸에 질병을 가지고 다니는 육신의 삶이 고달픈 인생이었다. 그러한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과 또 다른 민족을 향하여 그들이 원하지 않는 복음을 담대히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는 고찰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그가 전하는 복음과 메시지를 통하여 교회가 일어나고 믿음의 지체들이 일어나며 복음이 확장되어 간다는 놀랍고 경이로운 사실 앞에 우리는 감동과 역사와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을 바라본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사도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말하며 순종으로 일관했다.
 
* 사도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에서 특히 아덴의 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였으나 큰 열매는 맺을 수 없었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 굳혔다.
 
* 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고린도는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온갖 부패와 비행들이 만연한 도시였다. 그래서 가장 부패된 모습을 가리켜 고린도인들의 짓거리라는 헬라어 표현이 있으며 현대영어에서도 패륜아를 가리켜 고린도인”(Corinthian)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역을 통해 복음 전도 사역이 미궁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 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 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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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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