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6일 금요일

11. 모범적인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행15장)

 11. 모범적인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15)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님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5:8-9)
 
* 15:1-35에는 예루살렘 공의회(The Council of Jerusalem)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의 요지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1. 15:1-4: 공의회에 제기된 문제점
2. 15:5-12: 공의회에서 토론된 내용
3. 15:13-21: 공의회에서 내려진 결론
4. 15:22-35: 공의회에서 보내진 공문
 
* 공의회에 제기된 문제점(15:1-4):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1).
 
1. 문제는 이방교회의 중심지인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발생초기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수많은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큰 역사를 이루었다. 사도행전 11장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the good news about the Lord Jesus)
    21. (예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예수님)께 돌아오더라 (The Lord's hand was with them, and a great number of people believed and turned to the Lord.)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So for a whole year Barnabas and Saul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great numbers of people.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at Antioch.)
 
. 안디옥 교인들은 유대교의 배경이 전혀 없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였다.
. 안디옥 교인들은 구약성경말씀(LXX, 칠십인역 구약성경)에서 직접 예수님을 배웠다.
. 안디옥 교인들의 큰 무리제자들”(disciples)이 되었고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고 불리어지는 초대교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유대인에게는 이러한 호칭이 없었다.
. 안디옥을 향한 CCM(Cypress Cyrene Mission)선교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11:21)라는 기록의 원어에서 함께 하시매”(with)“meta"(Gk)가 접두어로 사용되면 축복“(blessing)을 의미하고 ”epi"(Gk)가 접두어로 사용되면 징계, 형벌”(punishing)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meta"로 기록되어 있어 CCM선교는 예수님의 축복이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15:1에서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Some men came down from Judea to Antioch)라는 표현에서 유대인들”(Judaizers)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까지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은 바리새파”(the Pharisees, 5)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할례”(circumcision)를 주장한 것으로 보아 할례파”(circumcision party) 사람들이었다. (참고. 11:1-3의 기록은 좋은 참고가 된다.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이들은 어떤 사람들”(some men, certain men)로 기록되어 있고 안디옥 교회의 초청으로 온 것도 아니며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으로 온 것도 아닌 유대인들”(Judaizers)이다. (참고. 신약성경에는 “Judaizers"라는 단어로 표현된 유대인들은 없으며 ”the Jews"는 많이 등장한다. "Judaizers"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지만 율법준수를 고집하는 유대주의자들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the Jews"는 유대교인들로써 전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인지 확인할 수 없다.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므로 피상적으로나 가식적으로예수님을 믿었을 수도 있다. 또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믿음과 구원을 율법적(legalistic)으로 해설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바른 신앙의 길을 굽게 하므로 경계의 대상이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에게 이런 사람들에 대한 경계를 부탁한 일이 있다. 여하튼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 (참고. 2:3-5의 기록은 이러하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의 혼선이 일어나게 만들면서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내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이런 사람들의 부당한 행위를 공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15:24)라는 표현하였다.
 
3.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너희가(이방인들, 안디옥 교회 교인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1)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모세의 법이며 성경말씀(LXX)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이다.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도전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면 방황하게 된다. 그러면 할례가 무엇이며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규명하자.
 
. 할례란 남성성기의 여분의 포피를 제거하는 일종의 수술 작업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 남자는 출생 후 8일에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여주신 약속(”언약“)을 믿고 받게 되었다는 표징(a symbol, the sign)”인 것이다. 언약을 받고 믿고 지키리라는 조건을 증명하고 시인하는 . 반드시 믿음표징이 합하여야 눈에 보이는 가 효력을 발생한다.
 
17: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를 육체에만 받는 표징만으로는 효과가 없으므로 할례를 마음에도 받으라고 모세는 강조하게 되었다.
 
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4: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9: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 그들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대로 가르친 할례를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출애굽기12장에서 유월절의 구출 사건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항인데 이것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본대로 할례는 모세가 율법으로 가르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언약의 증거를 삼기위한 징표로써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과 관습과 전통으로 인하여 완전히 틀에 박히고 몸에 배어버린 의식이 되었던 것이므로 할례구원의 요건으로 승화한 것이다.

12:48.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 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51.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로마서에서 강조하였다.
4: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3: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 “표징, 상징, ”(symbols, signs)는 사람들의 믿음을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이나 형태일수는 있어도 실재(reality)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오직 각 개인의 믿음으로 증명되며 구원으로 연결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 “할례구원과 관련하여 제기한 문제는 형식이냐 내용이냐,” “전통이냐 새 조류냐,” “옛 것이냐 새 것이냐,” “보수냐 진보냐,” “다수냐 소수냐,” “율법이냐 은혜냐,” “믿음이냐 행위냐,” “실리냐 명분이냐,” “내 집이냐 네 집이냐,”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등등의 두 갈림 길에서의 선택에 관한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러한 난처한 곤경에서 위선적 행위를 하여 바울의 책망을 들은 기록이 갈라디아서 211-16절에 명시되어 있다.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로 인하여 이방인의 사도인 바나바도 믿음이 흔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베드로의 실수(위선적 행동)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발생하였다. 그런데 갈라디아 서신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져 있으므로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기록된 것으로 판명되며 안디옥에서 기록하여 갈라디아로 보낸 것도 알게 된다. 갈라디아 교회도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해당하는 해답으로 보낸 서한이라는 설명을 할 수 있게 된다.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혼선을 빗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주의적 가르침을 배격하고 비난하면서 구원 얻는 복음은 오직 하나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른 복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베드로는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믿음과 구원 그리고 성령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쇄가 된다는 사실을 역설하게 된다.
 
*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시기가 차고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는 바이다. 바울의 서신을 보자.
 
11: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대인의 시기와 영적전쟁에 관하여서 사도행전은 여러 번 기록하였다.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 문제의 해결은 이미 사도행전 11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간증설교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 간증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비난할 때에 한 말이다. 11:13-18의 기록을 참고하자.
 
11:13. (고넬료)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예수님)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러한 간증설교의 내용과 함께 똑같은 내용의 증언이 15:7-11에서도 첨가되고 재차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1 페이지)을 함께 읽어보자.
 
* 바울과 바나바는 베드로가 모든 설명을 마친 후에 자기들의 1차 이방지역 선교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13-14장의 기록)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하였다. 모든 간증이나 설교나 보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언어로 전달하여주며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는 행위이다. 이들의 언어 속에는 자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는 주 예수님의 은혜와 충만하신 성령님의 위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포함하여 이러한 언어의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고난이나 자랑이나 교만의 모습은 촌분도 찾아볼 수 없다. 첫째,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를 택하여 주신 은혜(7), 둘째,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아시고 (연약함, 미련함, 배반함, 등등)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허락하신 은혜(8), 셋째, 하나님께서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주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여주신 은혜(9)를 언제나 느끼고 감사하고 살아왔는데 이러한 똑같은 은혜의 체험을 이방인들에게도 하여주시는 것을 보고 감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노라”(11)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베드로의 간증을 들은 온 무리는 가만히 있었다(12)고 하였다. 명백하고 확실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체험담을 선포하는 그곳에는 성령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함께 하였고 어느 누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서 나서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바울도 자기들의 선교체험담을 간증하였다. 바울은 일평생 어느 곳에 가든지 자기가 만나 뵌 예수님자기에게 충만하게 임재 하여주신 성령님의 은혜를 간증한 주님의 제자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본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1초인들 무슨 상관이며 0.001초인들 무슨 상관이랴. 영원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무리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 만남은 영원한 것이다. 30초는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 주님과의 만남의 체험이 있는 자는 이해할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나려주시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이러한 간증 앞에서 인간의 논리를 펴며 나설 자는 아무도 없다.
 
*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는 은혜를 체험한 지도자다. 그는 예수님의 육친의 동생이다.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도 한 때는 예수님을 싫어하고 불신하고 예수님의 사역에 관심도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임종할 때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형제에게 맡기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성장한 야고보는 아버지를 일찍 잃고 가정을 책임지고 돌아보는 목수 형님 예수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랐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하는 자의 생애였다. 새벽이면 습관을 따라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는 모습을 가끔(공생애 이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3년간의 사역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병고침과 귀신 쫓아냄도 목격하였다.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불신자였던(7:2-8) 그는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고(고전15:7) 오순절 날에 120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예루살렘에 박해로 인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이 물러간 후에 교회의 지도권을 받았다. 그의 교회를 목양하는 특성은 철저한 기도생활과 엄격한 율법의 준수로 방종과 나태함을 보이지 않았다. 무릎 꿇고 기도하여 무릎 살이 딱딱하게 굳어서 낙타 무릎을 가진 자로 알려질 정도였다. 기도는 본질상 중보기도. 야고보의 기도는 교회와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모두가 그의 사랑과 보호함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 야고보는 성경말씀이 간증한 모든 사람들의 내용을 사실대로 입증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모스 9:11-12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의 구원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놀라운 역사라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15:16~17).
 
.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건설된다는 것은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된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방인에게 다윗의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산다. 다윗은 골리앗과 대적할 때 자기 이름은 없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맞서서 싸웠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방인 골리앗은 다윗에게 패배하여 이방나라 블레셋은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 속에 예속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면 그들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얻는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가장 큰 영광이다.
 
.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면 그들도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된다. 다윗의 시편 63:1-2를 보자.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 이방인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하여왔다. 그들은 우상, 음행, 잔인함(목 매어죽임과 피)같은 것들이었다(15:20). 본래 이방인들은 모두 이런 것들을 찾는데 급급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구원 받은 후로 그들은 갈급하게 하나님을 찾는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기쁨과 평강을 준다. 야고보는 이렇게 다윗 장막의 재건은 이방인들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이 다윗의 왕국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 (15:14)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산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 되고 만다.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보관되었던 곳은 역사적으로 보면 세 곳이었다. 첫째, 모세의 성막, 둘째, 다윗의 장막, 셋째, 솔로몬의 성전이다.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언약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엔 이러한 구분이 없고 언약궤가 장막 안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이미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속죄의 제사보다는 좋으신 하나님과의 만남 앞에서 드리는 찬양과 기도가 더욱 중요하였다. 예수님은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56:7, 11:17)으로 이방인까지 와서 기도하는 집인 것을 가르쳐주셨다. 역대상 17장에서 다윗이 법궤가 들어온 후에 제일 처음으로 부른 찬양은 온 민족이 주님을 찬양할 것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 역대상 25:1-7 다윗의 장막에서 드려진 예배를 보면 288명의 예배인도자가 있었고, 다윗은 12명씩 1그룹으로 묶어 24개 팀을 만들었다. 역대상 23장을 보면, 연주자가 4,000명이었고, 노래하는 자가 38,000명이었다. 24시간 365일 내내 쉬지 않고 이곳에서 예배가 드려졌다. 또한 다윗은 이곳에서 신령한 노래인 나바”(. prophesy, 예언하다)를 부르게 하였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예언적인 찬양과 함께 연주하며 노래하였다.
 
. 아모스의 예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의 회복을 다윗 왕과 같은 새로운 왕의 탄생으로 이해하였으나 결과는 야고보의 말과 같았다. 모든 이방인들이 주 예수님을 찾게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해버렸고 결국 다윗의 장막은 예수로 인해 완전히 회복되었다.
 
* 공의회에서 보내진 공문의 핵심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목매어 죽인 것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28-29)는 것이며 만장일치의 결정”(26)을 보았다는 기쁨으로 받을 위로의 말”(31)을 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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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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