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6. 순교자(증인)의 사명과 영향력 (행7-8장)

  6. 순교자(증인)의 사명과 영향력 (7-8)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7:56).

* 사도행전 7:46-60 [개역 개정]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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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데반(Stephen = “crown” 면류관, 왕관, 화관)
* 2. 순교자(Gk. martus: En. martyr = “witness” 증인): “martyr”라는 타동사가 “(신앙, 사상 때문에 누구를) 죽이다, 박해하다, 괴롭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순교자라는 명사는 “(신앙, 사상 때문에) 박해로(괴롬 받고) 죽은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원어에서는 증인이라는 뜻이다. “증인은 본래 감추어져 있던 사실,” 또는 몰랐던 일들을 백일하에 폭로하고 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증인숨겨져 있는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는 놀라운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고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과 내용을 품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데는 특별히 예수님의 피와 죽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는 생명이며 죽음로 인하여 소생하고 살아나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생명”(=)를 배척하고 생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과의 관계는 영적전쟁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다. 박해자들은 생명의 존엄성무시하거나” “모르기 때문에” “생명”(=)를 대적하고 나선다. 순교자와 박해자 사이에는 이러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으며 순교자는 피의 증언”(=“생명의 증언”)을 하여야 하는 사명을 따라서 증언하고 박해자는 생명”(=)을 말살하기 위하여 죽이고 괴롭히고 피를 흘리고야만다.
 
* 3. 사도행전 6-7장의 본문에는 순교또는 순교자라는 원어(Gk. martus)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행전 22:20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간증설교를 하고 있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And when the blood of your martyr Stephen was shed, I stood there giving my approval and guarding the clothes of those who were killing him.) 바울은 자기가 박해자의 반열에서 순교자”(“증인”) 스데반의 ”(생명)를 흘리는 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생명을 죽이는 일”(박해, 피를 흘림)에 가담하여 잠시 양심에 화인을 맞아 열심히 박해자 노릇을 하였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기억이 되도록 바울을 이끌어드렸다. 바울은 자기를 가시 채로 박해하고 있었다면서 그러한 괴로움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6장의 기록을 보자.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 바울도 결국은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증인이 되었고 순교자가 되었다. 순교자의 피는 생명의 피이므로 그 피가 땅에 떨어지면 생명의 씨가 되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는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스데반의 피는 열매 바울을 낳았고 바울의 피는 수많은 이방성도의 열매를 낳게 된 것이었다. 생명의 복음은 순교”(증언)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하여 흘려질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결코 헛되이 흘려지지 않는다. 생명을 낳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증인”(Gk. martus)의 성경기록(2:13; 17:6)을 살펴보자.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KJV. my faithful martyr)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with the blood of the martyrs of Jesus)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 4. 행6:1에는 두 그룹을 규명하는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헬라파 유대인”-(the Grecian Jews: Greek-speaking Jewish Christians)이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파 사람”-(the Hebraic Jews: Aramic-speaking Jewish Christians)이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팔레스타인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비교적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친유대교적인 그리고 보수적인 그룹이 히브리파이며 그 대표가 사도들이었다. 유대인이면서도 팔레스타인이 아닌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diaspora, 이스라엘 이외의 거주지) 유대인들은 외국에서 살고 외국에서 공부를 했고 그 당시 헬라의 문화와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식하고 부유하고 바깥세상을 알고 유대교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헬라파의 대표들이 바로 일곱 집사다. 이들은 히브리파헬라파사이의 중간 단계에 존재하면서 교회를 이끌어갔으며 그 중에서도 스데반과 빌립은 교회의 바른 맥을 이어나간다. 비록 두 그룹이 한 팀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를 섬겼으나 사도행전 구조를 보게 되면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인 베드로가 초창기 사역을 리드해 나가다가 나중에는 헬라파 유대인의 대표인 바울이 사도행전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 5. 초대교회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유대인들은 본고장 사람들이므로 외국 출신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더 미워한 것이 당연하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어떤 면에서는 반유대적이었다. 그들에게는 논리가 있고 학문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 뻗어갈 역량이 있었다. 기도교의 세계화는 헬라파에 의한 공헌이 크다. “히브리파는 히브리어 밖에는 몰랐으나 헬라파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알고 더 나아가 그 당시의 헬라어에 능통하고, 문학을 알고 철학을 알았다. 그러므로 헬라파가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헬라파가 먼저 핍박을 받았고 스데반 집사도 먼저 순교를 당한다. “헬라파의 신앙체계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 반영되어 있고 바울 사도도 스데반의 영향을 받는다. 사도 바울도 헬라파의 사람이다. 소아시아에 있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서 본토 이스라엘로 가서 공부한 유학파다. 그는 성장해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더 배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유학하였고 율법을 사랑하고 조상들을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성향으로는 분명히 헬라파이다. 이 사도 바울을 신학적으로 사도 바울 되게 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다.
 
* 6. 6:8-7:60에는 스데반이 박해를 받는 현장의 모습과 그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저자 누가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누가복음에서의 예수님의 기록과 같이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이 예수님과 닮은 삶을 살았다는 실증을 보여주고 있다. 왜 그렇게 그리고 싶어 했는가? 예수님도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자로서의 모델이므로 교회의 성도나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모델을 닮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 교회는 맡겨진 사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처럼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과 스데반의 기록을 보자.
 
  -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22:66-67) 앞에서 심문을 당하신 예수님.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6:12) 앞에서 심문을 당한 스데반.
  - 거짓 증인들(23:2; 6:12)
  -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인한 죽음
 
* 7. 사도행전의 요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공동체와 공동체의 일원들은 증언(witness)하는 증인(witness)으로서의 기능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은 기본 원칙이며 그것은 그들이 지킨 불변의 신앙이다. 여기에서 증인(witness)과 순교(martyr)는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다시 음미하자. 증인 된 제자들에게는 주 예수님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다(28:19-20). 선택 받음의 특권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 늘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43장의 약속을 보자.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 8. 6:9에서 스데반과 논쟁을 일으킨 자유민들”(freedmen)이 있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Opposition arose, however, from members of the Synagogue of the Freedmen (as it was called) -- Jews of Cyrene and Alexandria as well as the provinces of Cilicia and Asia. These men began to argue with Stephen,)
 
자유민들은 로마 군인에 잡히어 노예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써 자기들끼리 회당을 만들어 유대교 신앙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다. 새로 발생한 초대교회의 신앙을 반대하고 나섰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놀라운 사역을 막아낼 수 없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8, 10) 결국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 9. 스데반의 설교 분석(7:2-53)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에는 1) 아브라함에 관계된 설교, 2) 요셉에 관계된 설교, 3) 모세에 관계된 설교, 4) 하나님의 처소에 관계된 설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스데반은 고소인들이 그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고”(7:11),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14)는 고소에 대해 변증하는 것으로 설교를 한다. 그는 이 변증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주제에 몰입하면서 논쟁의 요소와 함께 설교의 요소를 혼합하고 있다. 또한 설교의 내용에서는 고소내용 중에서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에 대한 부분에 대한 것보다는 성전개념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누가의 신학적 의도 속에서 선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아브라함에 관계된 설교(7:2-8)
스데반은 설교의 본문에서 먼저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특별히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언급한다. 몰간(C. G. Morgan)은 스데반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주제라기보다는 스데반의 설교를 이끄는 핵심이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사도행전 7장의 설교 중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스데반의 설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에 관계된 설교를 통해서 스데반의 성전관에 대한 견해는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성전의 개념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어야 함이며 둘째, 성전은 예배하는 처소로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 뿐 아니라 어떤 처소에서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 요셉에 관계된 설교(7:9-6)
(1) 17:10에서는 할례를 언약이라고 언급한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란 것이었다. 이 할례언약은 이삭과 야곱의 열 두 아들들과 후손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스데반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은 율법에 매여 있고 할례언약보다는 예루살렘성전을 더욱 중시하여서 언약의 백성인 자기들이 고발당하고 있음을 일깨워진다.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죄악을 고발당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예배가 있기 전에 이미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는 이어진다는 중요성을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다.
 
(2) 요셉에 관계된 설교에서는 언약백성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어떤 처소에 관계하지 않고 요셉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7:9, 10). 스데반이 요셉을 언급한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후손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증거의 제시이다. 버림 받은 요셉에게도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언약을 이루셨다고 말한다(7:9). 이와 같이 예수님도 고소당하여 죽었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셨고 스데반 자신에게도 함께하여 주신다는 동일한 원리를 설교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예배만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였을뿐 아니라 스데반도 잘못 고발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 모세에 관계된 설교(7:17-43)
(1)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어떤 인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여 말하고 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모세와 관련된 설교에서 지적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함께 했던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으로 본다.
 
(2) 스데반은 모세를 거절했던 백성의 우상숭배 역사를 들추어낸다(7:38-44). 하나님이 보낸 의인에 대한 거절과 악독한 반역은 결국 하나님을 잘못섬기는 결과를 빚는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도 모세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통하여 말씀으로 계시하신 곳이므로 성전과 같은 거룩한 곳이라는 것이다. 장소의 중요성과 거룩함은 하나님의 임재의 여부로 결정되고 하나님의 임재는 어느 한 곳에만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상의 어느 한 장소가 하나님의 영구적인 임재의 처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스데반은 주장하고 있다.
 
(3) 스데반은 예수님을 인식한 가운데에서 모세에 대한 표현을 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를 거절했다(7:38). 모세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을 거절과 것과 같다는 사실을 스데반은 나와 같은 선지자”(7:37)라는 모세의 말을 인용하명서 의인이신 예수님을 버린 것을 고발하였고 아울러 예수님을 배척한 예루살렘 성전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 하나님의 처소에 관한 설교(7:44-50)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7:44)솔로몬이 지은 집”(7:47)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것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밝히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가 아님을 결론적으로 말한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느 지역이나 건물에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대목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거룩한 장막은 광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때까지의 가나안 땅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스데반은 예시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로서의 솔로몬 성전을 예루살렘 에 지었어도 결국 이 성전에 대하여 스데반은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48)라는 결론을 내린다.
 
* 10. 스데반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백성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 11. 스데반의 설교 중에서 특별히 언급하여야 할 중요한 사항은 하나님의 손사람의 손을 대비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에 대한 크나 큰 경종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경기록을 보자.
 
7: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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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the Most High does not live in houses made by men)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my resting place)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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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I will put my law in their minds and write it on their hearts.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 12.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모습을 본받아서 그대로 행한 일은 예수님을 가장 아름답게 증언한 기록으로 큰 교훈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사도행전은 예수님 행전의 연속이 되고 있다.
 
     - 운명 직전에 한 말
예수님: “아버지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23:46).
스데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7:59).
 
     - 운명 직전의 중보기도
예수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스데반: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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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Philip)의 사적(8:4-40)
빌립은 사도행전 6장에서 과부들의 구제를 위하여 섬기는 집사로 선택되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6:3)는 사도들의 권유에 따라서 선출된 초대교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스데반은 첫 순교자로 알려져 있는 반면 빌립은 전도자(evangelist) 빌립으로 불려진다. 스데반을 죽인 박해가 확산 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이 흩어질 때에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첫 전도자가 되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개종시키고 계속하여 에치오피아의 한 관리(내시)를 개종시킨 후 아소도(Azotus)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후에 가이사랴(Caesarea) 지방에 정착하여 계속 사역하였다. 빌립은 예언 하는 딸 넷을 둘(21:8-9) 정도로 경건한 가정을 이루었다.
 
*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빌립(8:4-25)
1. 사마리아는 이교적 헬라 도시로 황제 숭배에 열심이었고 주술적 영향으로 꽉 찬 곳이었다. 이교적 행위로 마술이 성하였고 마침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자칭 큰 자라 칭하며 마술을 행하여 그곳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시몬은 마술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그를 청종하였다(10-11). 빌립에 의해 복음을 들을 때까지 그들은 복음에 관한 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빌립은 유대인의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그의 복음증거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증거가 그러했듯이 말씀을 보증하는 능력과 표적이 항상 뒤따랐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2. 마술사 시몬도 이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는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목격하고 더욱 놀랐다. 이와 같이 빌립의 전도를 받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 아직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성령이 임하시지는 않았다(8:16). 빌립은 복음의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8:4, 5, 12) 다른 사도들처럼 정상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빌립 집사를 통해 표적과 기사를 동반하는 극히 정상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정상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아직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이 사례는 구원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이 다른 사건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화가 된다.
 
3.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이 소식은 곧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까지 전해졌고,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급히 사마리아로 보냈다. 사마리아에 도착한 두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성령님을 영접하지 못한 것을 알고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다(18:5). 두 사도가 저희를 위하여 안수하자 비로소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했다(8:17). 사도들의 안수로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지켜본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안수하여 성령님을 받게 하는 능력을 자기에게 팔라고 요청한다. 이미 빌립을 통해 수많은 이적과 능력을 본 시몬이 사도들에게 성령 받게 하는 능력을 팔라고 요구한 것으로 보아, 사마리아인들이 성령님을 영접하였을 때 어떤 특별한 현상이 동반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로 마침내 사마리아의 제자들도 성령님을 받게 된 것이다. 믿고 세례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먼저 빌립을 통해 복음을 믿었고, 후에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로 성령님을 영접하였다.
 
. 마술에 대한 이해: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마술사를 하나님의 대적자요 사탄의 사역자로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사탄의 세력은 약화되고 예수님의 이름을 신실히 부르는 자들은 사탄의 세력을 이긴다는 점을 마술사들과의 대면에서 밝혀내고 있다.
 
. 마술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 시작되어 샤먼이 사용하던 주술과 점술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마술”(magic)이란 말의 어원은 성경에 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동방의 세 박사가 선물을 가지고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이 박사들을 메자이(Magi)라 불렀는데 이 말은 고대 페르시아의 사제 계급이던 마기족을 가리키던 말이다. 이 메자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대에는 마법사나 점성술사를 그렇게 불렀다. 사도행전 본문들에 나타나는 마술사들은 유대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마술을 행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유대교의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마술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웃 이방 민족들의 마술이나 점성술을 비롯하여 각종 미신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거짓 영의 속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잘못 알고 믿는 무지의 결과였다. 그러나 랍비들은 그런 이방 풍속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합법화하고 유대교화하기까지 하였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세계의 마술에 매혹되어 마술을 행하기도 하고 따라다니기도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술사 시몬이 유대인 사회에 있으면서 마술을 행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 마술사 시몬은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 획기적인 새 흐름을 느낀다. 그 동안 마술사 시몬은 사마리아인들을 자기의 마술의 능력 아래 묶어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빌립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시몬의 마법은 풀려지고 자신을 비롯하여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된다. 시몬은 자신의 마술과 빌립이 전하는 복음과 비교했을 때 복음의 능력이 더 크다는 사실은 인정하였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마술의 차이를 주목하게 한다. 빌립은 말씀/하나님의 말씀”(8:4, 14), “그리스도”(8:5), “하나님의 나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8:12)을 전한 반면에, 시몬은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전함으로써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자신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2) 빌립은 자신이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사람으로서(6:3-5) 큰 능력을 행할 때에 사마리아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반면 시몬의 관심사는 위대한/이라는 단어에 나타난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마술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의중을 드러낸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능력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22:69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라는 표현은 행7:55, 56에 나타난 하나님의 우편과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권능하나님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몬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인식시켰다고 기록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교만의 죄악을 저질렀다.
 
(3) 마술사 시몬은 빌립의 사역 아래에서 그의 마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빌립을 따라 다닌다. 시몬은 빌립의 마술(?)은 자기의 마술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였다.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가 마술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과 함께 마술도 받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며 시몬도 자신을 신격화하였고 유대인의 하나님을 빙자하여 마술을 행했다. 후에 베드로와의 대면에서 시몬은 그의 본성이 드러났다.
 
.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성령님을 받게 하는 권능을 돈을 드려 사려고 한 것은 베드로의 안수도 시몬 자신이 행하던 마술과 다를 바 없는 능력 행하는 마술의 일환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며, 전문 마술사들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아마도 시몬 자신도 이전에 마술을 배울 때 그러했듯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마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시몬은 빌립도 하지 못하던 성령님을 나누어주는 능력이나 성령님을 부리는 마술 행하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성령님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마음이며 끔찍한 인간범죄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8:21).
 
.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파송하여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들에게 안수한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나 사마리아 교회가 하나의 교회, 한 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한 분 성령님 안에서 동일한 공동체를 이루는 귀한 사역임을 확인하고 수용하는 일이었다. 성령님의 임재는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이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에게도 그대로 임재하여(오심) 주셨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서 성령님이 임하신 일을 이렇게 보고하였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1:15-17).
 
*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8:26-40)
빌립은 놀라운 전도를 수행한다.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고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내시에게 가까이 갔으며 또 주 예수님의 영의 이끌리심을 받아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복음을 전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므로 올바른 복음을 전했으며 그 내시의 마음에 영적인 기쁨을 선사하고 참 생명을 주었다.
 
. 주의 사자의 지시: 빌립은 주의 사자(천사)에게 지시를 받아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경우를 보여준다. 그가 복음을 다 전했을 때 주 예수님의 영의 이끌림을 받아 아소도에 내려갔다.
 
.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에티오피아 내시: 빌립은 광야까지 가서 마침 병거를 타고 그 곳을 지나가고 있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다. 그 내시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권력 있는 사람이었다. 이 내시는 예배하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이 내시는 흔들리는 병거 위에서 성경 이사야의 글(53)을 읽고 있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 속의 주인공은 왠지 모르게 고난을 받고 있었다. 빌립은 그에게 달려가 그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는 대답을 듣고 빌립은 그 성경 구절의 뜻을 가르쳐 주었다.그 고난 받는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었으므로 빌립은 참으로 전도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 전도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빌립은 이사야의 글로 예수님을 가르쳐 주었다. 그 고난의 종을 예수님과 연결시켰을 때에 의문은 풀렸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베풀어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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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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