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3일 화요일

8. 베드로의 증인사역 (행10장)

  8. 베드로의 증인사역 (10)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9:34).

* 사도행전 9:32-42 [개역 개정]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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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나님께 대여 받은 자로서 큰 자를 의미한다. 히브리 종족 중에서 큰 자로 살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서 활약하여 모두 진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사울은 회심과 변화가 일어났고 예수님과 복음 앞에서 작은 자가 되고 말았다. 사울의 다른 이름이 바울인데 라틴어로 작은 자”(little)라는 뜻이다. “큰 자사울로 인한 핍박의 거센 물결은 사울이 작은 자바울이 되고나서 잠시 그 핍박은 조용해졌다. 사울로 인하여 일관성 있는 핍박의 기능을 잃게 된 유대인들 내부에서는 분열과 반목이 발생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개역, 개역개정)
      31. 그러는 동안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안정이 되어 튼튼히 자라갔다. 신도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경외하였고/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살아갔다. (현대어 성경: Today's Korean Version)
 
2. 예수님은 언제나 작은 자를 사용하신다. 작은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의 바른 자세다. 예수님 자신이 언제나 작은 자가 되어 우리 가운데에서 본을 보여주시면서 사셨다. 빌립보 2:5-9을 참고하자.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는 사울이 감옥 속에서 예수님을 우러러보면서 기록한 내용이다. “큰 자로 살던 자기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작은 자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울은 자기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이며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도 하였다(고전15:9). 그에게는 자기 자신은 없고 예수님만 계신다고 강조한 것이다.
 
3. 예수님은 이렇게 사울을 조용하게 자기 고향에서 지내도록 만드신 다음에 다시 교회의 기초를 다짐하고 박해 가운데에서 피곤하여진 제자들을 찾아 위로와 새 힘을 주신다. 베드로를 다시 불러드려 사도행전 1:8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인도하시며 오순절의 성령님의 오심과 교회의 기반을 굳세게 하여주신다.” 늘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언제나 작은 자들을 먼저 찾아오신다. 이러한 내용들의 일부분이 곧 룻다의 애니아와 욥바의 다비다와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서 나타난다. 이들은 작은 자들이다. 이들이 받는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의 복음이 능력있게 활동한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진다”(9:31).
 
* 9:32-35에서 룻다(Lydda)의 애니아(Aeneas):
1. 32절에서 룻다”(Lydda)라는 이름의 장소: 31절에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라고 차례대로 언급한 것은 행1: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여 주신대로 오순절에 성령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된 교회는 확산되어 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님과 교회 사역의 중심인물이 되므로 32절에서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곧 베드로는 31절의 내용에서 언급하고 있는 교회가 받아야 할 평안과 성장과 위로의 사역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며 32절에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룻다(질병치유) -> 욥바(생명회복) -> 사마리아(복음선포) 등의 사건과 함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2. 32절에서 룻다에 사는 성도들”(the saints)이라는 언급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9: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라는 기록에서 성도를 보게 된다. "주 예수님을 믿은 신자를 의미한다. 아직은 이들을 그리스도인“ (Christian)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목양(ministry)의 대상이 되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다.
 
3. “룻다는 매우 작은 시골 동네이며 장식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집사 빌립이 핍박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이곳을 경유하여 가이사랴에 정착할 때에 이 룻다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추측을 한다.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의 기록은 참고가 된다. 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는 기록에서 사울도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자기 고향 다소에 갈 때 이러한 곳을 경유하지 않았을가 하는 추측도 한다. “룻다는 작은 마을이지만 들러서 지나가기 쉬운 장소인 것으로 안다. 또 구약에서는 이 곳을 로드”(Lud)라고 하여 유대의 베냐민 족속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에스라 2장을 참고하자.
 
2: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 33.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4. “애니아라는 이름은 난산또는 투쟁이라는 뜻이다. "애니아"는 중풍병으로 인하여 8년이나 움직일 수 없는 가련한 사람이었으나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성도는 주 예수님의 지녀(offspring)이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를 그에게서 볼 수 있는(revelation) 기관(organ)이라은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과 마음을 전하는 사역을 행하고 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 . . 곧 일어나니”(34)라고 하였다.
 
5. 베드로의 선포,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에서 낫게 하신다”(restore)회복의 선포. 영과 육이 함께 회복되는 역사다. 특별히 (soul)"의 회복을 말할 때에는 첫째, (1) 하나님의 지식(God's knowledge), (2) 하나님과의 교제(God's fellowship), (3) 하나님의 형상(God's image) 이 함께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회복의 능력(Restorative power)은 그리스도(메시아)로 말미암는다. 셋째, 회복의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고 믿는 믿음”(BY FAITH)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전권을 성령님의 능력과 함께 행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함으로써 치유의 힘을 발휘하였다.
 
6.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선포를 동시에 하였다. 첫째, 일어나라, 둘째, 정돈하라는 두 단계다.
 
7. 이러한 선포의 능력은 전도와 선교의 도구와 기능을 나타낸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Men turned to the Lord)”(35)고 하였다. 피조물의 세계에서 창조주(the Creator)께로 회복되어 거룩한 백성의 자리로 돌아옴을 뜻한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 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8.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고(4:12), 죄 사함을 받으며(24:27, 요일2:12), 생명을 얻고(20:3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1:12).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18:20),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28:19, 2:38),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영접하게 된다고 말씀한다(14:26).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들의 신앙지식을 초월하여 신앙생활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이름은 지식으로 알고 있다는 소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피와 살로서의 활동능력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성전 자체보다는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거룩함이 존재하고 있다.” (cf. 3:14-15,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 am who I am.”)
 
* 9:36-43에서 욥바의 다비다:
1. 도르가는 착한 여인이었으며 어떤 학자는 그녀를 자비의 천사”(an angel of mercy) 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도르가는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9:36)라고 하였고 영어성경(NIV)에는 “who was always doing good and helping the poor”라고 하였다. 항상 쉬지 않고 선한 일과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 도르가가 죽은 후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이라고 하였다. 사실 속옷과 겉옷을 그냥 사서 나눠 주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도르가는 털실이나 면실 등을 사서 손수 짜고 지어서 나누어주었다는 점은 놀랍고 경이롭기만 하다.
 
2.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니라”(1:27).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5:15).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도르가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3. “욥바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지역이다. “도르가노루라는 뜻이고 다비다암사슴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아가서 2장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2: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의 몸 된 교회의 실재를 예표 하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에 대한 언급에서 주님의 사랑이 오늘 본문의 다비다를 통하여 나타난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구제와 선행을 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다비다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일체감을 보여준다. 다비다는 주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써 머리되신 예수님과 선한 교제와 섬김으로 연결되는 몸을 이루며 하나님나라의 법과 질서 속에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4. 9:40에서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대로 행동하였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은 살려주실 때에 달리다 쿸”(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다비다 쿰”(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선포하였다.
 
5.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6. 베드로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 주 예수님의 사역자는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다. 예수님이 주신 명령을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12 사도를 내어보내실 때에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10:8)고 하셨다. 지금도 선교사들의 간증에서 듣게 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 사람을 죽음에서 살려내는 일은 죽음을 이기는 부분적인 승리”(only a partial victory over death)이다. 다시 살아난 자도 결국은 죽는다. 영원한 부활의 예수님만 예외이다.
 
. 죽음의 궁극적 원인은 사탄에게 기인한다. 사탄은 죄를 유도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 죽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은 결국 불못에 던져진다(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바울은 죽음이 왕 노릇을 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원수로써 멸망한다고 하였다(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라고 하였다.
 
. 그러므로 죽은 자를 일으킴은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sign)”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표적(sign)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베드로로 인하여 다비다가 다시 살게 된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다.
10: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 10:1-48에서 가이사랴의 고넬료:
1. 사도행전에는 세 가지의 긴 이야기(6-7장의 67->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9, 22, 26장의 61-> 사울의 회심: 10-11장의 77-> 베드로와 고넬료)유대인의 신앙과 사상의 변화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나타내고 있다. 복음이 전하여지기 위하여서는 그 앞에 있는 장벽이 깨어지고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는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다.
 
2.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10:1)으로 이방인이다. 이러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10:2)고 하였다. 유대인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다. 유대인의 신앙을 보는 주위의 이방인들이 여러 가지 잡신과 우상을 섬기다가 유일신” (monotheism)에 매력을 느끼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 유대교로 완전히 전향하는 이방인들은 개종자(改宗者, proselyte)라고 부른다. 개종자가 유대인으로 받아드려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세 가지 관문이 있다. 아래의 세 의식을 치루면 유대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따르며 살아야 한다.
 첫째, 할례(circumcision)를 받음: 남자의 경우
 둘째, 정결세례(A purificatory self-baptism)를 행함: 증인들 합석 하에 행함
 셋째, 희생제물(The offering of a sacrifice)을 드림: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함

. 유대교로 완전히 전향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 또는 경건한 자”(devout person)라고 부른다. 이들은 위의 세 가지 의식을 치룬 사람들이 아니므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도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며 별석(separate designate place)에 앉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유대인과 같이 정결한 백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장차 유대인 개종자가 될 후보생이므로 유대인의 신앙생활을 지키며 따른다. 정하여진 기도시간에 유일신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며 구제와 봉사를 행한다. 이러한 사실을 행10:2-3에서 보여주고 있다.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3.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울러 베드로의 기도도 들으신다. 고넬료도 아시고 베드로도 아신다. 친히 이름을 부르시고 이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하락하하고 계신다. 이때에 베드로는 아직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려지지 않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란 용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11장의 안디옥 교회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6)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베드로는 메시야(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므로 메시아 유대인” (Messianic Jew)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전통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 살았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규정대로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고 유대인의 규정(레위기 11)을 따라 음식(Kosher Food)을 먹었다.

10: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4. 베드로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단호하였다.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5. 결국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다.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될 사람 6명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다. 드디어 고넬료의 기도는 상달되고 응답되고 실현되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이 말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들은 말을 증언한 내용의 일부이다)
 
6. 고넬료가 받은 기도 응답의 핵심은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는 천사의 말씀이다. 이 응답에 따라서 베드로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 내용의 핵심 구절이 행10:34-43에 걸친 말씀이다.
 
7. 베드로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 하시고”(10:34)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다 받으셨다”(10:35)고 선포함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였다. 베드로의 사고구조는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주님의 사랑의 줄에 연결되어 함께 은혜를 나누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유명한 구절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을 한 절로 표현한 내용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10:38). 계속하여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용서, 구원을 차례로 가르쳤다.
 
8.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성령님을 모시게 된 사실이 10:44-48에서 증언하여 준다. 성령님의 오심으로써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오순절의 체험을 통하여 히브리파 유대인을 포함하여 디아스포라에 속한 전 유대인이 복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사도행전 8장에서는 복음이 사마리아로 확산되며,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직접 전하여지게 된 것이다. 이 모든 단계에서 베드로는 모든 일의 목격자이며 교회와 구원의 열쇄를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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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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