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의미탐색(Meaning Search)의 다양한 형식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해석학은 의미(Meaning)를 탐구(Search)하는 작업이다. “의미 탐구”의 방법으로 우리는 “문자적-역사적 방법”(Literary-Historical Method)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으며 아울러 이 방법에서는 “문맥(Context)을 따르는 것”이 매우 필수적이며 “이러한 본문연구”(The Study of Text)가 바른 “의미 탐구”의 첩경이라는 사실을 역설하여 왔다. 그럼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더”(more) “심오한”(deep) “감추어진” (hidden) “의미”(Meaning)을 염원한 나머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추구하였고 또 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해석학에는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와 “영적의미” (spiritual meaning)가 있다고 하면서 영적의미를 “창출 한다”(create, 만들다). “문자적 의미”는 본문에서 “의미를 발견하는”(discover) 작업인 반면에 “영적의미”는 본문에서 “의미를 창출(create, 창작)”하는 작업이다.
* 성경을 해석하면서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양분해놓고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질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마치 문자적-역사적 의미는 영적이 아닌 것과 같이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문자 뒤에는 문자가 표현하지 못한 영적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타낸다.” “성경말씀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문자적 의미라는 것은 동시에 영적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영적의미의 다른 점을 알아보려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야 올바른 질문이 된다. “본문(text)의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the meaning the author intended)는 무엇이며 “독자가 본문에서 그려내고 인출해내는 의미”(the meaning a reader dreams up and projects into the text)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렇게 독자(reader) 편에서 의미를 결정해 내어야만 하는 요구(desire)가 생기는 이유는 성경말씀이 “비유(figures)와 상징(symbols)”으로 기록된 부분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표현된 언어(language)는 “비문자적”(non-literal)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문자적 해석을 하는데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유와 상징의 본문(text)을 대할 때에 독자는 “더”(more) “심오한”(deep) “감추어진” (hidden) “의미”(Meaning)을 알기를 원하다가 결국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추구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 “Spiritualize”: 성경말씀의 독자가 영적의미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러한 활동 중에는 “영성화(靈性化)하다”(spiritualize, 영적성격으로 만드는 인간의 작업)가 있다. 이것은 사람 편에서 하는 정신적 작업이다. 억측(speculation, 臆測), 공상(imagination, 空想, 想像力)은 여기에 속하며 영해(靈解)라는 말도 사용한다. 이러한 작업은 본문말씀이나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며 독자(인간) 자신의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말씀의 저자나 성령님이 의도하고 계획한 “그 바른 의미”에서 떠나 “다른 의미”를 주장하게 된다.
* “Spiritual”(영적): “영적”이라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 내려오는 “영”(Spirit)의 활동을 뜻한다. “영”(Spirit)이란 것은 구약에서는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한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 둘째, 하나님의 능력(the power of God), 셋째, 하나님의 계시(the revelation of God)이며 신약에서는 구약의 개념에 “예수님의 생애와 활동”을 첨가하여 설명한다. 사도행전, 바울서신, 계시록 등의 기록도 예수님 중심의 영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Spirit)과의 밀접한 관계를 영적(Spiritual)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화(靈性化, spiritualize) 작업”과는 하늘(神)과 땅(人間)의 차이점이 있다.
* 누가복음 15:8-10의 “잃었던 은전의 비유”에서 예를 들어본다.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가.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할 때에는 상징(symbol)이나 비유(parable)를 사용하여 핵심문맥(核心文脈)을 표현하기 때문에 예리한 통찰력이 요구된다. 위의 비유를 현실적 감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며 적용하기도 한다.
(1) 어떤 여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2)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으므로 “집”이라는 것은 “교회”를 의미한다.
(3) 집이 더럽고 먼지가 많다는 것은 교인들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4) 열 드라크마나 한 드라크마는 교회의 성도들과 그 중의 한 사람이다.
(5) 한 교인이 어두움과 죄악에 빠져 있으므로 말씀의 빛을 비추어 돌이켜야 한다.
(6) 돌아온 교인은 벗과 이웃인 교우들이 기쁨으로 즐겁게 맞이하여야 한다.
(7)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잃은 자, 어두움에 있는 자에게 관심을 갖자.
나. 위의 비유를 가지고 “더”(more) “심오한”(deep) “감추어진”(hidden) “의미”와 “교훈”을 열심히 찾다가 그럴듯한 공상(imagination)과 억측(speculation)을 만들 수 있다.
다. 독자가 이러한 공상과 억측을 만들어 낸 이유는 이 비유 하나에서 메시지를 찾으려고 너무나도 집착하고 시간을 허비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성경해석은 문맥(Context)에서 참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헛수고(상상력)를 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Q.T.(Quiet Time)에서 말씀의 구절을 깊이 명상하다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로 나타나고 있다.
라.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이다. 1-7절(잃은 양의 비유, 8-10절(잃은 동전의 비유), 11-32절(잃은 아들의 비유) 등 모두가 잃은 것(=실제로는 모든 사람) 하나의 중요성과 그 하나를 끈질기게 찾아 구원하시려는 주님(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문맥(Context)이 형성되어 있다. 이 문맥 안에는 누가복음 저자의 의도와 저자 누가에게 성령님이 감동하여 깨닫게 하여준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자적-역사적 해석과 더불어 내장되어 있는 문맥(Context) 안에는 “영적 교훈”(Spiritual Message)이 이미 형성되어 있다.
* “알레고리”(Allegory, 다른 이야기, ‘allos' 다른 + 'agoreuein' 공공장소에서 말하다)는 이야기의 형식을 지닌 기록이며 이러한 이야기 안에는 문자적 감각(literal sense)과는 차원이 다른 광범위한 분량의 상징주의(symbolism)를 사용하면서 독특한 의미(meaning)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다르게 이야기하는 하나의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알레고리로 널리 알려진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천로역정”(Pilgrim Progress by John Bunyan)이다. “천로역정”은 훌륭한 문학적인 기교(a literary technique)를 가지고 기록되었으나 이러한 알레고리 작품은 역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알레고리와 비유는 거의 같은 부류의 형식이지만 알레고리는 상징을 폭넓게 사용하며 “비유”는 “. . . 와 같이”(like, as)라는 표현과 함께 폭이 좁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신약성경에서 “알레고리”(allegory)라는 용어를 사용한 기록을 오직 한 곳 즉 갈라디아서 4:24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KJV] Which things are an allegory: for these are the two covenants; the one from the mount Sinai, which gendereth to bondage, which is Agar. 사도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관계를 이와 같이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문의 문맥은 갈4:21-31에 나온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Which things are an allegory: for these are the two covenants; the one from the mount Sinai, which gendereth to bondage, which is Agar.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3. 구약성경에서도 알레고리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서 5:1-7을 예로 든다.
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가. 이사야 선지자는 위의 포도원의 비유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공의(justice)와 정의(righteousness)에 어긋난 생활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을 설교하면서 폭 넓은 비유를 사용한다. 7절에서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며 “주인이 기대하는 좋은 포도는 공의와 정의”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나. 이러한 “알레고리”는 성경에서 문학적 도구(device)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많지는 않으나 여러 곳에서 “알레고리 문학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알레고리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에 있다. 알레고리가 아닌 본문(non-allegorical text)을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게 되면 잘못된 곳으로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임의로”(randomly, 任意) 또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따라서 성경말씀을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반부에서 언급한 “영성화”(spiritualize)의 오류에 휘말리게 되는 위험이 된다는 뜻이다.
4. 적절하지 않은 “알레고리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예로 구약 창2:18-25를 살펴본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가. 위의 창세기의 기록을 가지고 어떤 성경학자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다음과 같이 그럴듯하게 하였다.
(1) 아담이 잠들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의 상처난 옆구리에서 아내를 만드셨으니 곧 그의 부분(part)이며 그는 아내를 위하여 피를 흘려 대가로 지불하였다.
(2) 첫 아담은 마지막 아담인 주 예수님의 모습(a picture)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의 신부(His bride)를 값을 치루고 얻으셨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첫 아담과 같이 신부(=교회)를 사기(purchase) 위하여 주무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밤낮을 무덤에서 주무셨다.
(3) 예수님의 옆구리도 역시 열렸는데(was opened) 잠드신 후에 상처난 옆구리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셨다.
나. 위의 해석은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의 본문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하여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 중심의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하려다가 오히려 성경말씀의 바른 의미(Meaning)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창세기 저자가 의도한 메시지에서 떠나 자기 메시지를 만들고야 만 것이다.
다. 본 문단(Paragraph)의 문맥(Context)은 “혼자 사는 사람, 아담”을 위하여 “배필을 만들어 준 첫 기록”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창세기 저자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훌륭한 결혼의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본래 하나님의 계획은 “한 남자와 한 여자와의 결혼”에 관한 교훈임을 알 수 있다. 이교도의 영향권에서 야기된 일부다처제(polygamy)에서 여성의 가치를 천하게 여기는 풍습에서 정상적인 결혼관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다.
라. 예수님의 이러한 성경의 문맥(Context)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막10:8-9에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5. 적절하지 않은 “알레고리적 해석”의 예로 신약 누가복음 10:25-37을 살펴본다.
가. 눅10:25-37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너무나도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성자이기도 했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많은 교부, 성자, 신학자, 목회자들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은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였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 = 아담(혹은 인간); 예루살렘 = 하늘나라, 혹은 낙원
여리고 = 세상(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 강도들 = 마귀와 그의 사자들, 또는 거짓 선지자들; 옷을 빼앗긴 사람 = 불멸성과 모든 덕을 상실한 인간
때리다 = 죄를 짓도록 강요하다; 상처 = 용서받아야 할 죄(불순종과 죄)
거반 죽게 만들다 = 죄 때문에 절반은 죽었고 하나님 지식 때문에 절반은 살았다.
제사장과 레위인 = 구약의 제사직과 율법, 혹은 율법과 선지자;
사마리아인 = 그리스도; 상처를 싸맴 = 죄의 용서
기름 = 선한 소망의 위로, 혹은 사랑과 자비의 교리
포도주 = 뜨거운 마음으로 일하라는 권면, 혹은 가르치며 교정해 주는 말씀
짐승 = 주님의 성육신하신 몸; 두 데나리온 = 사랑의 두 계명
여관 = 교회(여기서 천성으로 가는 여행자가 쉼과 힘을 얻는다)
두 데나리온 = 사랑의 두 계명; 사마리아인의 돌아옴 = 그리스도의 재림
여관 주인 = 사도 바울, 혹은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사마리아인의 돌아옴 = 그리스도의 재림
나. 최대한의 상상력이 동원된 증거를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보게 된다. 매우 그럴듯하다. 성경말씀에 나오는 비유의 단어 하나하나가 상징성과 영성화의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인지 회의가 갈 정도다.
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문맥과 올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전체적인 본문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대답한 한 율법사는 “누가 자기의 이웃인지 모르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말씀이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시고 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가 “이웃이 되어주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교훈을 문맥으로 삼고 있다.
6. 적절하지 않은 “알레고리적 해석”의 예로 마태복음 25:1-13을 살펴본다.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가. 위의 기록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다. 혼인에 참여한 열 명의 들러리 처녀가 있었다.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했고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랑이 더디게 오는 바람에 등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혼인식에 참여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나. 어거스틴은 처녀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인 교인들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왜 처녀들이 다섯씩일까? 다섯이란 숫자는 몸 안의 영을 말하는 것으로 오감을 뜻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처녀들)은 보는 것(시각), 듣는 것(청각), 냄새 맡는 것(후각), 맛보는 것(미각), 만지는 것(촉각)으로 불법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 등잔은 선한 행동의 상징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 모두는 등잔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슬기로운 자만이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등잔의 기름을 사랑이라고 해석하였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뜨고 늘 꼭대기에 위치한다. 따라서 “기름은 사랑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하고나서 “영원한 상급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마음에 양심의 기름(사랑)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그는 역설하였다는 것이다.
라.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는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통해 종말 때에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교훈하는 내용이다. 비록 주님께서 오시는 시점이 지연되더라도 종말의 때를 위하여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7. 예수님은 알레고리로 비유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해석까지 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서 해석하면 된다. 요한복음 15:1-10의 말씀을 본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가. (1절)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는 아들을 전적으로 돌보신다.
나. (2절) 열매 맺지 않는 성도의 심판. 열매 맺는 성도는 더 맺도록 가지를 치신다.
다. (3절)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음. (정하게 됨)
라. (4,5절)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는 성도는 더 열매를 맺음.
마. (6절)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심판의 고통이 있음.
바. (7절)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요청이 수락됨.
사. (8절) 열매를 맺는 제자들에 의하여 아버지는 영광을 받으심.
아. (9절) 아버지는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도 그렇게 성도들을 사랑하심.
자. (10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과 사랑 안에 거하며,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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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형론적 해석법 (Typological Interpretation, 예표론 해석법)
신구약 성경을 어떤 방법으로 보아야 통일성 있는 하나의 책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해석학에서 중요한 과제로 여긴다. 초대교회시대에 이레니우스(A.D. 130-200)나 터툴리안(A.D. 160-225)은 성경전체를 “진리의 정경”(the cannon of the truth) 또는 “신앙의 법칙(the rule of faith)라고 하였고 어거스틴은 ”사랑의 법칙“(the rule of love)라고 가르치면서 구약과 신약을 함께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말시온(Marcion, A.D.160)은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다고 하면서 구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은 이단이 되었고 영지주의자들은 성경과 철학을 혼합하여 성경을 이해하려는 이단이 되었다.
1.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찾기 위하여 초대교회는 신약성경의 입장에서 구약성경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신약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므로 이러한 입장을 확장하여 “신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해석학의 학파, 즉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가 발생한 동기가 되었다.
2.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알레고리적 성경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풍유적)을 낳았고 중세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나 문맥을 무시하거나 소홀이 여기고 오히려 문자 뒤에 “숨어있는, 깊은, 영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성경의 무시간적 영원한 진리를 발견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에서 신구약을 하나로 보았다.
3. 안디옥 학파는 “모형론적 성경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을 낳았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성경의 문맥을 중요하게 여기고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구약을 신약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한다는 약속과 성취라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신구약의 통일성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구약의 정점(頂點)으로 하는 종말론적 구속사에 기초를 두고 있다.”
4.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한 구속사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려는 구속계획이 점진적인 역사적인 과정을 따라서 종말로 가는 전 과정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오신 메시아를 말한다. 따라서 신구약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구속사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에서 시작하여 계시록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계22:20-21)로 끝을 맺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로 끝을 맺는다.
5. 정점(頂點)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가. 예수님의 자증(自證): 눅24:27, 44-45.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나. 복음서의 증언(證言): 마1:1; 막1:1; 눅3:23-38; 요1:1.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눅3:38.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다. 사도바울의 증언(證言): 딤후3:15.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라. 히브리서의 증언(證言): 히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모형론적 성경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에서 “모형”(type)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튀포스”(Gk. tupos)이며 어원적으로 침으로 생긴 자국, 형성된 것(figure), 윤곽(outline), “도장이 찍힌 것,” “틀,” “흔적을 남기는 오목한 형태,” 혹은 예시(foreshadow) 등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튀포스”는 15번 나오며 그중에 8번이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다. 신약성경의 튀포스(모형, 롬3:14; 고전10:6,11), 스키아(그림자, 골2:17; 히8:5; 10:1), 휘포데이그마(사본, 히8:5; 9:23), 세메이온(표적, 마12:39), 파라볼레(비유, 히9:9; 11:19) 등과 같은 용어들이 성경의 모형론에 해당되는 단어들이다. 특히 히9:24 그리고 벧전 3:21, 롬5:14, 행7:44과 히8:5에서는 “튀포스”를 해석학적으로 사용한 예이다.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행7: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1. 신약에서는 어떻게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하는가를 예를 들면서 살펴보아야 한다.
가. 대칭적(對稱的) 모형과 원형(Type and Antitype)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짖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에서 어떤 점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인가를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대칭적으로 설명한다. 로마서 5:14에서 아담은 모형이다. 어떤 점에서 아담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가? 로마서 5:12-21에 보면 사도 바울의 논쟁의 초점은 어떻게 아담의 죄가 아담의 죄를 짓지 않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다룬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아담의 죄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관계성을 모형과 원형이라는 대칭적인 관계에서 해석한다. 이 모형에서 예수님은 태양과 같으며 아담은 태양의 빛과 같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태양을 볼 수 없다. 눈이 부셔서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빛을 통해서 태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양이 없으면 빛이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담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의 모형적인 사건은 선명해지고 분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모형을 통해서 우리는 원형인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모형은 원형을 예시해주고 원형은 모형의 의미를 선명하게 해준다.
나. 예시적(例示的) 모형과 원형((Type and Antitype)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인한 구원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예시하는 모형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0-21). 여기서 “물은 세례(원형)의 모형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써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씻음(세례)과 부활을 통한 새 생명의 모형이다. 따라서 구약의 모형은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적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예시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점진적이며,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역사적인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죄의 씻음의 증표로서 세례의 의미를 예시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신약의 세례의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 상응적(相應的) 모형과 원형((Type and Antitype)
히브리서 8:5, 9:23-24, 10:1에서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구약의 구속사에 나타난 모형과 원형의 상응적인 관계에서 해석한다. 그 일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를 쫒지 않고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인간이 만든 성소에서 매년 죄 사함을 위한 짐승의 피 뿌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서 단번에 죄 사함의 길을 여셨음을 모형론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모형이라는 말은 “원형,” “모델”(히9:23), “그림자”(10:1)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레위 자손에 속한다. 레위인으로서 대제사장 직무는 오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제사장 직무를 예시한다(모형). 구약의 대제사장은 매년 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로 속죄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피로 속죄를 영원히 이루셨다. 십자가를 예로 본다. 인간적인 편에서 보면 십자가는 국가 반역죄 같은 중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처형의 형틀이 되지만 우리 주님이 지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 된다(고전1:18). 이와 같이 신약에서 말하는 대제사장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구약의 대제사장의 의미는 인간의 죄의식을 무마하고 표출(projection)시키는 신화적인 표현에 불과하게 된다.
라. 모형과 예언((Type and Prophecy)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선포한다. 예언과 성취라는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해서 신구약을 하나로 연결한다. 예언서에서는 선지자가 계시된 미래를 선포하는 반면에 모형은 어떤 인간적인 매개 없이 순전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실체를 통하여 미래를 가리키면서 모형의 의미를 갖는다. 모형의 의미는 당 시대에는 숨겨져 있으며 신약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 드러난다는 점에서 객관화된 예언이다. 그러나 로마서 5:14에서 보면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함으로써 모형도 사람을 통해서 예시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예언은 사람을 통해서 모형은 사물을 통해서 예시한다고 엄격하게 구분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과 성취의 관계는 직접적이지만 모형과 원형의 관계는 간접적이다.
* 상징(Symbol)과 모형(Type)의 차이점
상징(Symbol): 어떤 사물(thing, person)을 대신하여 보여주는 표상(a representation)
모형(Type): 어떤 사물(thing, person)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적 표상(a prophetic -- )
“모형은 예언적 상징(as prophetic symbol)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예언을 위하여 사용된 모든 상징들(all symbols)을 모형들(types)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형들은 상징들을 포함할 수 있으나 상징들 자체는 모형들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이방 나라들을 상징적으로 “짐승들”(beasts)로 표현하고 있으나 “짐승들은 모형이 아니며” 예언을 위하여 사용된 상징인 것이다. 모형은 예언적 상징으로 나타나고 예언적 기능을 포함하지만 예언적 언어의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내용의 이야기는 “예언적 기능을 도입하고 있으나 예언적 언어의 표현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상징(symbol)과 모형(type)은 잘 식별하고 바르게 해석하여야 한다. 아래의 몇 가지 예를 더 참고하라.
가. (창18:2에서) “반석”(rock)은 상징이며 모형은 아니다.
나. (계1:20에서) “촛대”는 상징이며 모형은 아니다.
다. (요1:29에서) “어린 양”은 상징이며 모형은 아니다.
라. (창9:13-16에서) “무지개”는 상징이며 모형은 아니다.
마. (슥4:3에서) “두 감람나무”는 상징이며 모형은 아니다.
바. (계19:8에서) “흰 색”은 상징이며 모형은 아니다.
사. (롬5:14에서) “아담”은 모형이며 상징은 아니다.
아. (FP1-5장에서) “동물의 희생제물”은 모형이며 상징은 아니다.
자. (왕상1:34에서) “예언자, 제사장, 와의 직분”은 모형이며 상징은 아니다.
차. (출25-40장에서) “모세의 장말”은 모형이며 상징은 아니다.
카. (마12:39-41에서) “고기 뱃속의 요나”는 모형이며 상징은 아니다.
타. (출12장에서) “유월절”은 예수님과 교회의 모형이다. 그러나 이 모형이 되는 사건 속에는 어린 양, 우슬초, 누룩 안든 떡, 쓴 나물 등은 모형을 돕는 상징들이다.
파. (출17장에서) “반석을 치는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예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반석이나 지팡이 자체들은 모형이 아니다.
* 모형에는 인물, 직무, 제도, 사건 등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잘 분별하여야 한다.
가. 인물(Persons): 창37-50의 요셉의 생애 중에서 그의 성품과 경험은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아들이신 예수님과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관게를 나타내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 직무(Offices): 출28장; 히5:1-5; 8:1-4에서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세의 언약 아래에 있는 대제사장의 자격과 기능에 관련된 직무는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예수님의 직무에 대한 모형들로써 제시되고 있다.
다. 제도(Institutions): 출25-40장에서는 모세의 장막성전의 제도를 다루고 있는데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우리들에게 원형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해석하고 인식하는 열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High Priest)의 원형(Antitype)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Mediatorship)가 되신다는 핵심을 나타낸다.
라. 사건(Events): 창6-9장에서는 역사적인 대홍수 사건(the event of the Flood)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마지막 때(the Last Days)에 예수님과 더불어 이루어질 일들과 해야 될 일들을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에 의하여(by Jesus) 악과 악인들에게 임할 심판의 내용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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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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