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의 비유, 그 정의와 목적 (글쓴이: 방다니엘 신학박사, 주경신학)
* 신학은 하나님(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배우는 학문이다. 이러한 신학의 연구대상은 곧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신구약성경전서)이다. 성경전서 중에서 어떠한 책을 공부하던지 또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공부를 하던지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을 중심교재로 삼고 공부하게 된다. 신학교에서는 말씀연구를 분야별로 나누어 시행하고 있다. 주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목회학, 설교학, 교육학, 선교학, 상담학, 교회음악) 등의 분야가 있으나 이 모든 분야의 기초교재는 성경말씀이다. 성경말씀을 토대로 삼지 않으면 바른 연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예수님)과 말씀 중심의 공부가 신학교에서는 바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공부하는 목적은 “비유의 말씀들”이 “하나님(예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Every Word)으로 산다”(마4:4)는 대명제 하에서 살아야만 하는 의무와 권리를 지니고 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은 하나님(예수님)과 우리들 각 사람을 “생명과 능력”으로 연결하여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여 준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들은 사복음의 기록 중에서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분량이라고 하여 “말씀의 일부분이다”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매우 위험하고 참 생명에서 이탈 되고야 만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사복음의 기록 중에서 매우 중요한 때에 또 중요한 장소에서 모든 말씀과 말씀을 하나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비유” 하나를 따로 떼어서 공부하더라도 말씀의 전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의 전후 문맥(context)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비유 자체를 알 수 없다.
* 천지창조는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혼돈과 무질서의 온 우주는 “하나님의 빛”으로 인하여 “질서”가 세워지며 유지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과 질서”를 깨닫지 못하고 “무질서와 흑암과 죽음”으로 들어가는 범죄인이 되었다. 창조의 원리는 “영원한 생명과 질서의 유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회복하여 “불의한 인간”을 “의로운 인간”으로 다시 만드는데 목적을 두고 계신다. 그리하여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여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은 곧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생애에서 드러나고 표현된다. 예수님의 사역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고 어두움에 안주하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기까지 사역을 계속하신다.”
* 위의 내용들을 요약한 것이 곧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9:5에서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입으신 예수님은 “빛”이시며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반면에 인간은 “어둠”이다. 그런데 “어둠”(인간)은 “빛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빛”(light) 또는 “어두움”(darkness)이라는 표현은 “은유”(metaphor)다. 빛은 “피조적인 빛”이 아니라 “창조적인 빛” 즉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어두움”은 “죄로 인하여 그늘과 죽음 아래에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빛”이신 하나님의 침투력은 어느 곳에 있는 “어두움 까지에도” “침투하는 능력”을 가지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간은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깨닫다”(comprehend)라는 말은 원어에서 “극복하다(overtake), 붙들다(seize)”라는 뜻으로 성경의 난외 주석에서는 “이기다”라고 설명한다. “어두움”(darkness) 자체인 인간은 “빛이신 하나님(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고 붙들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예수님)께서는 친히 “빛”으로 “어두움”을 비추어 주시고 침투하고 들어오심으로써 인간은 예수님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고 믿게 된다.
*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천국백성을 삼는 일”을 목적으로 일관하셨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설교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40일간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에서 넉넉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이 목표와 목적에 일치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강론(설교) 하시고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기본적인 구조의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상항”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어두움과 빛 사이에는 공감대"가 없었다. 무엇인가 두 사이를 하나로 연결하는 요소가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비유"다. 여기에서 “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1. 예수님은 유대인이셨다. 유대인의 역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삼고 이 땅에 오셨다.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볼 때에 유대인들은 “배움과 가르침의 구조”에 있어서 “비유의 수단을 사용한다”는 방법론이 저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의 기록에서 실증되고 있다. 이러한 실증을 볼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대중들에게 비유의 수단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하신 것이다.
가. 구약에는 잠언(잠1:1; 왕상4:29-34), 속담(삼상10:10-13), 노래(민23:4-10)의 형식을 가지고 윤리적 교훈을 주려는 “잠언 비유의 형태가 있다.
잠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proverbs)이라
왕상4: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30.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31.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32.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33.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34.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삼상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saying, proverb)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13.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민23: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5.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나. 구약에는 이야기로 교훈을 주려는 “이야기형식의 비유의 형태”가 있다. 그 대표적인 기록은 곧 (1) 나단의 비유(삼하12:1-4) (2) 요압의 비유(삼하14:6) (3) 부상당한 선지자의 비유(왕상20:39) (4) 여호와의 포도원 비유(사5:1-7) (5) 농부의 비유(사28:24-28) 등이다.
(1) 나단의 비유(삼하12:1-7): 범죄한 다윗 왕을 회복시키는 배경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2.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2) 요압의 비유(삼하14:1-8, 18-21):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회복시키는 배경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4.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5. 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8.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18. 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 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3) 부상당한 선지자의 비유(왕상20:39): 아람왕 벤하닷이 아합왕을 공격한 배경
35.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36.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37. 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그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38.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어 변장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39. 왕이 지나갈 때에 그가 소리 질러 왕을 불러 이르되 종이 전장 가운데에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그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40. 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41. 그가 급히 자기의 눈을 가린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그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줄을 알아본지라
42.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43.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왕상 21장에서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후에 엘리야와 아합이 만나는 장면: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4) 여호와의 포도원 비유(사5:1-7): 들 포도가 아닌 좋은 포도를 기대하신 주님
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5) 농부의 비유(사28:22-28):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결과를 기대하시는 주님
22.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
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When he has leveled the surface, does he not sow caraway and scatter cummin? Does he not plant wheat in its place, barley in its plot, and spelt in its field?)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2. 예수님은 히브리인의 사상과 생활구조를 가지고 백성 가운데서 사역하셨다.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지 않고 생각하신 바를 생활과 행동으로 표현하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나 사색에 대한 설명의 말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생활과 행동의 모습이 곧 예수님의 모든 몸의 움직임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특기할 사항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변화와 기적이 말씀대로 발생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현상”이 일어났으며 동시에 “창문을 통하여 전개되는 만상을 보고 배우고 깨닫게 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거울 앞에서의 모습은 현실의 발견인 반면에 창문 밖에서의 모습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거울로 보던지 창문으로 보던지 반드시 눈으로 보이는 형상이 전개되어야만 한다. 그 형상이 움직이든지 움직이지 않던지 간에 “분명한 영상세계의 전개”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듣고 보고 깨닫고 달라지는(변화) 실질적인 효과가 늘 나타났다.
가. 히브리인의 사상과 생활구조를 가지고 “분명한 영상의 세계를 전개”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유대인의 랍비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공통성이 있었으나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키스트메이커(Simon J. Kistmaker)는 그의 저서 “예수님의 비유”(The Parables of Jesus)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랍비의 비유와 예수님의 비유와의 유사점은 단지 형식에만 있다. 랍비의 비유는 율법을 설명하거나 강조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율법 구절이나 교리를 설명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새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위대한 주제를 가르치셨다. - 천국, 하나님의 사랑, 은혜, 자비, 하나님 아들의 재림, 인간의 존재와 운명 등. 랍비의 비유는 적용 이상의 어느 것도 가르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비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은 비유들로써 새로운 진리를 들어내셨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드러내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계시다.
나. 예수님은 지상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하늘의 뜻을 밝혀주셨다(an earthly story with a heavenly meaning)는 놀라운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에게는 만물이 하나님의 옷자락이셨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활동을 인간의 일반생활 속에서 보여주셨다. 어떤 경건한 청교도 한 사람은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고도 “하나님, 이 꽃은 곧 떨어지고 말겠지요. 이 죄 많고 타락한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취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무엇을 알려주셨는가?
1. 우리가 구약의 비유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본 것과 같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들은 결코 심판과 저주를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구원과 은혜를 약속하신 것이 중요한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단의 비유, 요압의 비유, 부상당한 선지자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농부의 비유 등 모두가 인간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비유의 말씀 속에서 핵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속에서는 표적과 이적이 따르는 놀라운 교훈의 말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은혜 가운데서 비유의 말씀을 대하고 있다.
2.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미리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생애 중의 현장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의 발생과 더불어 나오게 된 말씀이며 이야기들이다. 비유의 말씀이 생기게 된 전후관계의 배경이 반드시 있었다는 사실이다. 돌발적 상항에서 말씀하시고 가르쳐주신 내용들이다. 1세기의 팔레스틴 지역, 구약의 오랜 역사를 가진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정치와 그리스 문화권의 영향이 팽배한 사회 환경 중에서 베풀어진 말씀들이다.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이방인인 우리들은 그때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말씀의 전후관계(context), 그 당시의 여러 가지 배경(background), 비유 속에 언급된 자연현상(nature) 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비유 속에 감추어진 비밀(mystery)을 캐어낼 수 없다.
3. 비유의 말씀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박해하는 자들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역할을 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는 말씀의 축복과 아름다운 결단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두 가지의 말씀을 인용할 수 있다.
첫째,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둘째,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4. 한 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수님께서 수 많은 비유들을 들려주신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비유의 말씀으로 교리의 원리를 가르치려는 것은 위험을 초래한다. 비유에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구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나타내는 비유
* 천국 잔치 비유(눅14:15-24; 마22:1-10) * 결혼식과 금식 비유(막2:18-20)
* 겨자씨 비유(막4:30-32) * 누룩 비유(마13:33)
* 날씨 징조 (눅12:54-56) * 나누인 집(막3:23-27)
나.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비유 (인간의 결단을 요구함)
* 감추인 보화(마13:44) * 진주 비유(마13:45-46)
* 불의한 청지기 비(눅16:1-8) * 망대와 전쟁 비유(눅14:28-32)
* 열 처녀 비유(마25:1-13)
다. 성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비유
* 은혜로운 아버지 비유(눅15:11-32) * 포도원 주인 비유(마20:1-16)
* 두 빚진 자 비유(눅7:41-43) *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눅18:9-14)
라.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는 비유
*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 * 그물 비유(마13:47-50)
* 알곡과 가라지 비유(마13:24-30, 36-43)
마.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에 대한 비유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 * 벗의 떡 강청 비유(눅11:1-13)
* 빈집의 비유(눅11:23-28)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3-21)
* 큰 잔치의 비유(눅14:15-24) * 잃은 양 비유(눅15:1-7)
* 잃은 드라크마 비유(눅15:8-10)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
* 므나의 비유(눅19:11-27)
* 일반적인 비유의 개념
잘못된 비유의 개념은 “말을 비틀고 꾸미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라고 한다. “비유”((比喩)라는 한자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는 뜻을 가진 “유”(兪)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헬라어에서도 “비유”(Gk. parabole)는 “옆에”(Gk. para; side)와 “놓다”(Gk. bole; put)의 합성어이다. “비유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타내려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타남”(reveal)과 “숨김”(conceal)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나타남”(reveal)과 “숨김”(conceal)이 어떻게 될 것인지 결과적인 비교(compare)와 대조(contrast)의 작업이 요구된다. 비유가 무엇인지는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 비유란
가. 어떤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짤막한 풍유(諷喩)적 이야기를 말한다.
나. 도덕적 혹은 영적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일상생활의 사건들을 사용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말한다.
다. 일상 중에 흔히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실들을 사용한 일종의 이야기형태로 알려진 예화를 말한다.
라.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다른 사물을 이끌어 쓰는 수사적 방법이다. 이때 나타내려는 대상을 원관념(元觀念)이라 하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끌어들인 매개물을 보조관념(補助觀念) 이라 한다.
(예) 꽃 같은 청춘 - 청춘'이 원관념, ‘꽃’이 보조관념
2. 비유와 같이 비교나 대조를 나타내는 형태들은 아래와 같이 다양하다.
가. 우화(寓話): 이것은 헬라문학 형식으로서, 호머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보이는 사물로써 보이지 않는 사실을 묘사하는 문학적 기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우화란 어떤 진리나 격언을 설명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다(삿9:8-15, 왕하14:9). 우화의 근본 사명은 이솝(Aesopes)의 우화에서 볼 수 있듯이 외형적인으로는 비유와 유사하지만 고상한 주제를 취급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저차원적 허구로 되어 있다.
나. 잠언(箴言, Proverb): 어떤 잠언을 보면 비유의 배종이 나타나지만(삼상10:12; 시78:2; 잠1:6; 마24:32; 눅4:23) 잠언이 비유와 다른 점은 일반적으로 짧을 뿐 아니라 고상한 주제에 대해 취급하지 않으며 이야기 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 우의(寓意,Allegory) 또는 풍유(諷喩): 우의나 풍유를 비유와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은 은유의 연장이라 볼 수 있는데 비유보다 덜 신비롭고 덜 숨겨져 있다. 직유는 유사성을 들어 비교하고 은유는 상상 혹은 회화에 의한 비교라고 한다면 우의(풍유)는 암시에 의한 비교라고 할 수 있다. 우의(풍유)의 특징은 언제나 과거형으로 되어 있고 미래형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원관념은 뒤에 숨고 보조 관념만 겉으로 나타나 있어 본뜻을 독자가 짐작하도록 하는 암시적 풍자적인 비유법(allegory)이다.
라. 직유(直喩, similitude): 자연 현상이나 일상생활에서 나온 단순한 비유이다. 동사를 여러 개 사용하며 대체로 현재시형이다. “산 위에 세운 성”(마5:14)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10:16), “떡을 달라면 돌을 주고 ....”(마9:9-10), 누룩비유(마13:33)등은 이 부류에 속한다. 직유는 단순히 유사점을 말한다. 즉 비교되는 두 사물의 일치점을 말한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40:6-7).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같이’ ‘처럼’ ‘양’ ‘듯이’ 등의 매개적인 결합어를 사용하여 연결시키는 직접적 비유법이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마. 은유(隱喩, metaphor): 간단한 주어나 객어(客語)로 되어 있든지, 두 낱말이 한 서술 동사로 연결되어 있는 짤막한 진리의 말이다. 흔히 잘 아는 사상(事象)을 교훈이나 사상(思想)에 적용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과정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직유의 “.. 같으니”(like 혹은 as)란 단어를 쓰지 않고 비교의 뜻이 암시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매개어가 사용되지 않고 ‘A는 B이다’ 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비유법이다. 즉 원관념이 보조 관념 속에 내포되는 것이다.
바. 유형(有形) 혹은 동형론(同形論, Type or Typology): 그 뜻은 “도장” 또는 “도장을 누르다”란 말이다. 이스라엘 종교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이 후에 일어난 일과 같은 의미를 가지며 한 쪽이 다른 쪽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가 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통일을 이루며 태초로부터 종말 때까지 직선적으로 전진한다는 신앙을 전제하며 구속사의 통일성이란 신념에서 동형론은 독특한 방법이다.
사. 예화(例話, Illustration): 이것은 설교자나 강연자가 자기가 논증하려는 사실을 강조해 주며 그 이해를 도와줄 만한 사례를 말한다. 어떤 인물의 전기나 그 한 토막이나 과거의 경험에서 얻어진 이야기 혹은 지어낸 이야기를 끼어 들이는 것이 예화이다.
아. 상징(symbol): 이것은 세상의 어떤 사물을 들어 영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로서의 예화 외에 연출한 비유가 있다. 예수님이 말로써 하시는 대신에 행동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계시하신 일들을 말한다. (1) 최후의 만찬 (2) 예루살렘 입성 (3) 무화과나무의 저주 (4) 기적들을 들 수 있다.
* 비유 말씀의 해석상 주의를 요하는 점
1.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의 비유만큼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비유의 근본원리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유란 전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비유의 각 부분은 바로 이 근본 진리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비유를 해석하려면 그리고 그것을 바로 적용하려면 앞뒤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 그 중심적 교훈과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비유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의 극단을 피해야 한다. 즉 비유에서 너무 많은 교훈을 찾거나 너무 적은 교훈을 찾는 일이다. 이 말은 비유의 모든 부분에서 의미를 억지로 쥐어짜거나 아니면 비유를 단순히 보조적인 것으로만 봐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2. 우의나 풍유의 해석을 피하여야 한다. 어거스틴은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풍유(Allegory)로 잘못 해석한 실례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본문 중에서 어떤 사람을 아담으로 보고, 예루살렘은 평강의 하늘의 도시로서 아담은 여기서 떨어졌다고 했다. 여리고는 달을 뜻하고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했다. 강도들은 마귀와 그 졸개들이고, 옷을 벗겼다는 것은 아담이 영생을 상실한 것을 말하며, 때렸다는 것은 그를 죄 짓도록 설복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에 억압되어 살고 있는 한 그의 영혼은 죽은 것이어서 거반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들의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원을 위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함을 뜻한다고 했다. 사마리아인이란 보호자를 뜻함으로 주님 자신을 말하고, 상처를 싸매 준다는 것은 죄를 억제한다는 것이며, 기름은 선한 소망의 위로며, 포도주는 뜨겁게 열심으로 일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고 하였다. 짐승이란 예수님의 육체를 말하고, 짐승에 태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신앙이라 하였다. 주막은 교회로서 나그네 인생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튿날이란 주님의 부활 후를 뜻하고,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두 계명이거나 이생과 오는 세상에서의 생명에 대한 약속이며(두 가지 성례), 주막 주인은 사도 바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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