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7일 화요일

       4. 예수님의 비유,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 (3)      글쓴이: 방다니엘, 신학박사(Ph.D)
 
*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에 관한 비유들이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18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누가복음 10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 이러한 천국의 비유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는 전후관계를 잘 살펴야 하며 또 그 배경을 아울러 살펴야 한다. 전후관계의 고찰이라는 것은 마태복음에서는 18장 전장의 내용들과 누가복음에서는 10장 전장의 내용들이 그 비유가 언급되기 위한 일관성 있는 기록상의 흐름이 된다. 특별히 유의할 점은 위의 두 비유가 오직 그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그 복음서의 특성과 어떤 관계와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발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는 마태복음 전체의 특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 전체의 특성과도 관계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기자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할 때에 이와 같은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언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 마태복음은 천국”(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이라는 총제목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일정한 5개의 주제를 설교의 중심으로 삼아 정리하고 전개시켰다.
1) 산상보훈(5-7),
2) 제자들에 대한 교훈(10)
3) 천국 비유(13)
4) 교회에 관한 말씀(18) ***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 종의 비유(23-35)가 포함 됨)
5) 최후심판(24-25)
이러한 설교의 주제에서 매 주제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finished)”라는 문장으로 끝내고 있다(7:28, 11:1, 13:53, 19:1, 26:1). 마태복음에는 이루려하심이라” (fulfilled)는 말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구약이 예언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천국의 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태복음 18장에서 교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교회”(부름 받고 선택된 성도, 천국백성)천국의 왕(메시야)과 천국백성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의 말씀을 하여주신다. 마태18장은 아래와 같은 일곱 항목으로 분석할 수 있다.
 
I. 마태복음 18:1-35의 기록에서는 천국의 왕(예수님)과 천국백성이 된 자들의 참된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며 그와 같은 자세는 곧 용서가 신앙생활의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과 직결되어 있다.
.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천국사람(18:1-4)
(요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천국인(18:5-6)
(요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
 
.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의 화(18:7-9)
(요절) “실족하게 하는 일들(NASB. stumbling blocks; KJV. offences; NIV. cause people to sin)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
 
.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고 찾는 아버지의 뜻을 이룸(18:10-14) - 잃은 양의 비유
(요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8:10)
 
. 범죄한 형제를 도로 얻는 도리(18:15-18)
(요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과 중보기도(18:19-20)
(요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19-20)
 
. 헤아릴 수 없는(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끝없는 용서(18:21-22)
(요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
 
.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 종의 비유(18:23-35)
(요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1.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 종의 비유(18:23-35)에서 살펴볼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본문에는 ”(debt) 또는 빚진 자”(debtor)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24, 27, 28, 30,32, 34). 액면 그대로는 빌린 돈을 갚아야 할 의무와 의무를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이 용어를 ”(sin), “범법”(offense) 또는 죄인”(sinner) “범법자”(offender)를 대신하는 상징적 용어로 사용한다. 따라서 이 비유를 대하면서 가득한 죄악을 품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적용하여야 한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 ”(debt) 또는 ”(sin)는 반드시 갚거나(repay, pay back) 해결하여야만 하는 의무감을 수반하고 있다. 만일 해결하지 못하면 감금, 처형, 사형 등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닥쳐올 어두운 결과에 대한 긴장, 불안, 근심, 걱정이 늘 있다.
 
. 불쌍히 여김”(pity, mercy, compassion; 27, 33)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나오고 있다. 이 말은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접근하여 오고 있음을 아래에서 살펴본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비유의 본문 바로 이전에 베드로는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 중에 용서”(forgiveness)라는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대답하여 주시면서 그러므로 천국은 . . .과 같으니라고 하시면서 비유의 이야기를 하여주시고 천국은 . . . 종들과 . . . 임금과 같다고 하셨다. 천국의 왕과 천국백성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결론적으로 주신 핵심의 말씀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35)는 것이었다. 왕과 백성은 끈을 수 없는 용서의 관계가 맺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용서의 행위가 있기 이전에 용서의 마음이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용서”(forgiveness)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참다운 용서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 용서”(forgiveness)라는 헬라원어(Gk. aphesis)풀어놓음, 면제, 방면, 석방” (release) 또는 말살해줌, 취소해줌”(cancellatio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단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누구를 위하여(for) 무엇을 주는 것(giveness)이다. 받는 행위가 아니라 주는 행위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용서”(forgiveness)의 결과는 반드시 되찾음, 상환, 구출, 구원, 구속”(redemption)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debt)이나 ”(sin)는 문제를 야기하여 감금, 죽음에 직면하였으나 용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 더 이상 빚쟁이,” “죄인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는 이렇다.
 
. 용서”(forgiveness)는 매우 강력한 용어”(powerful word)로써 아래의 세 가지 실질적인 내용을 행사한다.
(1) 법률적 효력(legal effect): 범죄에 해당하는 형벌(죽음)이 면죄됨. 사형언도를 받았더라도 면제 석방된다. 율법(법조항)은 사형을 언도하였으나 용서의 선포는 율법을 능가하여 빚이나 죄가 없는 자유인이 됨.
(2) 윤리적 효력(ethical effect): 마음 속 양심에서 솟아오르는 자책과 죄의식의 청산. 용서에 기인한 속죄(redemption)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함.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인 욕망의 삶에서 해방 됨.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3) 개인적 효력(personal effect): 하나님(예수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며 사랑하는 주인과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짐. 우리 각자의 를 속량하여주신 큰 대제사장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은혜의 생활을 계속함(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설교말씀이다. 말씀하시던 중에 용서의 비유를 하셨다.
(1) 18:1에서 제자들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하면서 질문을 하였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the greatest)는 누구이겠는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천국의 임금님, 예수님이시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두고 제자들은 자기들도 깨닫지 못하는 말들을 하였다.
(2) 예수님은 몰지각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겸손,” “작은 자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잃지 않는 관계,” “늘 마음을 함께하는 기도모임등을 가르쳐주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게 된 것이다.
(3) 비유의 첫 번 내용은 임금님과 종들(신하들)의 결산의 장면이다. 이것은 왕과 신하의 궁중모임의 장면이다.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용서를 베푸신다. 왕은 결코 사랑하는 신하를 옥에 가두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시대에 동족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 없었다. 천국의 모형인 교회에는 결코 감옥은 없고 사랑의 법만 존재한다. 천국의 왕은 천국백성을 절대로 감옥에 가두질 않는다.
(4) 의 탕감을 받은 신하()은 왕궁모임에서 밖으로 나간8) 이후에는 왕과의 관계를 떠난 배신행위를 하였다. “왕의 사랑(긍휼)의 법, 용서의 법에서 이탈하고 일반세상의 보복행위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과 생활의 이중성, 믿음과 행위가 다른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천국백성은 천국왕의 마음과 뜻을 따르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불쌍히 여김과 마음의 용서가 무엇인지 몰랐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II. 누가복음 9:1-2에는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권세능력이라는 신임장을 주셨다. 이 신임장이란 것은 몸에 걸친 가운도 아니며 손에 들려진 임명서서류 뭉치도 아니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실질적인 신임장이었다.
1. 당시의 종교지도자(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정식훈련을 받고 자격을 부여하는 특수한 신임장을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다. 사도의 표된 것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고후12:12)이었다.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칠 때마다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이었다.
2. 신임장을 주신 예수님도 형식적인 신임장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표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능력을 보고 니고데모(바리새인 랍비)는 전통적 교육배경이 없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면서 밤에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라고 고백하였다(3:2).
3. 사도들도 권세능력으로 기적을 베풀게 하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복음의 증거가 나타나게 하여주신 것이다. 권세능력은 말씀으로 인하여 나타났다. 오늘날도 사역자의 실질적인 신임장은 말씀”(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예수님의 이름으로 해하여지는 권세능력이다. 주님이 신임장을 주셔야만 구원사역에 임할 수 있다.
4. 12사도들은 모든 권세능력을 예수님에게서 거저 받았다. 따라서 주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분부하셨다. 한때 사도 베드로가 사마리아에서 성령님의 능력을 베푸는 것을 본 마술사 시몬은 돈(money)을 내어 놓으면서 나에게도 이런 권능을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이런 요청에 대하여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8:20)라고 베드로는 말하였다. 거짓교사나 삯군 목자들은 이와 같이 탐심을 가지고 천국건설을 방해하므로 이런 자들은 생명을 멸망케 한다(벧후2:1-3).
 
* 누가복음 9:3에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예수님은 일러주셨다. 마태복음 10:10에서는 이는 일군이 자기의 먹는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다.
1. 예수님 당시에는 여행하는 사람들이 굵은 허리띠와 같은 동전 주머니에 금, , , 등으로 된 화폐를 집어넣고 허리에 감았다. 또 음식 담은 주머니를 메었고 혹시 노숙할 경우를 대비하여 담요를 대신하는 겉옷 하나를 더 준비하였고 도보여행에 필수적인 신을 한 벌 더 마련하였고 강도나 맹수의 공격에 대비하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이러한 준비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개인 업무의 여행이나 상업차 여행에 있어서는 준비를 철저히 갖추는 것이 상례였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여행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분부하셨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천국복음 전도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 아버지께서 다 예비하여 주신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친히 준비하여 주신다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도여행이라는 것이다. 전도여행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로 알고 시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 중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이 세상의 이해타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생명의 작업이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육적 작업이 아니며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는 영적 작업이다. 수평과 수평이 만나는 지평을 넓히는 것이 아니며 수직과 수평의 만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몸의 필요를 위한 것을 공급하여주지 않으시고 영의 구원에 필요한 권세능력을 주셨고 말씀으로 역사하도록 가르쳐주셨다.
 
3. 일군이 자기의 먹는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전도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반드시 공급된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나가라는 가르침이었다.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8:14)고 하였고,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니라”(딤전5:17-18)고 하였다.
4.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 질문에 제자들은 없었나이다”(22:35) 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천국백성들의 생활은 신령한 것을 서로 주고받을 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을 모으며 나누어 쓰는 것이 특징이다. 복음전도자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을 열심히 전하여야 할 것이며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은 전도자들에게 아낌없는 대우로 뒷받침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 누가복음 9:4-5(cf. 10:11-15; 6:10-11)에서 예수님은 전도자가 도달한 마을이나 도시에 가서 보여주어야 할 태도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1.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라(10:11). 그 마을에 복음이 잘 전해지려면 전도자를 따뜻하게 받아드리는 사람과의 사귐이 중요하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누구에게나 호의로 받아드려질 수 있게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 합당한 자의 집에 떠날 때까지 머무르라(10:11). 머무는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기면 여러 가지 오해를 자아내게 된다. 전도자는 편안함과 안일함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는 어느 환경에서라도 복음이 전하여지느냐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3. 합당한 자의 집을 위하여 평안을 빌어라(10:5). 전도자는 머물고 있는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전도자는 말씀의 대언자이므로 그의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11). 예수님은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10:6) 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사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방을 축복하였고 , 축복하고는 저주하지 않았다”(12:14; 벧전3:9).
 
4.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곳의 먼지를 발에서 떨어버리라(9:5). “먼지라는 것은 도덕적인 행위의 결과나 영향력을 의미한다.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것은 그들의 배척행위에 사도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구원의 소식을 배척하는 것은 전도자를 배척하는 것보다 더 엄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복음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으나 전도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 전하여야 한다.
 
* 누가복음 9:46-48에는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는 해답을 주신다.
1. 예수님이 쓰시던 아람어로 아이”(child)”(servant, slave)은 동의어이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은 곧 섬기는 종이 되라는 것이다. 천국백성은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이며 자기를 높혀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섬기는 자 곧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사셨다. 어린 아이에게는 언제나 순종을 요구한다. “말 잘 들어!”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셨다.
 
2. 공동체(교회)의 구성원이 되면 왕국백성으로서 늘 하나님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그 사랑과 보호를 알고 느끼며 산다.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영적 지식의 소유자로 성장시켜 준다. “나는 . . . .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6:7).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3.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18:16-17).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드리는 자들이다. 어린 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순종이다. 배우고 배운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삶이다. 오직 순종으로 성장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18:3-4).
 
4. 천국백성은 자기는 죽고 없다. 어린 아이에게는 아버지만 있고 아버지만 따른다. 제자는 예수님에게 배우고 그대로 행하고 살면 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과 하신 일을 본대로 들은 대로 우리들에게 옮겨 놓으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자들의 지식은 하나님(예수님)의 임재 가운데서 형성되고 시행된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고 약속하신 것은 우리들의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신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목적과 진행이 바로 이러한 것임을 보여주셨다.
 
* 누가복음 10:30-37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1. 율법의 대강령은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이웃 사랑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나를 낳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낳으신 형제(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집안 식구의 일을 말한다.
 
2. 그런데 문제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는 질문을 하는데 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이면 사랑을 베풀 수 있으나 만일 원수라면 사랑할 수 없다는 율법의 규정과 선민사상에 의한 고달픔이다.
 
3.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신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해답은 명료하다. 이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4. “네가 이웃이 되라는 놀라운 진리의 말씀이다. 계명은 이렇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웃의 출처는 네 자신이다. 네 몸에서 이웃이 나왔다는 가르침이다.
창세기 220-25의 아담의 기록에서 이웃인 하와가 생성되어 출현하는 놀라운 사건을 기억하여야 한다.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아담의 몸에서 첫 번째 이웃인 하와가 나왔다.
. 아담은 첫 번째 이웃인 하와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 에베소서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 하와가 먼저 범죄 하였으나 아담은 그 하와의 범죄에 동참하였다. 하와는 아담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며 둘이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 아담과 하와가 뗄 수 없는 이웃의 관계를 이룬 사실에 대하여 성경말씀은 비밀이라고 하였다.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떠나서 우리들의 이웃이 되고 우리를 사랑하고 돕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이웃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 우리 성도는 예수님과 뗄 수 없는 한 몸을 이룬 지체다.
. 로마서 14:7-10의 말씀은 이웃을 위한 성도의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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