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1일 토요일

    6. 예수님의 비유,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 (5)     글쓴이: 방다니엘, 신학박사(Ph.D)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6:13)
 
* 여기에서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5)라는 제목은 천국백성은 천국의 왕과 돈을 섬길 수 없다는 핵심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비유의 내용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6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마태복음 25달란트의 비유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여기에 나열된 천국백성의 비유들은 ”(재물; NIV. money; KJV. mammon; NASB. wealth)과 관련된 내용들을 주제들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천국왕)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는 말씀은 요절이 된다.

1. ”(mammon, money)은 지상의 모든 구조의 힘과 원동력이다. “예수님”(천국왕)의 권세와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야만 하는 천국백성이 만일 을 의지하고 섬긴다면 예수님을 떠난 것이며 시험에 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가 있게 된 배경과 흐름을 누가복음 15장에서 찾으려면 천국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천국왕)을 섬기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다가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사실을 밝혀내어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하나의 중요성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나 이제는 눅16장의 비유들과 일관성 있는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 중요한 하나는 왜 잃어버리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돈과 재물에 미혹되어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2. 하나님(천국왕)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에서 재물의 시한부적 제한성하나님의 영원성을 비교하여 올바른 가치관이 어디에 있음을 천국백성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3. 그러므로 하나님(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결여(결핍)된다는 것은 영원성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양이 목자를 잃었다는 것은 목자를 섬기는 자리에서 떠나서 재물을 따라갔다는 뜻이다. “양은 목자를 섬기고 따르는 중에 얼마든지 재물()을 먹고 취하고 만족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시편 23편에서는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며 따르므로 양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산다는 결론을 맺게 되는 것이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4. 재물”(mammon)이나 달란트”(talent)의 사용은 하나님(예수님, 천국왕)을 섬김과 함께 시행할 때에 그렇게 하는 청지기(천국백성)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상찬을 받는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 16장에서 천국백성은 영원한 생명과 삶을 지금 준비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영원한 안식의 날을 하루로 본다면 현세의 삶은 안식의 전날 밤”(the eve of the Sabbath)이다. 이 밤에 영원한 축복의 안식에 들어갈 준비를 잘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안개와 같이 곧 사라진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자산(시간, 건강, 재물)을 총동원하여 늦기 전에(=생명을 잃기 전에) 영원을 준비하는 가르침을 예수님에게서 받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천국백성의 도리이다.

* 누가복음 16:1-9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였으므로 주인에게 칭찬을 들었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해설하시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곧 영원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셨다.

1. 비유에서 언급되고 있는 청지기는 문제아다. 그는 재물을 허비하는 낭비벽(재물을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함)이 있었고(1), 땅을 파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였고(3), 누구에게 빌어먹지 못할 만큼 자만심이 대단하였고(3), 사무를 부정직하게 처리하는 교활한 자(4-7)였다. 이러한 그의 못된 성품에서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특기를 들추어내시며 배울 것이 있다고 하셨다.
 
2. 청지기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가?
첫째, 주어진 기회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지혜가 있었다.
둘째. 자신의 처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셋째,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친구를 도울 줄 아는 사회적 협동심이 있었다.
넷째, 자기의 내일 일(=노후대책)을 미리 준비하는 원시안을 가지고 있었다.
 
3. 본래 청지기란 집 관리인이란 뜻으로 집을 다스리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열의와 재능과 시간을 다 기울여 주인의 소유물을 자기의 재량껏 사용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4. 그런데 본문의 청지기는 탕자와 같이 주인의 재물을 탕진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청지기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청지기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서 직업을 잃게 된 자신의 처지와 암담한 미래를 직시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에 친구를 도와주고 호의를 베풀어 놓으면 자기의 앞날에 혹시 모종의 유익이 될 것을 기대하고 그의 청지기 권한을 최대한도로 발휘한 것이다.

5. 유대인은 구약시대로부터 동료에게 이자를 받아내지 못하는 율법의 제한에 묶여 있었다. 이자나 고리대금은 도적행위로 취급하였다.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5:35.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36.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23: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 그런데 청지기들은 주인의 재산을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증식시키는 암거래의 비결을 실용화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0가마를 꾸어주고 2가마를 이자로 받아야 할 경우에 서류에는 12가마를 꿔준 것으로 기록하여 이자를 안 받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6. 본문에서 청지기는 감람유 100말을 50말로 탕감해주고, 100석을 80석으로 탕감하여 준 두 가지 예를 열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탕감해 준 분량들, 즉 감람유 50말과 밀 20석은 이자로 받아낼 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람유를 50말로, 밀을 80석으로 고쳐 쓴 것은 주인의 본래 자산(원금)의 분량이므로 이것만 받으면 주인의 자산에 결손이 없게 되며 또 율법에도 저촉되지 않는 것이다.
 
7. 감람유 100말이란 감람나무 150그루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이며, 100석이란 100에이커라는 방대한 토지()에서 수확되는 양이다. 이 청지기는 엄청난 분량과 고리대금을 탕감해 줌으로써 빚 진자에게는 원가만을 갚게 하는 율법의 원칙으로 은혜를 베풀었고 주인에게는 손해도 유익도 없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8. 본래 재물이라든지 돈이라는 것은 불의의 온상이다. 결코 소유물 자체는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돈을 가지고 세계를 다닐 수 있어도 천국에는 갈 수 없고, 돈은 만능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행복을 구매하지 못한다. 실재로 돈이란 탐욕과 경쟁, 부패와 정욕을 가져오는 위험한 도구다. 오직 돈을 위하여 시간과 열정, 재능과 생명을 다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지적함이 마땅하다. 모든 삶을 현세에만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불의의 온상에서 해고될 때에 갈 곳을 예비해 놓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비유의 말씀이다.

* 누가복음 16:10-13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참다운 제자들이 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여 내일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말씀하여주셨다. 돈을 좋아하는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제자들이 그들의 누룩과 같은 행위에 물들지 않기를 예수님은 기대하신 것이었다.
1.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육체의 세계와 신령한 세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육체의 세계는 재물의 세계이며 신령한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다. 전자는 불의하며 후자는 참되며, 전자는 작은 것이며 후자는 큰 것이며, 전자는 이 세대의 아들들의 것이며 후자는 빛의 아들들(제자들)의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쳐주셨다.
 
2. 불의한 청지기는 육체의 세계에서 사는 지혜를 보여주었지만 예수님의 백성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신령한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의 아들들이나 빛의 아들들은 똑같이 불의의 재물을 사용하지만 그들은 세상의(지상의) 내일을 위하여 투자하며 제자들은 영원한(천상의) 미래를 위하여 투자한다는 엄청난 큰 차이점이 있다. 그러면 천국백성의 바른 도리란 무엇인가?
 
. 올바른 천국백성은 오직 한 번 주어진 인생의 기회를 잘 사용한다. 인생의 종말은 곧 닥아 온다. 돈을 벌수도 없고 사용할 수도 없는 때다.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돈과 힘과 시간은 자기를 지키고 친구를 사귀고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신앙의 척도는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평가된다. 이때에 사귄 친구는 저기에서도 영원한 친구가 된다.
 
. 올바른 천국백성은 작은 것에 충성하고(10),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고(11), 남의 것에 충성하여야 한다(12)고 예수님은 분부하셨다. 시간, 기술, 노동력 등을 귀중한 자산으로 알고 다른 사람의 자원을 조금이라도 도적질 하여서는 안 되며 또 우리들이 가진 자원을 잘 쓸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도 믿음직한 성도가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다. 또 충성치 아니하고 믿을 수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큰 것, 참된 것, 신령한 것을 맡기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 올바른 천국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받은 재물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한다(13). 올바른 백성은 재물과 돈을 섬기는 노예나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운행된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3.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모든 과학적 법칙과 사회학적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나왔다. 눈에 보이는 일상적 활동에 불충성하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생활에도 불충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전 생애를 투자하여 영원한 세계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누가복음 제16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 누가복음 16:14-18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쳐주셨다. 이 교훈을 옆에서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비웃었다. 저들은 돈을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없다. 예수님은 돈과 부요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져온다고 말씀하여주셨다.

1. 부요한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나 하나님에게는 증오의 대상이라고 하셨다(15).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외모를 꾸미고 선행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우월성을 내세웠다.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잘하고 행위로는 율법에 어긋남이 없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하나님은 부요와 선행 이전에 먼저 속마음을 보신다.
 
2. 사람의 부요와 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모든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메시아 예수님의 오실 것을 가리켰으며 예수님에게서 모든 것이 완성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가리킴으로서 구약시대는 마지막을 이루었다. 예수님 이후로는 메시아의 복음이 설교되면서 그 복음을 듣고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천국백성이 되도록 하셨다. 본문에서 침입하다는 원어는 힘 쓴다는 뜻을 가리키고 있다. 복음을 듣고 사람의 육체적인 모든 능력을 부정하고 영혼을 살리려고 힘 쓰는자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라고 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도 자기들의 부요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3. 사람의 부요는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보다도 못하다고 하셨다(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천지는 없어지고 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어떤 부요보다 생명의 말씀 한 마디가 더욱 귀하고 중하다.

4. 사람은 부요와 돈으로 음란한 죄악에 쉽게 빠진다고 하셨다(18).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고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바리새인들은 행위를 아름답게 꾸몄으나 마음으로는 탐욕과 거짓이 가득 차 있었다. 유대인들은 여자를 물건과 같이 여겼다. 남편이 원하면 증인을 세우고 어떤 구실이라도 내세워 이혼장을 써줄 수 있었다. 이러한 병폐는 많은 가정을 파괴하였다. 가정은 신앙을 아름답게 성장시키는 온실이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에서 신앙은 정상적으로 성장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부요하기 때문에 간음과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상항을 신랄하게 파헤친 것이었다. 돈과 재물을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없다. 오히려 생명의 말씀으로 육체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 누가복음 16:19-34에서 예수님은 만약 돈을 사랑하고 부요를 즐기는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영의 세계의 실화를 들어 말씀하여주셨다. 영의 세계를 외면하고 육의 세계에 집착하여 자기들의 육체만을 위하여 돈을 허비하는 자들의 내세는 무서운 형벌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자기가 신앙인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재물을 잘못 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매우 심각한 교훈의 말씀이다.
1. 한 부자는 매일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고 즐겼다. 이 정도면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높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만장자는 온갖 허물과 죄를 가지고도 그의 부요한 재물로 인하여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에 갈급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많은 자도 죽어야만 한다. 그 부자의 죽음은 애도를 받으며 장엄한 장례식을 치루고 세인들의 환송을 받고 땅에 묻혔다.
 
2. 좋았던 짧은 생애와는 전혀 다른 영원한 영의 세계가 시작된다.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것이다. 육체의 세계와 보이는 세상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3. 본문의 부자는 죽자마자 음부에 들어가 영원토록 뜨거운 불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천국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음부의 뜨거운 불 속에서 듣게 된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에 너의 좋은 것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라. 이제 너는 여기서 고민을 받느니라”(25). 세상에서 목마름을 전혀 몰랐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목마름과 갈급함이 무엇인가 알게 된다. 생수로 자기의 혀라도 축여보았으면 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구를 간절하게 추구한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불가능한 것이며 또 단호하게 거절당하고야 만다.
 
4. 부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청지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쾌락만을 위하여 살았다. 그는 내세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쓰지 못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심판과 형벌이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지옥불 속에서 뒤늦게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는 자기 형제 다섯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으므로 필경 음부의 불 못으로 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자기 형제의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만일 죽은 사람이 영의 세계(천국과 지옥)을 보고난 후에 다시 살아나서 현세의 자기 형제들에게 간증하면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스스로 같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아니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5.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 하리라”(31). 영의 세계의 놀라운 일들을 현세의 부요한 자들이 들으면 구원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인 나사로가 죽고 난 후에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서 다시 살려주는 큰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부자들인 바리새인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큰 기적을 보고 들었으나 믿음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다(12:10). 기사와 이적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

6. 구원의 역사는 기적과 함께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복음은 현세과 내세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준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의 재물을 청지기의 마음으로 잘 쓸 수 있다. 현세에서 재물과 돈을 잘 사용하면서 영원한 천국생활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며 믿음으로 실천하게 된다.
 
* 누가복음 16:19-31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성품을 말씀하시면서 참다운 신앙인이 현세와 내세에서 보여주어야 할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여주셨다.
1. 첫째, 나사로는 그의 이름이 기억되었다고 하셨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22),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 . .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25)라고 하였다. 나사로(Lazarus)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이다. 나사로는 자기가 비록 가난하고 병들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버려진 음식을 먹고 살았으나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신앙인이었다. 부자는 현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이 자자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어서 그가 죽은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언급도 안하셨고 단지 돈을 잘못 사용하였던 어리석은 한 사람으로만 취급하였다. 나사로는 하나님 위주로 살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움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므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여 놓으셨다가 임종 시에 즉시 천사들을 보내어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셨다. 나사로는 세상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또 수많은 하늘의 성도들과 영적교제를 가지고 있었다. 영적 안목으로 보면 부자는 영원한 고아가 되어 고독한 생활을 하였으나 나사로는 하늘에 있는 성도의 반열에서 교제의 기쁨을 누렸다.
 
2. 둘째, 나사로는 자기에게 주어진 생애를 순종과 충성으로 감수하였다. 본문의 기록에서 나사로가 한 말을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나사로가 하여야 할 말은 아브라함이 대신 말하고 있다. 나사로의 생애는 가난과 역경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입은 옷도 변변치 못하여 피부병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사로는 한 마디의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았고 모든 여건을 다 감수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에도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고 자기의 입을 잘 다스림으로서 온전한 신앙을 지켰다.
 
3. 셋째,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신앙인의 반열에 참여하였다는 뜻이다. 창세기 25:8에서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자기 열조에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무도 장사지낸바 없는 막벨라 굴에 안장되었다. 타향에서 이민자의 생애를 마치고 난후 그의 시체는 비록 헷 족속의 농토인 막벨라 굴에 묻혔으나 그의 영혼은 신앙인의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사로는 죽은 후에 그의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갔다.
 
4. 모든 성도는 언제 어느 곳에 살더라도 반드시 아름다운 죽음을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가난한 몸과 멸시받는 몸을 가지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이 땅에서 잠시 받는 어려움은 천국에서 누리는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낙원에 들어가는 자의 삶은 참으로 축복받은 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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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의 다섯 번째 항목(Section Five)19-25장은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올바른 판단(The Judgement)의 표준이 하나님의 계시(말씀, 기도)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 중에서 오늘의 본문 24-25장은 세 번째 부분이면서 마태복음의 다섯 설교 중에서 마지막 설교다.
첫째 부분 (19-20): 아버지의 계시를 표준으로 삼으신 아들
둘째 부분 (21-23): 아버지의 계시로 환난을 이기신 아들
셋째 부분 (24-25): 아버지의 계시로 종말을 예고하신 아들
 
* 마태복음 24-25장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의 말씀이다.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감람산에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성전을 나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장차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2)고 예언하셨다. 제자들은 산에 오르자마자 예수님의 예언에 대하여 첫째,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둘째,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는지의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여기에 해답을 주신 말씀이 바로 감람산 설교. 이제 마태24-25장의 간추린 내용을 적어보자.
1.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24:1-2)
2. 다가오는 환난 (24:3-14)
. 거짓 교사들 (24:3-8)
. 환난의 시기 (24:9-14)
3. 마지막에 관한 징조들 (24:15-28)
4. 인자의 다시 오심 (24:29-44)
. 인자의 오실 징조 (24:29-31)
. 무화과나무의 교훈 (24:32-35)
.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 (24:36-44)
5. 비유의 이야기들 (24:45-25:30)
. 집주인과 종의 비유 (24:45-51)
.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25:1-12)
. 달란트의 비유 (25:13-30)
6. 심판 (25:31-46)
 
* 여기에서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예수님은 이 설교의 말씀을 하시면서 종말 자체에 관한 예언을 하신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해석하지 말자는 것이다. 24-25장의 설교 내용은 심판 극복의 경고와 안내라는 제목 아래에서 음미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24-25장의 요절을 찾으려면 2442절과 44절의 핵심을 마음에 심어야 한다. 이 요절들을 표어로 적어보자.
깨어 있으라!”“준비하고 있으라!”“주의하라!”“삼가라!”“기도하라!”
 
* 또 감람산 설교(24-25)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그 내용과 교훈을 배워야 한다.
첫째, 이 설교의 내용은 유대인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 제자들의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 및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예수님의 재림과 왕국건설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대답도 유대 땅이라든지(6), 안식일이라든지(20),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등과 관련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 관한 예언은 오직 누가복음 21:20-24에만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마지막 때의 징조와 예수님의 재림,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대환난 등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대환난 기간을 야곱의 환난의 때”(30:7)라고 하였고, 스바냐는 여호와의 큰 날”(1:14)이라고 하면서 환난, 고통, 황무함, 패괴, 캄캄함, 어두움, 구름, 흑암 등이 임하는 날로 표현하였고,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는 분노와 형벌의 때”(26:20-21)라고 하였다. 다니엘 선지자는 더 분명한 이해의 열쇄를 제공하면서 “7년 대 환난 기간”(9:24-27)을 예언하였다.

둘째, 이 설교의 내용은 우리들이 속하고 있는 교회의 들림에 관한 예언(살전4:13-18; 고전15:5)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도 아직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3:4)로 감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를 위한 재림의 때는 직접 언급하지 않으셨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나(고전1:22) 교회는 하늘로서 내려오시는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만을 기다린다(3:20). 교회가 들림을 받기위하여서는 어떤 징조나 표적이 요구되지 않으며 언제라도 주님께서 홀연히 순식간에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대 환난 이전에 교회는 들림을 받으며 대 환난 이후에 들림 받았던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재림하게 된다고 말하며(3:10-11; 19:11-20:6) 또 일부 학자들은 대 환난 이후에 교회가 들림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이 설교의 내용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고와 안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하였다. 세대의 징조나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볼 때에 유대인이나 교회 성도들은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더욱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도중에 누차 주의하라! 조심하라! 삼가라! 기도하라! 깨어 있으라!”로 하시면서 제자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셨다.

넷째, 이 설교의 내용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대 환난의 초기와 중간기와 후기로 구분되어 있고 마지막 기간에 주 예수님은 지상에 다시 오셔서 모든 원수를 무찌르시고 약속하신 왕국을 이루신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감람산 설교를 읽고 공부하면서 우리들의 세대와 마지막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소망을 안개와 같은 세상에 두지 않고 영원한 주님의 세계에 둘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 마태24:32-51은 매우 가까이 온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과 관련된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무화과나무의 비유, 둘째, 노아의 때에 관한 비유, 셋째, 도적이 들어오는 비유다.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언제 어느 때에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르지만(36)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35)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 첫째,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의 움직임과 예수님의 재림이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2-33)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이 움직이는 모든 일을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이미 재림의 시기는 매우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는 지금 세대는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인 것을 알 수 있다.
 
2. 둘째,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은 시대적인 특성을 보여줄 때에 임하게 된다. 그 시대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기까지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39)는 것이 특징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사실은 장차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공할 7년 환난의 기간 중에도 가적적인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한편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의 승천은 교회가 반드시 들림을 받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5:21-24; 11;5; 살전5:1-10).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생활을 즐겼다는 예화를 드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활을 즐기는 사실을 비난하신 것이 아니며 그들이 그 일에만 몰두하여 있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말씀하셨다. 생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구원을 즐기라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버려두고 덜 좋은 것만을 탐닉하다가 멸망을 받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그 얻은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것과 같다. 그 때에 밭을 가는 두 사람 중에서 또 매를 가는 두 여자 중에서 더 좋은 구원을 예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나 여인은 예수님이 세우시는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구원과 멸망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교회의 들림과 관련하여 설명하신 것이 아니다.
 
3. 셋째, 예수님의 재림은 도적이 들어오는 사례와 비교된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도적을 당한다. 그러므로 도적을 당하지 않으려면 도난방지를 위하여 생각을 많이 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앞의 비유에서는 그 날과 그 때를 언급하셨으나 도적의 비유에서는 그 경점”(=밤 시간)을 언급할 정도로 급박한 상항을 말씀하셨다. 택함을 받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견딜 수 없는 환난의 기간도 단축하시며(22) 도적같이 신속히 임하여 구원을 베푸신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4.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에 유의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5, 46)라고 하셨다. 우리들에게 맡겨진 재능과 소유물로 때를 따라 나누어주는 자가 곧 충성과 지혜의 종이라고 하셨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움직임에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런 깨달음이나 생각도 없이 자기생활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을 때에 택함 받은 성도들은 더욱 충성과 지혜의 생활을 하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마태25:1-13에서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성도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마지 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교훈을 주셨다.
1. 열 처녀란 신부의 친구들이다. 열 처녀는 신부와 함께 있다가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를 데리러 오면 등불을 밝히고 신부의 가는 길을 밝혀주면서 결혼예식이 거행될 신랑의 집까지 동행하여야 하였다. 이때 사용하는 등불은 가정용 등불이 아니다. 가정용 등불은 집밖에서는 잔잔한 바람에도 곧 꺼지기가 일수였다. 따라서 열 처녀는 등불이 아니라 횃불을 각자가 준비하여야 하였다. 횃불은 막대기 끝에 헝겊을 둘둘 말고 거기에 기름을 푹 적신 후에 불을 키도록 되어있는 도구다. 한 번 기름을 발라주면 15분 정도만 불을 밝힐 수 있었다. 따라서 충분한 양의 기름을 병에 담아가지고 횃불과 함께 가지고 가야만 하였다. 열 처녀가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은 바로 횃불과 기름을 준비해 놓는 일이었다.

2. 열 처녀 중에서 다섯 처녀들은 횃불은 준비하였으나 기름을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하였으므로 미련한 자들이라고 불려졌다.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도 않고 또 할 수도 없게 된 자들이 곧 미련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횃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에게 다급한 요청을 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횃불을 밝힐 기름만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그 기름을 나누어줄 수 없었다. 결국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은 신부와 신부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함께 신랑의 집에 간 후 대문을 닫아버리고 결혼예식과 잔치를 진행하였다. 뒤늦게 횃불을 밝히고 좇아 온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들과 결혼잔치와는 더 이상 관련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3. 예수님은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 하느니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5:22-23). 미련한 다섯 처녀는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여 횃불을 밝히고 신랑의 집까지 왔으나 저기들을 위하여 횃불을 밝히고 급하게 뒤좇아 온 것이지 결코 신부와 신랑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요한 순간에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을 못 하였으므로 낙오자가 되었고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4. 예수님은 결론의 말씀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 하느니라”(13)고 하셨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잠자지 말라라든가 졸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에서 열 처녀들은 다 졸며 자고 있었다”(5)고 하였다. 깨어있었던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깨어있으라는 말은 자기의 할 일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뜻이며 각성을 촉구하는 교훈이다. 결정적인 그 시간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기름을 준비해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5. “기름성령님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세상에 살면서 하여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매우 바쁘더라도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수행하여야 한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 마태25:14-30에서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성도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지니며 또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라는 교훈을 주셨다.
1. 한 달란트라는 화폐의 가치는 한 사람의 품삯으로 20년 동안이나 지불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액수다. 도합 여덟 달란트가 세 명의 종들에게 5, 2, 1달란트씩 지불된 것은 사업을 위한 투자 자금이었다. 종들이 가진 사업운영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사업을 하도록 주인이 성공의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주인은 큰 자산을 종들에게 맡겨버릴 정도로 종들을 신뢰한 관대하고도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2.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기들을 믿고 인정하여 기업경영주로 만들어준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여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였다. 오직 충성심으로 주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노력하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초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데 있다.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생산력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각각 갑절의 자산증식의 결과를 가져왔다.
 
3.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 하였다. 주인은 자기를 이용하여 자산증식에 몰두하고 있는 완고한 사업가로 알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사람”(24, 26)이므로 상종할 수도 없는 두려운 존재로 낙인을 찍었다. 그가 주인의 참다운 의도를 의심하게 될 때에 사업추진에 대한 의욕과 용기를 상실하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 중에는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 둘 곳은 땅 밑이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종은 주인은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믿고 그대로 돈을 땅에 묻어버렸다. 은행에 입금할 생각도 못하였다. 주인도 의심하고 은행도 불신할 정도의 타락한 인간관계를 가진 자에게서 건전한 창조적 생산요소란 기대할 수 없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책망과 저주, 가난과 슬픔, 후회와 절망 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없는 자였다.
 
4.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재능과 의지와 욕구와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이미 받은 달란트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충성스럽게 활용하는 성도가 되어야 참다운 사명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천국백성의 재물관을 산상보훈(6:19-24)에서 살펴보자.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마태25:31-46에서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에 베푸실 심판을 양과 염소를 각각 분별하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정성의 차이로 상벌이 주어지는 교훈을 주셨다. 이 비유에서 구원은 선행의 결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과 같이 설명되고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성도는 성도들 끼리 서로 사랑하고 돌봄으로써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가족관계임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을 위하여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혈 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는 분들을 따뜻하게 돌보아줄 자는 같은 형제자매 외에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체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양들은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 받으며 따라서 성도들의 사랑은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염소란 저주받은 자들이며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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