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님의 비유, 새로운 모습의 천국 이해 (2) 글쓴이: 방다니엘, 신학박사(Ph.D)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막4:13).
* 예수님은 “새로운 모습의 천국을 보여주시는 비유들”을 마13장, 막4장, 눅8장에서 집중적으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천국비유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는 전후관계를 잘 살펴야 하며 또 그 배경을 아울러 살펴야 한다.
1. 마태복음 13장 1-52절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값진 진주의 비유, 물고기를 모는 그물의 비유, 옛것과 새것을 내오는 집주인의 비유”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마가복음 4장 1-34절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등이 기록되어 있다.
3. 누가복음 8장 4-18절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위에 열거한 천국의 비유들은 “이루어진 천국”(예수님의 현재성, present)과 아울러 “이루는 천국”(천국백성을 이루는 과정과 미래성, future)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과정(process)을 설명하신 것이다. “하늘의 놀라운 권위를 받은 사람은 주어야하는 사역”(Receiving-Giving Ministry)과 사랑을 베풀고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는 사역(Caring Ministry)을 실천하고 진행할 때에 참다운 하늘의 권위(authority)가 나타난다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구되는 사항이 있다고 하신다. 그것은 곧 “기다림” 또는 “참음”을 핵심으로 하는 “인내의 사역” (Ministry of Tolerance)이다. 선과 악의 영적 대결에 있어서는 아무리 주고 아무리 사랑해도 기대에 못 이르는 상항을 보게 된다. 영적전투에 임하는 사람은인내하고 모든 선과 악의 분별은 “그 날에”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도록” “맡기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지의 비유에서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13:29)고 명령을 내리신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의 권위는 “베푸심과 사랑하심과 인내하심”이라는 원리가 밝혀졌고 이러한 원리에 위배되지 않도록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내어주심”을 이루셨고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 하나의 비유가 말씀하여지기까지는 그 비유의 전후에 여러 가지 일(사건)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후관계를 살피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고 “비유의 말씀 이해에의 길잡이”가 된다. 이러한 작업은 비록 비유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등불의 비유”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직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등불)을 가진 사명자는 씨의 생명(말씀)을 보여주는 자이다. “등불을 가진 자의 사명과 책임은 빛이신 예수님을 들어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1-4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천국비유에서는 어느 비유를 막론하고 긍정의 요소와 부정의 요소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 자신”은 어느 요소에(긍정? 부정?) 속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빛에 속하여 있는가 아니면 어두움에 속하여 있는가?” 이와 같이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판가름하는 것은 곧 천국(또는 천국의 왕)과 천국백성과의 관계를 다짐해 보는 측량기계의 역할을 한다.
* 예수님은 천국비유들을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모습(형태)의 천국비밀을 알려주신다.” 이것은 구약시대와 이스라엘 백성의 옛 사고구조를 새롭게 하여주시는 작업이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과 유대인의 이해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한다.
1. 예수님을 지적하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마12:24), 즉 “귀신의 왕(사탄)의 힘으로 사역 한다”고 유대인들(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은 “새 모습의 천국을 이해하지 못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천국(kingdom of Heaven) 뿐만 아니라 천국의 왕(King)이신 예수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를 자신 있게 언어(말)로 표현 할뿐 아니라 결국은 예수님을 처형하여 십자가에서 죽이고야 만다.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의 차이에서 양면의 극단적인 행위와 그 결과가 발생한다. 그때도 지금도 상항은 같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배척할 수는 있다. 그러한 행위는 용서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과 천국의 왕을 대적(against)하면 돌이킬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마12:32-34) 그 예를 본다.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 예수님은 새 천국을 이루는 “신앙의 공동체”가 지상에서 낙원을 이루는 “혈육의 공동체”보다도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다(마12:47-50).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지라도 “천국백성”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4. 이스라엘이라는 지상의 국가(nation)는 하나님의 약속(promise; 창12:1-6; 13:14-17)과 하나님의 언약(창15:18; covenant)에 의하여 시작되고 유지되어 왔다. 아브라함의 선택과 더불어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은 신정국가(theocracy)로 시작된 것이 온 세계에 알려졌다(출19:5-6).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5.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주신 약속(promise)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 왕의 자손에 의하여 영원히 다스림을 받도록 정하여져 있었다(삼하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의 예언).
6.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 예언의 말씀을 따라서 “메시아와 그의 나라”를 기다리며 평화와 번영과 질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세례요한은 “가까이 온 천국”(마3:2)을 알려주었고 예수님도 “그러한 천국”(마4:17)을 선포하셨다.
7.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과 천국생활”의 헌장은 산사보훈(마5-7장)에서 구체화된 양상으로 가르쳐졌으며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의(unrighteousness)"가 ”하늘의 의"로 새로워지는 놀랍고도 변화된 “나라의 모습”이었다. 그 “의로움”의 실증은 “예수님의 말씀사역에 따르는 기적들(miracles)”(마8-11장)로 입증되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며 마음의 변화와 새로움이 일어나며 영적 능력에 의한 육적 치유가 일어났다.
8.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폐지한 것이 아니며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성취를 지상에 국한하며 자국민(선민)에게 제한하여 받아드렸던 무지(몰이해)가 결국은 “새로운 모습의 천국”을 배척한 것이다.
*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잘 들어내어 주고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게 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주님(메시아)로 활동하셨으나 일부 사람들만 받아드리고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은 귀신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푼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모의를 하였다. 이러한 환경이므로 믿는 자에게는 계속하여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주시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도록 하여 주시기 위하여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셨다.
* “천국비유”는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적용할 수 있는 은혜의 말씀이 되는 반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을 줄 수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의 비유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다”(눅4:20)고 하였을 때 듣는 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이려고 한 것은 비유의 말씀을 받지 못한 자들의 좋은 예화가 된다.
*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비유를 사용하셨다.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우릴찌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라”(시78:1-2)고 하였다. 비유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잘 깨달아 지도록 간구하여야 한다. 비유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성도이다.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라고 축복하여 주셨다.
* 마태13:3-23에 기록된 씨를 뿌리는 비유는 마가4:1-20과 누가8:4-15에도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해설까지 해주셨다. 그리고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하고야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4:13)고 하시면서 씨를 뿌리는 비유가 제일 먼저 깨달아져야 하는 중요한 비유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 비유라는 것은 “천국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지상의 이야기”로써 듣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서 그 영적 진리가 깨닫기 어렵다든지 또는 너무 분명하게 깨달아져서 오래 기억할 수 있다든지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씨를 뿌리는 비유는 가장 기초적인 비유이므로 예수님은 친히 해설까지 해 주셨다.
1. 씨는 천국말씀(마13:18) 또는 하나님의 말씀(눅8:11)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4:12)고 하였기 때문에 그 속에 생명과 힘을 가지고 있는 씨앗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여지면 말씀의 씨앗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 떨어진다. 이때 떨어진 씨앗은 떨어진 마음 밭의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무책임한 말과는 달라서 그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 밭에 심어지면 뿌리가 내려지고 줄기와 잎이 나고 열매까지 맺어지는 장기간의 시간과 절기를 필요로 한다.
2. 말씀의 씨앗이 길가와 같은 마음 밭, 돌밭과 같은 마음 밭,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지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도 자라지도 않고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이러한 마음 밭들은 말씀의 씨앗을 오래 간직할 수 없고 결국은 생명의 말씀을 외면하고 배척하여 버린다. 겉으로 볼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라는 수자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3. 열매라는 것은 구원을 완성하는 좋은 열매를 의미한다(마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좋은 마음 밭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롬6:22)를 맺으며, 그 성품에서 “성령님의 열매”(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를 보여주며, 그 행위에서는 “선한 일의 열매”(골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를 나타내며, “자기 소유를 나누어주는 열매”(롬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가 되며, 그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히13:15)가 끊어지지 않는다.
4. 이러한 열매들을 맺으려면 뿌리를 땅속 깊이 박아야하며 태양 빛을 잘 받아 견딜 수 있어야 한다(인내). “해가 돋은 후”(마13:6)라는 말은 성장요소와 아울러 핍박과 환난 등의 박해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시련과 박해를 통하여 성장할 것은 성장하고 말라버릴 것은 뿌리채 말라버리고 만다.
5. 예수님은 “들으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셨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9),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4:23),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8:18)고 하셨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좋은 마음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한다.
* 마가복음 4:26-29에는 씨가 자라는 비유가 나온다.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1.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성장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씨) 자체의 생명의 힘으로 자라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26), 또 씨를 뿌린 사람은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나지만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27)고 하였다. 저절로 자라가기만을 기다릴 따름이라는 것이다. “씨가 뿌려진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열매)를 맺는다”(28).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린 성도는 말씀에 의지하여 스스로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을 두고 자란다.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기 위하여서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
둘째, 계속하여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명상하고 실천한다.
셋째, 결국은 거룩한 하늘나라 자녀의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3.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29)고 예수님은 결론을 지어 말씀하셨다. 익은 열매는 하늘나라의 창고에 모아들여지며 이러한 열매로 하늘나라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4. 씨를 뿌리는 비유에서도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난다”(마13:21)고 하였다. 모든 시련과 고통은 성장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126:5-6)고 하였다.
* 마태13:24-30, 36-43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함께 천국 건설의 요소로써 가라지와 같은 거짓 그리스도인, 겨자씨와 같은 거짓 외적 성장, 누룩과 같은 내부적 거짓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다.
1.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씨를 뿌리는 비유와 다르게 적용하시면서 해설하여 주셨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을 가리키고 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며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사단이다.
2.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며 흉내쟁이(모방하는 자)이다. 따라서 거짓 그리스도인을 참 그리스도인 가운데 심어 놓고 참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사단은 자기의 힘으로는 참 그리스도인을 뿌리 채 뽑아버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3. 가라지는 거의 밀 이삭과 같아서 식별하기가 어렵고 또 뿌리를 강하게 내릴 뿐 아니라 좋은 밀 이삭의 뿌리와 엉켜서 자라다가 마지막 열매인 곡식을 맺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분명하게 구별되는 독보리(darnel)를 가리킨다.
4. 사람들이 잘 때 밤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뿌려진 가라지는 과연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렵고 오직 자기 자신과 사단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밭에서 뽑아내려는 작업은 좋은 씨에서 나온 이삭까지 함께 뽑아지는 부작용이 생기게 되므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예수님은 가르쳐주셨다.
5. 가라지와 같은 거짓 그리스도인들(고후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아닌 다른 복음을 믿고 따르며(갈1:6-9. 이 기록 중에는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4번 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따라 산다(롬10:1-3. 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또 그들은 심지어 사단의 회(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를 만들어 놓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장하여 결국 마지막 때에는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 까지 배출해 내고야 만다(cf. 살후1:1-12).
6. 가라지는 추수 때에 예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와서 거두어 단으로 묶어 풀무 불에 던진다고 하였다. 특별히 “단으로 묶을 정도로” 거짓 그리스도인의 종류는 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존재함을 알 수 있다.
7. 우리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들이(거짓 그리스도인) 누구인가를 찾아내며 무엇이 가라지들의 잘못인가를 알아보려는 헛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의 주위가 혼잡하고 어지러워져 가면 갈수록 우리들은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8-9).
* 마태13:31-32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는 막4:30-32와 눅13:18-19에도 기록되어 있다. 겨자씨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 겨자씨는 자라면 초목(plant)이 되어야 하는데 초목보다 훨씬 큰 나무(tree)가 될 만큼 외부적으로 비정상적인 성장을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생명은 반드시 자라야 한다는 성장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사단이 들어와서 거짓 성장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라도 거짓된 성장을 보이려는 욕심이나 위선은 죄악이다.
2. 겨자씨는 실제로 제일 작은 씨가 아니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겨자씨를 제일 작은 씨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 무엇이던지 아주 작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표현할 때에는 겨자씨와 같다고 말하곤 하였다.
3. 겨자씨와 같은 천국은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밭에 작고도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심어지면 성장하여 초목 또는 풀(plant)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창1:11-12)는 풀에서 풀이 나고, 나무에서는 나무가 나고, 원숭이에서는 원숭이가 나오도록 하신 것이다. 결코 풀이 나무가 되고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4. 겨자씨가 이 세상의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나무가 되어 가지를 뻗히고 새들이 와서 깃들일 정도로 자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과 세력을 세상에 과시하는 교만이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나무”라는 것은 다니엘 4:12이나 에스겔 17:23을 볼 때에 바벨론이나 앗스루 제국과 같은 세상 나라의 정치적 권력을 상징하고 있다. 또 이러한 나무에 깃들이고 있는 “새”라는 것은 사단이 저지르는 죄악을 상징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을 보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어떤 성경교사는 “새가 많이 모이는 나무 아래에는 새똥으로 더럽혀져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위대하여지거나 세력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교만의 죄악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이 아니다. 신앙인물이나 큰 교회를 자랑하는 일도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5. 복음의 능력은 오히려 겨자씨 자체와 같이 세상 사람들 속에 침투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 능력 있는 성도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겨자씨의 찌르고 쏘는 맛과 같이 성도는 불신자를 찌르고 쏘아서 각성시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활약하여야 한다.
* 마태13:33에 나오는 누룩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악한 것을 상징하고 있으며 누룩은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게 하여 크게 만들 때 사용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사단이 들어와서 거짓 교훈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1.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소제”(meal offering)라는 제물을 드릴 때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가루를 사용하였다. 순수한 밀가루를 드릴 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은 아름다운 교제를 갖게 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함께 누리는 한 가족이 된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방문하신 하나님과 천사를 누룩 없는 밀가루로 대접하였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천사를 대면하였을 때에 누룩 없는 밀가루를 드렸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성전에 예배드리려 갈 때에는 누룩 없는 밀가루를 바쳤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마지 할 때마다 집 안에 누룩이 없도록 깨끗이 청소한 후에 누룩 없는 떡을 만들어 먹었다. 누룩과 같은 악의 요소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제하여 버릴 것을 하나님은 원하셨다.
2.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눅12:1)고 말씀하시면서 위선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을 요구하셨고, 사두개인의 누룩을 언급하시면서 감각적이고도 현세적인 이성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헤롯당의 누룩을 말씀하시면서 세속적인 부요와 권력에 집착하는 물질주의를 배척하라고 가르쳐주셨다. 고린도전서 5:6에서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음행의 성적타락과 비도덕적 행위를 교회에서 내어 쫓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3. 누룩의 비유에서 나오는 “여인”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여자는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가족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떡(=빵)을 만들어 먹이는 절대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다. 어느 여자라도 자기 가족의 음식물에 불순물을 넣어 가족의 생명과 건강을 해치려고 하지 않는다.
4.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성장하여야 한다는 원리를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비유에서 이미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패요소가 꽉 들어 있는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셨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생활과 신앙생활 속에는 형식주의, 의식주의, 율법주의, 권위주의, 물질주의, 낙천주의, 자유주의, 위선과 부도덕 등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누룩의 부패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한 것처럼 보이려는 것은 사단이 심어놓은 누룩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여야 한다”(고전5:8).
* 마태13:44에 나오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천국 건설의 구성요소인 천국백성은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가르침이다.
1. 먼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예수님 또는 복음 또는 구원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죄인이 예수님을 발견한 후에 자기 소유를 모두 투자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분이시므로 감추인 보화로 볼 수 없다. 또 죄인은 눈이 어둡고 완고하여 먼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또 구원과 영생은 선물이지 죄인의 소유물로 사들일 수 없다. 또 온 세상을 가리키고 있는 “밭”을 죄인이 모두 구입할 수도 없다.
2. 밭에 감추인 보화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19:5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라”는 말씀 중에서 “내 소유”라는 말이 나온다. 또 시편 135:4에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다”고 말한 “특별한 소유”는 곧 “보화”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화이지만 밭에 감추어져 있고 그 빛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시면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구입하셨다.
3.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예언하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아울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을 말하였다(요11:51, 52).
4.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 백성과 “마땅히 형벌 받을 이스라엘 백성”(사53:18)의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인 하나님의 백성은 감추어져서 빛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감추어졌던 보화”를 찾아내어 영광스럽게 하여주셨다.
5.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을 구성하는 보화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유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밭에서 발굴하여 주셨으므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보화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감사드린다.
* 마태13:45-46에 나오는 값진 진주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1. 이 비유에서 값진 진주를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모두 투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눈이 어둡고 완고한 죄인인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또 아무리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투자하더라도 구원의 은혜는 값을 치루고 살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맞지 않는 해석이 된다.
2. 예수님은 언제나 먼저 죄인을 찾아오셔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며 또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신 후에 베풀어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3. 값진 진주는 천국건설의 주성요소인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 교회를 진주로 비유하게 된 것은 진주가 생명체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보석이기 때문이다. 진주는 조개 속에 몹시 작은 돌과 같은 것이 들어가서 조갯살을 괴롭히거나 상처를 줄 때에 이 가시와 같이 찌르고 쏘는 불순물일지라도 그대로 받아드려 마치 자기의 자녀와 같이 그 안에서 오랜 기간 동안 감싸고 길러낸 후에 나오는 가장 부드러운 감촉을 가진 아름다운 보석이다.
4. 진주 자체는 하나의 몸과 같은 덩어리(unity)이다. 다른 보석들은 이리저리 깎아내어 인위적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내지만 진주는 아름다운 그 모습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의 구별이 없이 모두 한테 뭉쳐진 하나의 몸이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또 진주는 고난을 통하여 계속 성장하여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교회는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님의 몸의 지체로 연합되도록 하여주시며 또 날마다 성장하고 있다. 진주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물속 깊은 곳의 조개껍질 안에서 자라는 것과 같이 교회의 참다운 성장이란 내면에 존재하는 신앙의 성숙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사람의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교회는 값진 진주와 같이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5. 예수님은 생애 전체를 다 바쳐 귀한 대가를 지불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극히 값진 진주는 “하나”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아름다운 “하나의 교회”의 지체들이다. 사단은 제 아무리 세상 물결을 뒤흔들며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장을 방해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여전히 극히 값진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계신다. 우리들은 어떠한 시련과 고난을 받더라도 아름답고 값진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도록 “인내를 다하여” 예수님을 더욱 믿고 사람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 마태13:47-50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여주신 그물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이 그물의 천국비유는 사람을 낚는 복음전도와 그 영향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마지막 심판의 그물이 내려졌고 그 마지막이 임박하였다는 경고의 비유이다.
1. 갈릴리 바다의 고기잡이는 세 가지 형태로 행하여진다. 첫째는 낚싯대로 하나씩 잡아 올리는 방법이다. 둘째는 개인용 그물을 던져 몇 마리씩 잡아 올리는 방법이다. 셋째는 그물을 내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본문의 비유에 해당하는 고기잡이 형태이다. 그물의 아래에는 납이나 추를 달아 바다 밑바닥에 닿게 하고 그물의 위에는 물에 뜨는 나무를 달아놓는다. 이렇게 하여 내린 그물은 바다 속에서 그물 벽을 이루게 된다. 배 두 척을 사용하여 평방 1/4마일 정도의 넓이로 바다를 감싸면 그 그물 안에 있는 고기들은 그물이 내려진 것을 모른 채 모든 고기는 다 잡히게 된다. 이 모든 물고기들은 물가에서 분류되어 필요한 것은 보관하고 불필요한 것은 버린다.
2. 이 비유가 강조하는 점은 첫째로 마지막 심판은 쉬지 않고 가까이 오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좋은 고기든지 못된 고기든지 마지막 잡힘은 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기들은 그물이 내려진 것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마지막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가에 끌려가서야 마지막이 순식간에 닦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3.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세상 끝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49-50). 지금은 마지막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과 못된 사람이 섞여 살고 있고 좋은 일과 못된 일을 함께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곧 마지막이 되면 분류가 되어 의인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생활을 시작한다. 한편 악인은 사단과 함께 지옥에서 못된 생활만 영원히 하게 된다.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일”을 후회하며 원한의 이를 갈게 된다. 그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은 곳”(막9:48)이다. 천국생활의 준비는 지금 하여야 한다. 바울은 “내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였다”(고전9:23)고 전제하고 그러나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전9:27)고 하였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 마태13:51-52의 기록은 모든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주신 예수님의 결론적인 비유이다.
1.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씨를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해설하여주셨다. 계속하여 여섯 가지의 천국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첫 번째의 가라지의 비유와 마지막 여섯 번째의 그물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해설까지 하여주셨다.
2. 그러나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값진 진주의 비유는 설명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제자들은 지체하지 않고 “예”(=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하였다.
3.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면서 실천하라는 뜻으로 집주인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주셨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52).
4. 본래 서기관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전문가로써 백성들이나 생도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해석을 권위 있게 하여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서기관은 일명 “율법사”라고도 불렀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향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첫 번째 서기관으로 에스라의 지도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였다. 이러한 참된 서기관의 사명은 종교지도자의 타락함과 더불어 점차 퇴색되어 결국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의 가르침 보다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서기관의 가르침이 더 권위가 생기게 되었다.
5. 예수님은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의 전통을 따르며 사람의 권위를 가르치는 서기관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옛것 즉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창고에서 가지고 나오는 서기관이 요구된다고 비유로 가르쳐주셨다. 아울러 서기관은 “제자 된 서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6. 서기관이란 글로 배우고 가르치는 자인 반면에 제자는 생활 속에서 실천을 통하여 배우는 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천국복음의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려서부터 구약의 말씀을 공부하였고 이제는 예수님의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한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여야 하는 사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된 것이었다.
7. 우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하여 헤매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이미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요14:6),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있으며(요17:7), 진리이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고 있다(요16:13). 우리들도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 되어서 신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면서 더 깊고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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