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님의 비유,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 (4) 글쓴이: 방다니엘, 신학박사(Ph.D)
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2.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마20:16).
3.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
* “천국의 왕과 백성과의 관계”(4)라는 제목으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둘째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와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비유”를 살펴보게 되었다. 이모든 비유들의 핵심은 천국의 왕과 천국백성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비유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는 전후관계의 기록과 그 배경을 살펴야 한다.
1.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을 연대적으로 나열한 순서에 의하면 누가복음 15장이 마태복음 20장의 앞에 나오므로 이 순서에 의하여 눅15장 이후에 마20장을 살피려 한다.
2. 비유연구에 있어서 전후관계의 고찰이라는 것은 비유 바로 이전의 기록을 가까운 배경으로 살펴보는 것이며 아울러 바로 이전 장 전체의 기록을 먼 배경으로 살피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살피려는 비유가 기록된 책의 흐름과 어떠한 일관성을 가지고 기록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또한 중요한 사항이 된다.
3. 누가복음에서 14장과 15장 전장의 내용들에서 “천국의 왕은 당신에게 속한 어떤 것 하나라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놀라운 흐름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천국 왕)에게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자(천국백성)는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의 귀한 자산”이므로 이 세상(피조 세계)에서 결코 멸시, 천대, 박해를 받을 수 없다는 원칙을 이들 말씀 속에 기본으로 놓고 있다. 이 원칙을 각각의 말씀단락과 비유들에게 적용하면서 음미하여 보면 “나를 택하여 귀중하게 쓰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며 감사와 눈물을 금할 수 없으며 감격하게 된다.
4. 누가복음 14-15장의 단락들의 내용을 보라. 첫째, 주인공은 누구인가? 둘째,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는가? 셋째,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넷째, 메시지는 무엇인가?
* 누가복음14:1-6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자세와 원리를 말씀하여 주셨다. 이것은 구원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원칙인 것이다.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한 수종병(고창병: 몸속의 물이 배설되지 못하여 몸이 부푸는 질병) 든 사람을 보시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라고 하였다. “어떻게 치유하셨는가”가 아니라 “언제 누구를 왜 치유하셨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일하지 못한다는 안식일(Sabbath)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지체하지 않고(즉시, 곧)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기본자세를 의미한다.
1. 안식일의 참뜻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고 하였고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고 하였다. 하나님은 6일 동안에는 창조를 완성하셨으며 제7일에는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6일간에 완성된 피조물은 제7일에 복되고 거룩하게 운행(다스림, 온전케 하심, 거룩하신 사역)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12:12)고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것이 안식이며 화평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영적성장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안식이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마12:8)고 하시면서 친히 일평생 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일을 계속하신다.
2.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아의 때에 안식의 생활을 누리리라고 예언한 말씀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히4:9), “그러므로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히4:11)고 권고하고 있다. 우리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안식의 때에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은혜 받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은 당신의 자녀이며 당신이 소유한 생명이다. 누구라도 자기의 친 아들이나 아끼는 소가 물에 빠져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구원을 베푼다. 예수님과 구원의 대상인 백성은 하나의 몸을 이루며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신다. 나와 너의 일체감 때문에 물속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원하신다. 더러운 죄악의 구덩이라 할지라도 뛰어들어 오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4.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사랑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다. 사랑의 법은 어떠한 율법이나 제도보다 강하다. 육신의 어머니는 혹시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실증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5.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와 시간을 미루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물에 빠진 자들을 곧(즉시) 건져내어야 살릴 수 있다고 하셨다. 구원의 은총은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라도 구원이 필요한 때와 장소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즉시 뻗쳐진다. 수종병 환자는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다. 먼저 예수님이 그를 보시는 즉시 이끌어내어 병을 고쳐주시고 보내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랑과 구원은 원인과 결과이며 시작과 종결이며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 누가복음 14:7-11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는 영적 겸손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1.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으셨으나 높은 자리(the places of honor)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서 수종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겸손함을 보여주셨다. 잔치자리에는 주인과 가까운 곳이 상좌가 된다. 또 어떤 모임의 앞좌석에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는 상석이다. 이런 곳으로 먼저 가서 앉으면 그의 “자존심”(pride, self-esteem)이 나타난다. 성경원어에서 “자존심”이란 “방랑인 또는 유랑인”(떠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다. 자존심을 나타내는 사람의 마음은 안정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태에 있다. 인간의 죄악성은 자존심으로 인하여 더욱 나쁘게 자라고 있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질병이다. 자기도취, 자기방어, 자기정당화, 및 자기중요성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2. 예수님께서 “말석에 앉으라,”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핀다면 스스로 낮아질 수 있으며 자연히 말석에 가게 되는 상태”임을 가리키고 계신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25:6-7)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하여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지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칭찬과 인정을 사람들에게 받으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교회의 직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
3.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높은 체하는 교만”의 행위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종인 자신과 주인 예수님을 사람 앞에서 추락시키는 실수를 범하여서는 안 된다. “칭찬과 인정”은 “주인에게서 받는 것”이 당연하다.
* 누가복음 14:15-24에서 예수님은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잔치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잔치임을 확인하고 참석할 것을 권유하셨다. 한 유대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 됩니다”(15). 예수님은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여 주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또 의인들과 선지자들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잔치의 초대장을 받고나서 천국잔치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상을 다 차려놓고 초청할 때에는 참석하기를 거절하였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여주셨다. 초청을 수락하고도 참석하지 못하는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천국잔치와 일상생활과의 선후관계와 선택의 문제다.
1.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불가불 나가서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예수님의 천국잔치보다는 자기의 소유물에 있다는 의도를 분명히 표명하였다.
2.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열 마리)를 샀으므로 그것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는 소를 살 때 시험해 보지도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는 큰 잔치에 가서 시간을 소비하기 보다는 농장에서 자기 일을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하였다.
3. 세 번째 사람은 자기가 장가 들었으므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24:5)는 규정이 명시된 것을 구실 삼아 큰 잔치의 중요성을 뒤로하고 자기와 가정의 즐거움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4. 이러한 세 사람들은 잔치주인의 분노를 자아냈고 그들을 위한 잔치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자리를 경시하고 배척하였다. 영원한 축복의 자리를 버리고 현세의 물질적 관심거리의 자리를 택하였다.
* 누가복음 14:25-27에서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천국백성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천국백성이 된 제자들에게는 큰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 위의 요구는 한 마디로 “사랑의 실천”(행위)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의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 둘째, 사랑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혈연관계”다. 피보다 더 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과 맺어진 “제자의 도”는 혈연관계보다 더 진하다. 본문에서 혈연관계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적대감정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나머지 “미워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비교의 논법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과 동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인하여 희생, 멸시, 천대, 죽음도 제자들을 위하여 받으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는 제자의 도가 있다. 구원을 위하여서라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언제 어디에서나 지고 감당하게 된다.
* 누가복음 14:28-35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천국백성이 되기 위한 계획을 알려주셨다. 천국백성은 모든 일을 할 때에 먼저 계획과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뜻으로 1) 망대를 세우는 비유, 2) 전쟁하는 왕의 비유, 3) 좋은 소금의 비유를 가르쳐주셨다.
1. 누구든지 망대를 세울 때에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지도 않고 서둘러 시작하였다가 중단하면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 하리라(롬10:33)고 하셨다. 부끄러움이란 죄악의 결과로 발생하는 형벌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끄러움(수치)를 알게 되었다. 망대를 세우겠다는 것은 투자다. 투자 없는 이익을 기대하는 것은 도적질이다. 천국백성이라고 하면서 노력도 하지 않고 투자도 하지 않고 영광만 취하려고 하는 자는 수치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2. 어떤 왕이던지 전쟁을 하려면 자기의 전력을 먼저 점검하여야 적과 대항하여 패배하는 수욕을 당하지 않게 된다. 만일 자기의 전력이 부족하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도 전쟁(영적)이다. 영적전쟁이나 육적전쟁에서 패배만 일삼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의 대상이 된다. 천국백성들은 말씀의 검을 가지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고 말씀하셨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좋은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금은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 순도가 있다. 그런데 높은 순도의 소금이 천국백성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소금을 봉급으로 받기도 하였다. 소금의 가치가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인답지 못한 군인을 “소금보다도 못한 녀석”이라고 비난하였다.
* 누가복음 15장의 배경은 이러하다. 예수님은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죄인들을 기쁨으로 맞아드리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를 즐겨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였다. “이 사람(예수님)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1). 이러한 비난과 불평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시는 비유의 말씀이다. 비유 속에는 “죄인을 영접하는 아버지”와 “죄인이 영접 받은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1.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다른 점: 예수님은 죄인들을 모아드리시고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쫓아버리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죄인들을 위하시는 백성의 지도자 예수님과 죄인들을 배척하는 민중의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과의 차이점은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에서 나타났다. 예수님은 좋은 음식을 준비하지고 않으셨고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으셨으나 주님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백성을 찾으시고 보호하시려는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것을 발견하고 죄인일수록 예수님을 더 찾아 나오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하나님의 것과 세상에 속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선민과 이방인 등등을 나누어 놓고 구별된 세계에서 살았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먹이고 고치고 가르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민중들 편에서 자기들을 이해하여 주기를 바랐으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민중들을 비평하고 멀리하고 정죄까지 해버리는 독선에 빠져있었다. 예수님은 사랑의 원칙을 실천하셨으나 그들은 율법의 원칙을 준수하였다.
2. 오늘날의 교회가 만일 성경의 가르침을 율법적으로 지키려고 한 나머지 성경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평하고 배척한다면 바리새인들의 실수(범죄)를 다시 저지르는 것과 같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여 읺어버린 자들을 찾아낼 것인가에 심혈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한다.
3. 눅15장의 기본 구조: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탕자의 비유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예수님은 이들 비유들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잘못된 견해를 고쳐주시고 잃은 자를 찾는 구원의 도리가 무엇인지 설명하여 주셨다. 이 비유들은 공통적으로 1) 잃었다(4, 8, 24), 2) 찾았다(5, 9, 24), 3) 기뻐하였다(6, 10,24)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4). 아울러 구원의 요소에는 1) 구원하는 자의 노력, 2) 구원 받는 자의 노력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쌍방의 노력이 합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잃어버린 슬픔, 찾는 수고, 구원하신 기쁨이 넘친다. 한편 구원 받은 사람 편에서 볼 때에 잃어버려진 괴로움, 찾아 헤매는 마음, 구원 받은 기쁨이 넘친다.
4. 위의 구원의 요소를 알게 되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37, 39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과 (너희가)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살후2:13)는 구원의 신적-인적 양면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5. 구원의 결과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구원의 대상자들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죄인들끼리 서로 손가락질 하는 추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구원의 대상자들은 모두 서로 사랑하고 서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사람의 외모를 보기 전에 그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은혜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 누가복음 15:3-7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에서 세 가지 요점으로 말씀하여 주셨다. 1) 잃었다, 2) 찾았다, 3)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1. 잃었다는 내용은 이러하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었다”(4)는 것이다. 양은 집단을 이루고 사는 동물이다. 또 양의 집단은 자기들 끼리 살 수 없고 반드시 목자의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다. 양은 양들 끼리 모여 살아야하고 또 양은 반드시 목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고 하셨다. 100마리의 모든 양은 목자에게 이러한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다. 그런데 양은 매우 우둔한 동물이어서 쉽사리 양떼와 목자를 떠나서 길을 잃고 방황하기 일수다. 아무리 목자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예기치 않은 때와 장소에서 실종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자기의 길로 갔다”(사53:6)고 하면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양을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범죄의 원인은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에 있고 또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2. 찾았다는 내용은 이러하다. 목자는 양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는 즉시 그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기 전에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99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기까지 찾아다니다”고 하였다. 목자는 반드시 양을 찾아야하고 또 양은 반드시 찾아져야만 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19:10). 예수님은 어떠한 곤욕을 당하시더라도 잃은 양을 찾아야만 하셨다. 목자는 “양을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매었다”고 하였다. 목자는 양에게 언제 어디에서 길을 잃었느냐, 왜 이렇게 되었느냐. 무엇이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는 등의 지난 일을 캐어묻지 않는다. 양을 찾았다는 그 기쁨만이 목자의 전체 관심사이다. 목자는 양을 끌어 앉는다. 목자는 양을 어깨에 둘러맨다.
3. 기뻐하였다는 내용은 이러하다. 양을 찾은 목자는 이웃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은 잃어버려진 자와 찾은 자의 겄일 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것이다. 찾았다는 기쁨은 모두 함께 누릴 기쁨이다. 어둠에서 광명을, 질병에서 건강을, 고난에서 안전을, 죽음에서 생명을, 순간에서 영원을 찾았다는 것은 기쁨 중에서 참 기쁨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인하여 더 기뻐한다”고 예수님은 결론의 말씀을 하여주셨다.
* 누가복음 15:8-10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의 비유):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1) 잃어버려진 하나의 질적 중요성, 2) 중요한 것을 찾아야만 하는 수고의 필요성, 3) 영적 구원의 기쁨과 그 불변성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1. 누가복음에서는 짝을 이루는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 시므온과 안나 남녀 성도,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이방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양 잃은 목자와 동전 잃은 여인의 비유 등이다.
2. 유대인들은 딸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 중의 일부가 바로 열 개의 드라크마(=Heb. 반 세겔, rom, 데나리) 은 동전이었다. 이 열 개의 동전은 한 줄에 달아놓고 “세메디”(Hb. semedi)라고 부르는 이마의 장식품으로 보관하게 하였다. 새로 결혼하게 되면 유산으로 받아온 여인의 모든 지참금은 남편과 아내의 공동소유물이 된다. 이때 세메디 은 동전 장식품은 여인이 결혼하였다는 표식으로 이마에 걸었다. 10개의 은 동전은 결혼한 여인의 신분을 나타내며, 유산이 딸려오는 새 가정의 경제적 안정을 보여주며, 남편과 아내의 유대관계를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가끔씩 이 세메디를 이마에 달고 나오면 그것을 보는 하인이나 종이나 노예들이 여주인의 신분을 재확인하게 되는 권위의 상징물이 되기도 하였다. 만일 10개 중에서 하나라도 잃게 되면 9개만 가지고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하나의 동전은 상징적, 정신적, 실제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3. 이와 같이 중요한 동전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그 책임이 동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동전을 소유한 여인의 부주의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하나를 잃으면 9개의 동전이 무가치하여지고 여인의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고 남편 될 사람과의 아름다운 유대관계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여인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서라도 잃은 하나의 동전을 찾아내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았다”(8)고 기록하고 있다.
4. 유대인의 집은 창문이 많지 않으므로 집안이 어둡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잘 볼 수 있었다. 또 그 당시 유대인의 집 바닥은 짚이 깔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짚을 쓸어내지 않으면 작은 동전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5. 부지런히 찾았다는 말 속에는 “집념과 고집,” “소란과 법석”을 부리는 여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한두 번 살펴보고 없으면 포기해 버리는 그러한 상항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6.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 듯 부지런히 영혼 구원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성을 요란하게 하는 자들”이란 비난까지 들은 것은 동전을 찾는 여인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7. 하나를 위한 수고는 곧 전체를 위한 노력이다. 작은 것 하나를 소홀히 하면 큰 것이 무너지는 원인이 된다. 예수님은 개인구원과 제자 각 사람의 신앙성장을 위하여 더욱 심혈을 기울이셨다.
8. 여인은 잃은 동전을 찾아내고야 만다. 찾고 나서 이웃 친구들을 초청하여 그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10). 하늘의 천군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한 생명이 찾아지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천사들의 할렐루야 찬양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은 그 찬양 속에 나타난다고 예수님은 강조하셨다.
9. 특히 동전은 만든 자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놓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한 개의 살아있는 동전과 같기 때문에 우리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우리들을 잃어버릴 수 없으시다. 우리들 각자는 언제나 예수님을 빛내는 장식품으로 존재하여야 하며 늘 예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누가복음 15:11-24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1) 아들을 잃게 된 원인, 2) 아들을 찾은 방법, 3) 아들을 찾은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1. 이 비유는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고 있다. 탕자를 중심인물로 보면 탕자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주인공은 아버지이다. 따라서 “좋으신 아버지의 비유,” 또는 “완전하신 아버지의 비유”라고 말하게 된다.
2.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잃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여 있으면 자기는 자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탐내게 된다. 유산이란 부모의 임종 후에 받는 재산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기었다. 아버지는 재제할 수 없는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 떠나 유산으로 받은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 자유의 생활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고야 만다. 재산도 잃고 자유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3. 예수님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이미 경고하신바 있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둘째 아들은 비로소 참 자유란 소유물에 있지 않고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 있는 하인들은 아버지를 떠나 살고 있는 아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하인들을 부러워하게 된다.
4. 둘째 아들이 찾아진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아버지의 권위와 영향력은 절대로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영향력은 변함없고 한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에 기인한다. 사람은 소유물로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마시며 살도록 되어있다는 것이 원칙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 아래에서 살고 있는 하인들의 신분을 부러워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야지!” 그 외에는 살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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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을 재확인하여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만 입힐 제일 좋은 옷과 아들에게만 끼워줄 반지와 아들에게만 신겨줄 신을 따로 가지고 계셨다. 여기에 언급한 옷과 반지와 신은 아들이 누리는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7.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었다.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 32)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다시 안김으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8. 누가복음 15:25-32에는 탕자와 맏아들의 비유가 계속된다. 예수님은 맏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가 바로 맏아들과 같다는 점을 지적하셨다. 잃은 아들이 육체적이며 외형적인 죄악을 범하였다면 맏아들은 영적이며 내면적인 죄악을 범하고 있었던 점을 들추어 내셨다. 맏아들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도 역시 탕자와 같이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점을 예수님은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탕자의 비유”는 “두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부칠 수 있게 된다. 맏아들의 범죄를 낱낱이 들추어 살펴보자.
가. 맏아들은 아버지(하나님, 예수님)를 사랑하지도 않고 동생(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성경말씀의 대강령(가장 크고 으뜸 되는)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부터 범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이 가정의 유산을 탕진하고 가문을 더럽힌 점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었고 아울러 그러한 탕자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드리는 아버지의 너그러운 행위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나. 맏아들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에 도취되어 살고 있었다. 누가복음 18:9-14에서 한 바리새인이 기도하면서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아뢰고 있는 장면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바리새인은 보이는 행위에서 죄악을 규명해내었으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세와 인간의 됨됨이에서 죄악을 규명해내셨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행위의 원칙보다 내면의 태도와 마음의 거룩함을 이루는 원칙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미 강조하여 주셨다.
다. 맏아들은 시종 교만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섬겨오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자기에게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였다. 겉으로는 순종이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쌓인 생애를 살고 있었다. 눈가림만 하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자처럼 가장하였고 단(순수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못하였다.
라. 맏아들은 잃어버린 자기 동생에 대하여서는 전혀 무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기 동생이 돌아온 것도 모르고 있었고 집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자기중심주의로 고립되어 살다가 종이 알려줄 때에 비로소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었다. 탕자가 집에 도착하기 전 멀리 있을 때에 뛰어나가 맞이하였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 맏아들은 분노하며 잔치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동생과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분노란 사람에게 일어나는 정상적인 감정의 일종이다. 예수님과 모세와 다윗 등이 보여준 의로운 분노나 거룩한 분노는 필요하다. 그러나 분노로 인하여 범죄 하지 말 것을 성경말씀은 가르치고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고 하였다. 올바른 때와 장소에서 올바른 목적과 방법으로 정도에 알맞게 할 수 있는 분노는 영혼의 재산이라고 하였다. 맏아들의 분노는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었다. 무가치한 탕자를 위하여서는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자기를 위하여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 누구라도 사람에게서 배척받아야 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 누구라도 사람에게서 사랑 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형제를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형제와 화목하지 않으면 심판을 면치 못하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고(마5:22-26), 요한1서 4장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신앙을 가진 자라(20, 21)고 지적하였다. 잃은 형제자매는 누구라도 언제 어디에서라도 기쁨으로 맞아드리는 것이 성도들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 눅15:18, 21에서: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하늘”: 여기에서 “하늘”이란 것은 “하나님”에 대한 완곡하고 부드러운 표현이다. 엄한 인상을 피하려는 표현법이다.
시51: 4.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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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에서 19-25장은 다섯 번째(Section Five)의 항목이며 신앙생활의 기본과 표준에 대한 자세를 다루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올바른 판단(The Judgement)의 표준을 세우려고 할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계시(말씀, 기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증을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아들(=어린아이)은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본보기가 된다. 이 항목(Section Five)에서 19-23장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내용이며 24-25장은 판단과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종말에 관한 설교말씀이다. 마태19-20장에서는 생활에 직결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1. 19: 1- 2 유대 지방에 들어가신 예수님
2. 19: 3-12 결혼, 이혼, 독신생활에 관한 교훈
3. 19:13-15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심
4. 19:16-30 부자들과 그들의 소유
5. 20: 1-16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비유
6. 20:17-19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예고
7. 20:20-28 위대함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8. 20:29-34 두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 마태19:3에서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예수님은 율법(모세)의 가르침이나 랍비(학자)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의 기록을 가지고 설명하여 주셨다.
1. 예수님은 여기의 기록(19:4-6)에서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져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결혼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은 한 몸을 이루어서 완성의 표본과 구원의 도리가 확립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2:18-25이 제시하여주는 결혼의 원칙을 강조하여 주셨다.
가. 먼저 하나님은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가 남자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았고 “돕는 배필”(=여자)까지 지어져야 완성된다는 뜻이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어야 모든 창조의 원리가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돕는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뜻이 아니며 “하나님이 사람을 돕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부가 서로 도울 수 있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에서 나온다. 성경말씀에서 “도움”이라는 단어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이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시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다. “배필”이라는 말은 “상대편, 상대역”이라는 뜻이다. 남자가 주역이면 여자는 상대역이며, 여자가 주역이면 남자는 상대역이 되어 반드시 “두 역”을 합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남녀를 서로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
라.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였다. “갈빗대”라는 말은 “옆”(side)이라는 단어다. 하나님은 “아담의 옆(side)에서 (측면을 가지고) 여자를 만드셨다.” 남자의 측면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는 뜻이다. 노아의 구원의 방주는 “옆”(side)이 있으므로 완성이 되었고 광야의 장막성전(tabernacle)은 “옆”(side)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써 세상과 하나님이 계신 곳이 구별되며 예수님은 “옆”(side)을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림으로써 우리들의 속죄와 구원을 완성하셨다(요19:34-36). 이때 흘리신 물과 피는 교회를 탄생하는 생명의 능력이 되었다.
마. 그런데 아담은 여자(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하였다. 여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아담은 발견하였다. 이것은 신비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하나님의 특수섭리를 의미한다.
바. 엡5:30-32에서 성도는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하면서, 남자가 아내와 합하여 한 몸 된 육체를 이루는 비밀은 바로 예수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같다고 하였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은 교회와 가정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받게 하여주신 것이다.
2. 예수님은 창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을 인용하시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가르쳐주셨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결혼이 성립된다. 결혼하면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부모의 다스림과 보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결혼 후에도 부모를 의지하고 부모의 도움을 바라게 되면 독립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에게 종속된 노예가정이 되고 노예생활에서 오는 갈등과 고통을 겪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처음부터 모든 생물이 핵가정 제도 하에서 성장 발전하도록 하여주셨다. 독립된 가정을 이룰 줄 알아야 하고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켜서 내보내야 한다.
나. 남자가 아내에게 연합하여야 결혼이 성립된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주신 여자를 감사히 받고 그 여자에게 들어가서 자기를 연합시킬 줄 알아야 한다. “연합하다”는 성경원어는 “섞는다, 혼합하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음식물을 함께 넣어서 갈면 본래의 모양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부부는 그들의 몸과 마음, 시간과 재산, 재능과 교육 등의 모든 것을 다 섞어서 혼연일체를 이루어진 참다운 연합체다. 따라서 한 번 연합하면 각자의 특성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고 공통성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이 곧 그 가정의 특성을 이룬다.
다. 남자가 아내와 한 몸을 이루어야 결혼이 성립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한 몸”이란 “하나의 육체”를 의미한다. 결혼이란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며 영의 세계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모든 활동을 함께 하도록 하여주셨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영혼까지 연합되었다면 영의 세계에 가서도 부부는 함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육체의 죽음을 마지 할 때에 끊어진다. 따라서 가정은 각자가 이 세상에서 신앙을 자라게 하여주는 온실로 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정생활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라. 한 가정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체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으며 결코 두 남자 또는 두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몸을 이루는 한 남편과 한 아내와 더불어 일평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 마19:13-15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고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안수하여 주시고 축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는 천국의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
1. 결혼의 열매는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가정은 어린아이와 함께 천국을 이룰 수 있도록 하여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고 아이들의 부모들을 야단쳤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2. 모든 성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배우고 닮아야 천국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언제나 배우고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의 질문과 호기심은 순수하다. 그들은 편견 없이 진리를 배운다. 그들은 개방적이어서 많은 것을 흡수한다. 또 의존적이어서 가르치는 자를 믿고 따른다. 이렇게 단순한 성품을 가져야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예수님의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첫째, 어린아이들 앞에는 어떠한 걸림돌이라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어린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19:13-22에는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와 나누신 대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젊은 부자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1. 젊은 부자는 성공적인 인물이며 겸손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학력과 경제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도덕심이 강하고 율법의 규율을 잘 지켰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일부를 열거하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젊은 부자는 어려서부터 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죄인이 아니며 의인이다.
2. 예수님은 그의 신앙에서 부족한 점을 들추어내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은 젊은 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회개”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주셨다. 회개가 없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있는 것을 의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예수님은 열 번째 계명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만일 열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그것도 잘 지켰다고 그는 대답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의 마음속에 탐욕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셨다. 그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였다. 탐심은 우상숭배다. 탐욕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탐심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젊은 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재물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었으나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다. 신앙의 기초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만다.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허물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기도는 헛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한다.
* 마19:23-26에서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를 말씀하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여 주시자 그들은 몹시 놀라워하면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의아히 여겼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구원 얻은 자의 물질관을 배우게 된다.
1. 많은 재물의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로 여겼다. 의인 욥이 재산과 자녀와 건강까지 잃은 것을 보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큰 죄악을 저질렀다고 단정하였다. 신명기 26-28장의 기록은 축복과 저주(=복과 화)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화를 받는다는 구체적인 사실들이다. 이러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애굽에서 해방되는 큰 구원을 체험하고 광야생활을 할 때에 받은 말씀이다. 이때 그들의 신앙은 유아기의 어린 상태에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말씀은 상급과 형벌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상급과 형벌을 약속하여야 효율적인 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한 사람은 상급과 형벌을 생각하기 전에 관심과 사랑의 동기부여로 인하여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게 된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젊은 부자가 자기가 가진 소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무거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라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부요한 생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것을 부정하시는 것인가? 그러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3.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란 사람의 노력과 사람이 쌓아 놓은 부요와 업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해답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구원의 주체는 곧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만일 우리들이 “나는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여도 천국에 들어갈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마19:27-30에는 믿는 자의 상급에 관한 예수님과 제자와의 질의응답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하고 질문을 하였다.
1. 우리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주실 상급은 “신령한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령한 축복은 물질적 축복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본래 영은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은 육체를 다스리고 있다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영혼의 축복은 육체의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한 제자들의 상급은 무엇인가?
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축복은 제자들이 받은 특수한 자격이다. 무엇을 받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 사람 자체의 가치가 새로워지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축복이다.
나.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희생한 성도는 현세에서도 엄청난 영적 수확을 거두어 드린다고 하였다(눅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였고 마가복음에서는 “백 배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수확과 열매다. 예수님을 위한 희생의 대가는 현세에서 수많은 믿음의 부모자식과 형제자매를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또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여주셨다. 먼저 되고 나중 되는 일은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앞선 자가 뒤에 서며 큰 자가 작아지며 또는 높은 자가 낮아지는 것과 같이 서열이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서열의 바뀜을 의미하지 않고 서열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조건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성도들은 차별 없이 똑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오래 된 신앙인과 초신자를 구별하지 않으며 특히 천국복음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 마20:1-16에서 예수님은 품꾼을 얻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1.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은 저마다 작업시간이 달랐다. 12시간, 9시간, 6시간, 또는 3시간,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포도원에 들어와 일을 하였다. 그들은 각자가 하루의 품삯 전부를 받기로 계약하고 일을 하였다.
2.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해가 저물기 전에 1시간씩 일할 품꾼들을 모아들였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계약도 없이 일을 시킨 것이다. 그날의 작업이 모두 끝나자 포도원 주인은 1시간만 일한 품꾼들에게 하루의 품삯을 전부 지불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12시간, 9시간, 6시간, 또는 3시간싹 일한 품꾼들에게도 하루의 품삯 전부를 지불하여 주었다.
3. 그런데 12시간 동안이나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였던 사람들은 자기들은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가 실망하였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이다.
4. 포도원 주인은 은혜를 베풀어서 모든 품꾼들이 똑같이 지불 받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살 수 있도록 하여준 좋은 분이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번에는 뒤집어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과 똑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백성들은 먼저 되고 나중 되는 차이가 전혀 없이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은혜를 나누며 서로 아름다운 교제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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