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2일 일요일

      8. 예수님의 비유, 종말에 천국백성의 생활태도 (7)    글쓴이: 방다니엘, 신학박사(Ph.D)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24:42)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24:44)
 
* 종말에 천국백성의 생활태도에 관한 내용과 배경은 아래의 비유에서 보게 된다.
. 악한 농부의 비유 (21:33-41)
.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 (22:1-10)
. 잎사귀를 내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 (24:32-34)
 
* 위의 세 가지 비유가 모두 마태복음 19-25장에 포함되어 있다. 이 장들은 마태복음의 기록 중에서 다섯 번째(Section Five)의 항목에 해당하며 그 내용들은 종말적 신앙생활의 기본과 표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종말을 사는 성도들의 일상생활에서 올바른 판단(The Judgement)의 표준을 세우려고 할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계시(말씀, 기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항에 처하여 계셨을지라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말씀하시고 행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의 삶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실증을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아들(=어린아이,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본보기가 된다. 이 항목(Section Five),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지상 생애의 종말(마지막)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은 종말적이며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을 향하여 가시면서도 종말이라는 시간에 매이지 않으시고 아버지와의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첫째 부분 (19-20): 아버지의 계시를 표준으로 삼으신 아들
둘째 부분 (21-23): 아버지의 계시로 환난을 이기신 아들
셋째 부분 (24-25): 아버지의 계시로 종말을 알려주신 아들
 
19: 1. 유대 지방에 들어가신 예수님 (19:1-2)
2. 결혼, 이혼, 독신생활에 관한 교훈 (19:3-12)
3.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심 (19:13-15)
4. 부자들과 그들의 소유 (19:16-30)
 
20: 1.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의 비유 (20:1-16)
2.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예고 (20:17-19)
3. 위대함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20:20-28) *** 섬김의 도리!
4. 두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20:29-34)
 
21: 1.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입성 (21:1-11) *** 평화의 왕께 호산나!
2.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심 (21:12-17) *** 성전청결!
3.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21:18-22) *** 사명완수!
4. 예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질문과 대답 (21:23-27)
5. 두 가지 비유의 이야기 (21:28-44)
. 두 아들의 비유 (28-32)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중요성!
.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 (33-44) *** 주인과 종의 관계!
6. 예수님을 대항하는 모의 (21:45-46)
 
22: 1.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 (22:1-14) ***
2.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 (22:15-22) *** 하나님의 형상 회복!
3. 부활에 관한 논쟁 (22:23-33)
4. 가장 큰 계명 (22:34-40)
5.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가 (22:41-46)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23: 1.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경고 (23:1-12)
2. 바리새인들을 향한 일곱 가지 화 (23:13-36)
3. 예루살렘을 향하여 통곡하신 예수님 (23:37-39) *** 통곡의 내용!
 
24: 1.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24:1-2) ***
2. 다가오는 환난 (24:3-14): 거짓 교사들(3-8), 환난의 시기(9-14)
3. 마지막에 관한 징조들 (24:15-28) ***
4. 인자의 다시 오심 (24:29-44) ***
. 인자의 오실 징조 (24:29-31)
.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교훈 (24:32-35) ***
.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 (24:36-44) ***
5. 비유의 이야기들 (24:45-25:30)
. 집주인과 종의 비유 (24:45-51)
 
25: .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25:1-12)
. 달란트의 비유 (25:13-30)
1. 심판 (25:31-46)
 
* 20:25-28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표본을 제시하여 주셨다.
1. 예수님은 천국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다는 점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도록 종용하셨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며 섬김을 받고 있으나 천국백성 사이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2. “섬기는 자란 원어는 다스리는 자”(minister, 목사, 장로)를 의미하고 있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자는 큰 자이지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란 원어는 노예를 의미한다. “집사라는 직분은 에서 나온 말이다. 집사의 직분은 노예의 신분을 가리키고 있다. 집사는 노예의 신분을 의식하고 봉사하여야 한다.
 
3. 예수님 생애의 목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는 말씀을 실행하신다.
 
* 마태21:1-11에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며 그리스도(=메시야),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이때에 비로소 만천하에 보여주신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스가랴 9:9의 말씀대로 백성의 왕으로 나타나셨고 겸손하게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다.
2. 8:6-9에는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며 모든 짐승도 복종케 하신다고 하였다.
3. 이때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펴고 군중들도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다는 수락과 경배를 드린 것이다 (cf.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온 백성은 메시야에게만 드리는 찬양과 간구인 호산나”(=“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여 주옵소서”) 소리를 높이 외쳤다(cf. 9:9).
 
* 마태21:12-17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에 입성하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청결을 감행하신다. 성전청결이란 성전답지 않은 인간탐욕의 요소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성전을 일컬어 한 마디로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달라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도를 의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 세계를 향한 복음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어진다.
 
1.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만 위한 예배장소가 아니었고 이방인들도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전 외곽에는 이방인의 뜰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선교의 장소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과 훈련의 장소인 성전이 인간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향되었을 때에 성전청결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2. 예수님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애어 쫓았을 때에 회복된 성전의 기능이 나타났던 것을 보게 된다.
첫째, 이제까지 성전 안에서 볼 수 없었던 소경과 저는 자들이 보여 졌다. 예수님은 그때에 환자들을 고쳐주셨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비로소 치유와 회복의 참다운 예배처소가 된 것이었다.
 
둘째, 이제까지 성전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 찬양의 함성이 들려졌다. 예수님의 성전청결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8:2) 귀하신 작업이었다.
 
셋째, 이제까지 들어볼 수 없었던 메시야 예수님을 섬기는 찬양이 성전에 넘치게 되었다. “호사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참다운 성전활동은 언제나 메시야 예수님의 이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예수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성전은 예수님의 대속사업이 완성되는 순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하며 예수님께서 친히 외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나감과 아울러 성전 건물의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성전건물이나 몸 된 성전청결은 심판의 채찍임을 알려준다.
 
* 마태21:18-22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잎사귀는 있는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히지 못하리라.” 말씀대로 저주받은 무화과는 곧 말라버리고 말았다.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과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나라, 그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의 사명을 지닌다.
 
1. 본래 무화과나무는 처음부터 열매가 나타난다. 나무가 자라가면서 열매도 함께 익어가는 것이 무화과의 특징이다. 처음부터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잎사귀만 무성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린 것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후 40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과 함께 흩어진 백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천국과 구원의 열매를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주셨다. 그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언약이었다. 그 언약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존속하여 왔는데 이스라엘이 심판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들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이상히 여기면서 어찌하여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질문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11:22)고 말씀하시면서 신앙의 원칙을 다시 설명하여 주셨다. 신앙인은 종교적이며 의식적인 행위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가 무르익도록 하여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 마태21:28-3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포도원을 가진 아버지가 맏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나가서 일하라고 명령한다. 맏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아들은 실상은 아버지와 아무 상관이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아들이므로 아버지는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는 것이며 아버지이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서 집안일을 보는 것이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명목상의 아들에 불과하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 참다운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2.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참다운 아들의 자격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다.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대적인 대각성이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 천국건설의 분명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더욱 분명하게 그들 앞에 전개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3.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어보셨다. “그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 “둘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인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일러주셨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참 자녀의 자격을 상실한다. 뉘우치고 돌아서는 회개와 믿음은 언제나 요구되는 귀한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둘째 아들과 같이 되어 줄 것을 원하고 계신다.
 
* 마태21:33-4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포도원을 소유한 주인은 포도원 사업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다 갖춘 후에 포도원의 운영을 농부들에게 맡겼다.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정한 때에 주인에게 바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아들까지 보내어 포도원의 수입을 거두어 드리려고 하였으나 포도원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을 없애버리고 포도원의 운영을 다른 농부들에게 맡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은 극상품 최고의 포도나무를 심고 최상급의 포도원을 만들어서 가장 좋고 많은 수확을 계획하였으나 기대하지고 않았던 들포도를 맺었기 때문에 포도원의 진가를 잃어버리고 결국 황폐하게 되었다. 이사야 5:7의 말씀은 이러하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 이었도다
 
3.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포도원과 같았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가꾸고 기르는 포도원의 농부들과도 같다.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만 채웠다. 따라서 예수님의 엄하신 경고가 내려졌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심판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빼앗겨졌다는 것이며, 둘째, 그 하나님의 나라가 열매를 맺고 수입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아는 이방 백성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4.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에게 돌려보낼 영광을 가로챘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시편 118:25의 말씀에서 호산나”(=이제 구하옵나니 구원하옵소서)로 찬양의 소리를 높이 불렀으나 종교지도자들은 배척하였다.
 
5. 예수님도 백성들이 인용한 시118편을 인용하셨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23). 머릿돌은 천국건설의 기초다. 돌과 반석은 구약시대로부터 견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머릿돌이시다. 이 머릿돌은 천국건설의 기초이며 심판의 표준도 된다. 따라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44)고 말씀하셨다.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고 하셨다. 자기를 예수님에게 던져버리고 깨어지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다. 거두어드린 포도원의 열매와 수입을 주님에게 드려야 한다.
 
* 마태22:1-1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혼인잔치의 비유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권유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잔치 집에서 내어주는 예복을 입지도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천구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자격을 빼앗겼다고 해설하여주셨다.
 
2. 예수님께서 연속적으로 말씀하여주신 (1) 두 아들의 비유 (2)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3) 혼인잔치의 비유의 세 비유는 역사적인 흐름에서 일어날 일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종말에 관한 예언적인 비유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아들은 천국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과 아들을 살해한 자들 역시 천국백성의 자격을 빼앗겼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성령님의 권유를 받는 기회와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성령님의 부르심을 거절할 때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3. 성경말씀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사도행전 7장까지는 구원의 복음이 오직 유대인(=이스라엘) 백성을 위주로 전하여졌다. 하나님의 계획은 먼저 유대인에게!”(1:16; 3:26)라는 원칙대로 역사를 진행하셨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교회를 세우심)을 거역하고 교회를 핍박하였고 성도들을 살해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천국잔치에 들어가는 영광을 빼앗기고 그 귀한 특권이 이방인들에게 옮겨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본문의 비유에서 잔치에 초청을 받은 그들은 초청을 안내하는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므로 잔치주인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진멸하기까지 하였다. 초대교회의 집사 스데반은 순교의 현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스렸다”(7:51)고 증언한 것은 그들의 죄악상을 한 마디로 함축한 내용이었다. 유대인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척하고 성령님까지 거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약으로 보장하여 주신 장자의 특권을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빼앗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5. 갈라디아서 3:14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유대인과는 다른 상항에 처하여 있다. 우리들을 향하신 성령님의 사역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말씀이며, 둘째,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더불어 시작된 교회의 교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의 성도가 되지 않고서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들 이방인들을 향한 강한 메시지이다.
 
6. 천국의 주인은 유대인들에게는 초청장을 미리 주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각자에게 예복을 주셨다. 예복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천국잔치의 영광을 즐기는 자격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예복을 입으라는 천국주인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된다. 만일 우리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결박을 당하여 어두움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유대인도 청함을 받았고 이방인도 예복을 받았으나 만일 순종하지 않으면 택하심을 받은 천국백성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경고하셨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고 하였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천국백성의 자격을 영원히 간직하여야 한다.
 
* 마태22:15-22에는 세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1. 로마정부에서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poll tax)의 경우, 바리새인들은 세금을 바치는데 반대하였고 헤롯당은 찬성하였다. 그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아니오를 분명히 규명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는 대답에는 로마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넣고 그렇다는 대답에는 유대인에 대한 반역자로 규명하려는 처사였다.
 
2. 예수님은 그 당시의 동전이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반문하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21).
 
3.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몇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다스리는 자를 존경하고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도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3:20). 우리는 속하여 있는 국가 및 사회의 법규와 질서를 존중하여야 하며 다스리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복종하여야 한다. 가이사나 다스리고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셋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인간을 죄악을 범한 후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인간 죄악의 대가를 당신이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 마태22:41-46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메시야)에 관하여 중요한 질문을 하신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구약성경의 가르침(cf. 삼하7:12-13; 78:68-72; 5:2) 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하고 즉시 대답하였다.
 
1.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육의 자손으로만 알고 있으면 바른 신앙이 생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시편 110:1의 기록(=다윗의 시)을 인용하셨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22:44). 성경말씀의 저자인 다윗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시편의 말씀을 남겼다.
 
2. 예수님이 인용하신 다윗의 시는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신앙인이었다. 그리스도(=메시야)를 자기의 주님으로 알고 예배의 대상으로 섬겼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945)고 반문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3. 그리스도는 사람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한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보면 다윗의 주님이 되시며 사람으로만 보면 다윗의 자손이 된다. 시편 110:1의 말씀은 예수님의 온전하신 신성과 인성을 가리키는 구절이며 예수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 마태23:37-24:2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파괴 될 것을 예언하셨다. 누가복음 19:37-44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심한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다. 왜 그리하셔야만 하였는가? 통곡과 눈물의 내용이 무엇인가?
 
 
첫째, 예루살렘은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19:42).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예루”(=)살렘”(=평화)이 합친 말이다. 백성들은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평화에 관한 일이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으나 백성들은 평화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이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누가복음 2:10-14의 내용을 보자.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군중들은 땅에서 누리도록 선포된 평화를 하늘에 돌려보내는 찬양을 하고 있었다. 19:37-38의 기록을 보자.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둘째,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곧 멸망하게 될 것을 미리 보시고 심한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이란 곧 세상의 종말을 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을 버리면 유대인이 아니며 예루살렘이 없어지면 유대인은 생활기반을 잃고 산산이 흩어지고야 만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이 흩어져버릴 것을 미리 보고 계셨다.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주후 70년에 로마의 세력은 143일간 저들을 포위한 후 6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예루살렘 도성을 함락하여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셋째,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권고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 권고 받는다는 말은 방문을 받는다”(visitation)는 말이다.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에 영접하여 드리면 축복과 번영이 이루어지고 배척하면 심판과 저주를 받는다. 저들은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메시야의 방문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 마태복음 24-25장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의 말씀이다.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감람산에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성전을 나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장차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2)고 예언하셨다. 제자들은 산에 오르자마자 예수님의 예언에 대하여 첫째,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둘째,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는지의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여기에 해답을 주신 말씀이 바로 감람산 설교. 24-25장의 요절은 마24:42, 44의 핵심사항이다.그러므로 깨어 있으라!”“이러므로 준비하고 있으라!”“주의하라!” “삼가라!” “기도하라!”

* 마태24:3-14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7년 환난의 초기에 관한 예언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7년 환난의 초기를 재난의 시작”(8)이라고 표현하시고 그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셨다.
 
1. 먼저 재난이라는 말을 성경원어에서 해산의 고통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경말씀에서는 7년 환난을 여인의 잉태와 관련하여 해산의 고통으로 묘사하고 있다(13:6-8; 4:31; 6:24; 13:21; 22:20-23; 살전5:3). 해산의 고통은 잉태의 괴로움이 조금씩 조금씩 더하여지고 계속되다가 아기를 분만할 때에 갑자기 발생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7년 환난이 발생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 여러 가지 이들을 예수님은 일일이 나열하셨다.
 
2. 그 첫 번째 일들은 거짓 신앙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출현이다. 역사의 기록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거짓 신앙을 가르치는 거짓 스승이나 예언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도 이미 경고하셨고(7:15-20), 사도바울(20:28-31)과 사도요한(14:1-6)도 경고하였다. 참된 구원을 줄 수 없는 적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이 환영하게 되는 정치적인 이변은 대환난의 시작을 가져오는 징조로 예언되고 있다(9:27; 5:43).
 
3. 예수님은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연이어진다고 하셨다. 세상 끝날 까지 수많은 전쟁은 계속 될 것이다. 따라서 전쟁발생의 소식들은 환난의 때나 주님의 재림시기를 예고할 수는 없으나 환난시대의 고통을 제시하고 있다. 또 처처에서 일어나는 기근과 지진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온다고 하셨다. 전쟁으로 인하여 기근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을 잘못 사용한 결과다. 그런데 지진의 발생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증거임을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다(6:12; 8:5; 11:13; 16:18). 그러나 모든 재난의 징조를 가지고 마지막 때를 교리적으로 규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4. 다음으로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미움은 기혹한 박해와 실상으로 증가하여지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를 씨로 뿌리고 지금까지 수확을 거두어 왔다. 유대교와 이방종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가족과 친구의 명분도 초월하고 박해와 고난을 가하는 사례가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들은 선교사들의 보고에서 듣고 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은 날이 갈수록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은 외면을 당하는 세대의 출현을 알려주고 있다.
 
5. 이러한 모든 일들은 갑자기 임하는 고통의 증상들이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을 두 가지 요점으로 강조하셨다.
첫째,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4). 어떤 꾀임이나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른 신앙을 지키는 중요한 요건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둘째,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6). 하나님께서는 낳으신 백성, 거듭난 자녀들을 결코 내어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나 수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받는 모든 고난은 결국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배려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자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10:27)고 말씀하셨다.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충성스러운 믿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 마태24:15-22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7년 환난의 중간기에 관한 예언이다. 이 환난의 예언은 교회에 속한 이방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는 세계정세를 볼 수 있게 하여주며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
 
1. 예수님은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되는 때”(15)를 지적하셨다. “가증한 것”(the abomination=증오, 싫은 것)이란 우상을 의미한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스러운 우상이 세워지고 예배를 강요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을 예수님은 재확인하여 주셨다.
 
2. 다니엘서 9:24-27을 보면 칠십 이레”(=70x7)라는 “490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파괴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꿈과 기대로 늘 채워져 있었다. 거룩한 성전이 없이는 대망의 메시야를 맞아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44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었다. “일곱 이레”(=7x7)49년의 기간에 성전이 재건된 이후 육십 이 이레”(=62x7)434년이 지난 때에(=49+434=483)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이때까지 일곱 이레육십 이 이레의 예언은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고 거짓 메시야(=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또 다른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 기간이 바로 남아있는 한 이레”(=7)에 해당한다.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7년 환난”(=한 이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3. 다니엘 9:26에서 언급한 한 왕이란 곧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계시록 13-14장에서 짐승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화를 약속하여 주고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도록 허락하며 유대종교 특유의 희생제물과 예배의식을 보장하여 준다. 적그리스도는 유럽의 연합 10개국을 다스리는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잠간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다니엘 9:27에서 이 7년 기간 중의 후 삼년 반에 적그리스도는 결국 가증한 것”(the abomination)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운다고 하였다.
 
4. “가증한 것이 세워지기까지의 세계정세는 에스겔 38-39장에서 보충하여 예언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알고 그를 영접한 이후에 이스라엘 국가는 소련의 침공을 받는 일이 생기게 된다. 소련의 침공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진멸되고야 만다. 소련이 퇴각하는 때를 절호의 기회로 삼고 적그리스도는 이때에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이전의 약속을 파기하고 자기가 성전을 장악하고 자기를 섬기고 예배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7년 중의 3년 반의 때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the abomination of desolation)이 거룩한 곳에 세워지는 때이다.
 
5.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가하게 된다. 이때에 일어날 고난과 박해는 너무나도 심하기 때문에 큰 환난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21)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누가복음 21:20-24에서 주후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파괴될 때의 참상과 비슷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분명하게 다른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6. 7년 환난이 시작되기까지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같은 자연적인 심판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7년 환난의 기간 중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심판이 예고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배울 때마다 우리들도 안일한 현실생활에서 신앙적 각성을 하여야 할 것이며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마태24:23-31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7년 환난의 후기에 관한 예언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7년 환난을 당한 후에 재림하시는 인자 예수님을 마지하게 되는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메시야 예수님을 배척하였으나 그 중에는 택함을 받은 자들(24:22, 24,31)이 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관심이 매우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잘못 판단하여 거짓 그리스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여 주신 내용임을 곧 알 수 있다.
 
1. 유대인들은 기사와 이적을 따르는 경향이 있으므로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는 그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일것이라고 하셨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을 일삼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잘 걸려 넘어진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참된 표적은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으나 거짓 표적은 믿고 영접함으로써 적그리스도에게 휘말려 잡히고야 만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메시야를 만나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다든지 골방에 찾아간다든지 하는 괴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2. 예수님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임하리라”(27)고 하시면서 임하시기 바로 직전에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는 일”(28)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이것은 곧 계시록 16장과 19장에서 예언하고 있는바 장차 이방나라들이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벌리고 대학살을 몰고 올 대사건을 의미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우주와 천체에 큰 이변이 생겨날 것도 예언하셨다.

3. 그때에 예수님은 구름을 타시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시며 그때에는 모든 족속들이 재림하신 예수님을 일시에 보게 될 것이라고 허셨다. 데살로니가 전서 4:17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공중 재림은 여기에서 언급한 지상 재림과는 다르다. 공중 재림은 교회의 성도들을 불러드리는 사사로운 사건이며 지상 재림은 7년 환난 이후에 교회와 관련 없는 구원과 심판을 만국 백성에게 베푸실 공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31절 말씀에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라고 하신 내용은 지상 재림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중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며, 데살로니가 전서 4:16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라고 한 내용은 공중 재림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나팔소리는 구약시대로부터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소리로 들려졌다(23:23-25; 10; 2:1).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나라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막론하고 나팔소리는 모아드림과 진행을 의미하며 그 소리의 형태는 때를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7년 환난에 관한 구체적인 시기와 내용에 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주장으로 엇걸려 있으나 공통적인 가르침은 알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언제인지는 모르나 반드시 들림을 받는다는 사실(살전4:13-18; 고전15:51-58), 유럽의 연합10개국의 지도자는 이스라엘과 7년간의 동맹을 체결하나든 것(9:26-27), 동맹 체결 후 3년 반 이후에 적그리스도는 동맹을 깨뜨리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 내에 자기의 형상을 세운다는 것(살후2:3-4; 13), 적그리스도는 온 세계인이 자기에게 복종하고 예배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12; 13:13-14; 19:11), 예수님은 지상재림 하셔서 적그리스도를 없애고 유대인의 영접을 받고 왕국을 건설하신다는 것(19:11; 12:7-13:1), 예수님은 지상에서 천년 동안 다스리신다는 것(20:1-5) 등이다. 따라서 이러한 예언에 관한 내용들은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우리들에게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믿음을 잘 간직하도록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마태24:32-51은 매우 가까이 온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과 관련된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무화과나무의 비유
둘째, 노아의 때에 관한 비유
셋째, 도적이 들어오는 비유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언제 어느 때에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르지만(36)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35)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 첫째,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의 움직임과 예수님의 재림이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2-33)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이 움직이는 모든 일을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이미 재림의 시기는 매우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는 지금 세대는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인 것을 알 수 있다.
 
2. 둘째,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은 시대적인 특성을 보여줄 때에 임하게 된다. 그 시대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기까지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39)는 것이 특징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사실은 장차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공할 7년 환난의 기간 중에도 가적적인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한편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의 승천은 교회가 반드시 들림을 받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5:21-24; 11;5; 살전5:1-10).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생활을 즐겼다는 예화를 드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활을 즐기는 사실을 비난하신 것이 아니며 그들이 그 일에만 몰두하여 있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말씀하셨다. 생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구원을 즐기라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버려두고 덜 좋은 것만을 탐닉하다가 멸망을 받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그 얻은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것과 같다. 그 때에 밭을 가는 두 사람 중에서 또 매를 가는 두 여자 중에서 더 좋은 구원을 예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나 여인은 예수님이 세우시는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구원과 멸망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교회의 들림과 관련하여 설명하신 것이 아니다.
 
3. 셋째, 예수님의 재림은 도적이 들어오는 사례와 비교된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도적을 당한다. 그러므로 도적을 당하지 않으려면 도난방지를 위하여 생각을 많이 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앞의 비유에서 는 그 날과 그 때를 언급하셨으나 도적의 비유에서는 그 경점”(=밤 시간)을 언급할 정도로 급박한 상항을 말씀하셨다. 택함을 받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견딜 수 없는 환난의 기간도 단축하시며(22) 도적같이 신속히 임하여 구원을 베푸신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4.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에 유의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5, 46)라고 하셨다. 우리들에게 맡겨진 재능과 소유물로 때를 따라 나누어주는 자가 곧 충성과 지혜의 종이라고 하셨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움직임에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런 깨달음이나 생각도 없이 자기생활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을 때에 택함 받은 성도들은 더욱 충성과 지혜의 생활을 하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성경은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 마태복음을 종말론적 시각으로 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종말론은 단순히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이어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救贖史)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을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종말시대)와 연관하여 설명하게 된다.
 
1. 약속과 성취
마태복음은 구약이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실현되었음을 증거 한다. 마태는 이 내용을 우선은 예수의 족보를 열거함을 통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1).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17)과 다윗에게 언약을 약속하여 주셨다. 이 약속의 내용이 종말의 예수님의 역사와 관계하는 종말론의 비밀을 보게 된다. 구약의 예언은 약속과 성취의 구도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며 “ . . . 함이 이루어졌느니라”(fulfilled)라고 표현한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예언 내지 약속과 성취사이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종말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이 약속한 메시아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2. 예수님의 오심은 새 시대와 종말시대의 임한 상태를 보여줌
새 시대는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첫 아담이 시험을 받던 사건에서 타락과 구원으로 연결된다(4:1-11). 성령님의 충만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을 증명하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는 선포는 새 시대” “새 패러다임 시대의 도래를 선포한다. 그리하여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넣어지는 종말적 사역이 이루어진다.
 
3. 종말 공동체(하늘나라, 천국, 신국)에 속하는 사람들 (5-7)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종말시대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이 나라가 확장해 나간다. 새로이 시작된 종말시대의 하늘백성들의 자격(資格)은 팔복(산상보훈)에서 정의되며 또 그들은 새 시대의 성격과 맞물려 돌아간다.
 
4. 종말 시대의 특성
예수님의 종말사역은 사탄과 귀신들의 마지막을 증거 하여 준다. 예수께서 사역과 더불어 사탄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식한다. 가다라 지방의 귀신은 자기의 마지막이 왔음을 직감했다. 아울러 새로 온 종말시대는 영적인 전투 시대임을 가리키고 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 종말시대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으며 어두움의 자식들과 영적인 갈등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유대인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가지셨던 사실은 특기할 일이다. 그러므로 헤롯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살해한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으로 바리새인을 향한 긴장과 갈등을 마태복음 23장에서 표현하신다.
 
.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설명하는 비유들에서 천국이 시작되며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할 단계임을 분명하게 가르치시며 종말을 예시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이며 종말적이며 새시대적이며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 예수님은 성찬식에서도 재림의 때와 연결된 실존을 언급하셨다. 믿는 자의 눈은 현실을 살면서 늘 재림의 때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잘못된 종말 시대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을 때 이들은 영광의 메시아가 도래한 것으로 알고 기뻐했으나 기대에 어긋나자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이 예수님의 영광의 큰 자리를 요구한 것도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메시아는 먼저 고난을 당하고 그 다음 영광에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오해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일조(一助)한 것이다.
 
5. 종말론은 창세기의 처음부터 예수님의 존재와 인격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이사야 46:10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창조, 타락, 가인과 아벨, 에녹, 홍수, 바벨 탑, 아브라함, 소돔과 고모라, 야곱과 요셉, 등 창세기의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종말적인 사건들의 예표를 찾아내게 된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단순히 역사의 종말에 있을 일련의 사건과 진행과 결과에 대한 것을 연구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성경말씀은 계시의 처음부터 하나님은 종말을 보이신 것이며 종말론은 성경 계시의 진정한 결론으로 주신 것이다.
 
. 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종말에 대한 약속이다. 파멸로 끝나는 그런 종말이 아닌 소망이 성취되는 약속이다. 여자의 후손은 이런 종말을 이룰 종말론적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1:2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에 나타난 종말론적 사상의 핵심은 뱀의 머리를 상하는 것의 참된 의미인 죄를 끝내는 것이다. 종말인은 죄가 끝난 사람이다. 성경의 종말 사상의 가장 중심 되는 사실은 죄를 끝내는 것이다.
 
. 성경적인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Person)을 중심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종말론은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학문으로 주로 '때와 시간' 중심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에 관련된 모든 기록도 이 시간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부활도 죽음 이후에 시간의 경과 후에 오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부활은 주 예수님과 함께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 22:13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시간적 사고를 가지고 알파에다 어떤 기간 이후에 오메가에 이른다는 이해는 오해다. 예수님 자신은 알파이시며 오매가시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 자체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시공간에 제한되신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One)이면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구약 교회 전체와 신약교회 그리고 앞으로 오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을 다 포함하는 분이시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모든 사역과 이해를 예수님의 인격과 존재(being)에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천국(Auto Basileia)이심을 강조하시며 예수님의 인격 중심으로 종말론을 전개하여 주셨다.
 
. 예수님은 참 성전으로서 온 교회적 인격(whole church Person)으로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를 포함 할뿐 아니라 나아가서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성도들과 하늘의 교회까지 다 포함하시는 분으로써 우주보다 더 큰 만유적 인격(Panta Person)을 가지신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온 천지 우주 만물이 무너지고 개벽하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 일례로 마24:29에는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라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게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파괴되자 그림자 성전인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 “세상 끝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시공간적인 ”(eschaton) 복음 전파로 인한 목적 완성의 ”(teloi)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시간의 세계 안에 살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하여 천국의 삶을 지금-여기서 살고 있다. 모든 완결의 끝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및 성령 강림으로 이미 이룩되었고 장차 몸의 구속까지 약속으로 받고 있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