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요1-2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요한복음 1:1-18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 생명, 빛,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라는 사도요한의 증언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신적 존재인 예수님께서는 지상생애를 통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그 기적의 일부분만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목적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고 저자 요한은 서술하였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저작자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읽는 것이 독자들의 의무다. 다시 말하면 독자인 우리는 서론과 결론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놓인 기록들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영접하여야 한다.
* 오늘은 1:19-51; 2:1-25에 걸친 내용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그를 향한 신앙의 핵심을 추구하여 본다. 우선 여기에 기록된 내용들을 열거한다.
I. 세례요한의 증언(1:6-8, 15, 19-36)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II.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의 증언(1:35-42) ->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III. 빌립과 나다나엘의 증언(1:43-51) -> “와서 보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IV.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2:1-12) ->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다”
V.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기적(2:13-25) -> 성전에 나타난 영광과 권위
* 세례요한의 증언(1:6-8, 15, 19-36)
1. 요한이란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Yahweh is graciou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없는 제사장 가정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태어난 독특한 아들이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영적 공황기에 새로운 은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불러 세우셨다. 그는 광야에서 담대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고 설교하면서 유대민족이 받을 새 은혜의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다. 세례요한은 새 시대가 받을 은혜는 하나님께서 곧 보내어 주시는 “메시아”와 “천국”을 영접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회개”하며 준비하여야 한다는 각성운동을 펼쳤다.
2. 세례요한의 특색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물세례를 베풀어 주었다. 이 세례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의 반열에 들어오기 위하여서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모든 죄를 씻어야 한다는 뜻으로 베풀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이방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유대인이 죽어서 실수하여 지옥 길에 들어서면 지옥 문 앞에서 아브라함은 유대인은 지옥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하늘나라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를 믿을 정도로 선민사상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헛된 믿음을 배척하였다. 세례요한의 복음은 메시아가 매우 가까이 오셨다는 것이며 만일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비록 유대인일지라도 천국백성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3:8-9)고 가르쳤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세례요한에게는 모두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유대인들이(당시에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자는 20만-5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요단강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고 심지어 세례요한이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믿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던 것이다.
3. “회개”라는 원어(헬, metanoia)는 “마음,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마음의 변화는 방향전환의 행동과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3단계의 회개를 가르친다. 첫째, 범죄의 고백(잠28:13; 시32:5-6), 둘째, 죄악으로 인한 피해 보상(민5:6-7), 셋째, 동일 범죄의 무반복(히10:26-27; 1요3:9)이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와 열매 맺는 생활의 실천사항을 열거했다.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정한 세금 외에는 더 받으려고 억압하지 말아라,” “사람에게 포악하게 하지 말고 받고 있는 봉급에 만족하여라.”
4. 세례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도 아니며 분명히 하나님이 보낸 사역자이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말로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세례요한은 오히려 예수님의 증인으로 독특한 위치에서 독특한 특권을 누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메시아(=예수님)에게 “기름을 붓는 특권을 누렸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리하여 “기름부음 받은 자”란 곧 “메시아”를 의미하였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 불리는 세례요한은 새 시대의 궁극적인 왕이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서 기름 붇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에게 누가 메시아라는 것은 지적하여 주지는 않았으나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1:33-34)는 심오한 영적 고백을 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할 때에 요한은 사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미3:15)고 하시기에 요한은 세례의식을 거행하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었던” 것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반드시 사람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과 “오직 의인만이 속죄를 베푸실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역을 위하여 메시아가 되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받으셔야만 하는 세례는 “기름부음과 같다”는 독특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5. 또 세례요한은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 제도를 예수님이 성취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 핵심선포는 다음과 같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36). 이러한 선포의 배경은 이렇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대가는 죽음뿐이며 속죄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흠(죄) 없는 어린 양의 죽음과 피로 사람의 죄를 사하시며(속죄)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는 대속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흠(죄) 없는 어린 양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어야만 하는 속죄 제물이었다. 창세기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이 희생되었고 레위기에서는 속죄를 위한 어린 양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어린 양의 희생은 장차 오실 예수님(실체)의 모형에 불과하였고 예수님은 영원하신 어린 양으로 단번에 구약의 제도(모형)를 완성, 성취(fulfill)하셨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은 구약의 예언과 모형이 성취되는 상항을 하나님의 예언 성취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 “예언의 성취”를 선포한 것이었다.
* “하나님의 어린 양”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열거하여 본다.
1.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있어야 선민이 구원을 받는다.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을 유월절 양으로 삼아 죽이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살코기는 남김없이 다 먹었다. 피가 발려진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다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고 피가 없는 애굽인 집의 모든 장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은 지금도 세상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선민을 이끌어내고 계신다.
2.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있어야 날마다 은총을 입을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어린 양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번제물로 바쳐졌다. 번제물의 희생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다. 어린 양의 피는 성막 앞의 제단 사면에 뿌려졌고 어린 양의 고기는 조각을 내어 제단 위에서 태워졌다. 성도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난다.
3.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있어야 영생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레17:11)고 말씀하셨다. 죄악을 대속하는 어린 양의 피가 하나님 앞에 놓여 질 때 죄인은 죽지 않고 새 생명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죄 없는 피가 흘려졌을 때 대속과 영생의 길이 열리며 영생의 첫 부활로 연결된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4.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여호와 이레) 약속의 성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새 생명의 선물로 받은 것과 같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우리 각자의 죄를 지고 청산하셔서 우리들의 구원과 영생을 완성하여 주셨다.
*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할 때에 그의 마음속에 예수님이야말로 죽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고 보내신 속죄 제물이며 희생양이신 것을 직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천사들도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10.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swaddling clothes)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a sign)이니라”고 하였다(눅2:10-12). 강보에 싸여 뉘어 있는 아기를 보는 것이 무슨 표적(기적, sign, 신호)이 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강보”라는 것은 “둘둘 두르는 헝겊”을 의미한다. “죽은 사람의 몸과 얼굴을 두르는 헝겊”과 같은 것이다. 누가 새 아기에게 수의를 입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나는 즉시 “죽음의 수의”를 입으신 것이다. 이것이 표적(기적)이라고 천사는 설명하여 주었던 것이었다.
* 세례(baptism)라는 말의 뜻도 죽음과 직결된다. 본래 세례(Gk. baptizo)란 선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써 “물에 잠긴다”는 뜻이다. 그들은 배가 파선되어 물속에 빠지고 자기들이 죽어갈 때에 “세례! 세례!” (Baptizo! Baptizo!)라고 부르짖었다. 우리말로는 “사람 살려!”라는 뜻이다. 구조의 소식(SOS=Save our ship.)을 듣고 출동한 구조원은 도착하여 물에 빠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서 자기도 물속에 뛰어 들어간다. 예수님은 죽음에 처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 속에 뛰어 들어오신 것이다. 이사야 53:2에서 “예수님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여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예언하였다. 하나님의 모든 의로우신 요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세례요한의 사역의 의의
1. 세례요한의 사역은 구약의 종결과 신약의 시작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사역이며 자기까지의 모든 구약의 사역을 예수님에게 그 사역의 베턴(the baton, 사령장)을 넘겨드림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완전한 연속성(the perfect continuity)이 있게 하였다. 그가 예수님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1:31). 죄인들이 구원 받는 새 역사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물세례는 그림자(모형)의 세례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성령세례가 모형의 세례를 완전하게 하는 성취(실체)의 세례가 된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알곡과 죽정이를 구별하는 능력의 세례라는 것을 공관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다.
2. 세례요한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요1:6)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15, 30). “먼저”(before, Gk. protos)라는 말은 “첫 번째”(first)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는 나보다 앞서 첫 번째로 계심이라”고 직역하게 된다. 이 말은 1:1에서 “태초에 계시니라”는 창조 이전의 존재를 나타낸 사도 요한의 증언과 상통하는 놀라운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1:36)고 고백하고 있다.
3. 세례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자기는 언제 소멸되고 언제 사라져야 하는지 그 때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 3장을 보자.
3: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4. 역사학자인 누가는 세례요한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사역의 때로 전환되는 사실을 재미있게 기록하였다. 누가복음 3:18-22을 참고해 보자.
눅3:18.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위의 기록에서 18-20에서 세례요한은 분명히 헤롯왕에 의하여 옥에 들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21-22에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누구에게 세례 받으셨다고 기록하지 않고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옥에 있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 베푼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저자 누가는 요한의 시대를 종결 짖고 있는 것이다.
5.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입었고 성령님의 사역에 민감한 사람이었음으로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오시는 모습을 분명한 영적 감각으로 볼 수 있었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증언을 할 수 있었다. 1장 32-34을 보자.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6.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마태복음 11장에서 언급하여 주셨다.
마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두 제자(안드레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의 증언(1:35-42)
1.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세례요한이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언하였기 때문에(1:29, 34) 예수님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따르게 되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칭 보다 예수님의 사역에 중점을 두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직언하지 않았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며 선지자도 아니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갈 길을 열어 놓았다.
2.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 두 사람에게 “너희들은 무엇을 찾느냐?”고 질문하신다. “랍비여(=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 이러한 반문에 “와 보라”(Come and see.)는 초청을 하신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오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예수님은 집 한 채 방 한 칸도 갖지 않으시면서 사역에 집중하셨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물었을 때에 “와 보라”고만 하셨다. 과연 어느 곳에 그들과 함께 가셨을까? 늘 그러하듯이 감람산 언덕 어느 한 구석 늘 기도하시던 곳이었다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계신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그 두 사람은 한 나절을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돌아온 후의 증언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확신이 넘치는 언어였다.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해답의 결론을 요한복음 1:18에서 찾아보게 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에서 “나타내셨느니라”(NIV, has made him known; KJV, declared him)라는 단어는 본래 “나타내셨다” 또는 “알게 하여 주셨다”는 원어(Gk. exegesato)의 “설명하다”(to explain), “계시하다”(to reveal), 또는 “해설하다”(to expound)라는 뜻으로 “주석"(exegesis)이나 “주해”(exposition)를 하게 된다. 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며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 그 목적도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게 하려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안드레와 요한과의 만남이라는 그 과정 속에서 당신을 알게 하시고, 계시하시고, 설명하여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 알고 증언하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볼 수 있게 하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이미 우리 가운데 베풀어 놓으셨다. 우리는 힘써 예수님 알기를 소원하자. 예수님의 계시는 반드시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였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막4:12)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님을 바로 보고 바로 아는 은총을 받은 것이었다.
* 빌립과 나다나엘의 증언(1:43-51)
1. 빌립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경위는 한 구절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1:43).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따라 따르기로 결심하였고 곧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전도하게 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1:45). 빌립은 예수님이 말씀의 예언대로 오신 나사렛 사람인 것을 강조하면서 증언하였다. 빌립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말씀(구약)대로 계시된 메시아”임을 알고(지식) 체험담을 전하게 되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될 것이라는 미가 5:2의 말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는 기록을 알고 있었으므로 빌립에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빌립은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46)고 말하면서 예수님께로 직접 인도하였다. 빌립의 체험과 확신은 놀라운 전도의 행위로 표출되었다. 빌립은 자기의 주관적인 신앙체험과 성경지식을 일체 내어 밀지 않고 본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고 하셨고,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고 계속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통찰력을 “나타내어”(reveal) 보여 주셨다. 신적 계시를 찾고 기다리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을 듣고 본 후에 영접할 그 분으로 알고 받아드렸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라는 고백을 서슴치 않고 하였다.
3. 본래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는다”(미4:4)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평화를 누린다”는 뜻이다. 유대인 중에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뜻과 마음을 가지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하곤 하였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부르셨던 것이었다.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2)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가나에서 결혼식 잔치에 초대되셨다. 사람들의 삶 속에 동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소외적이며 금욕적인 종교인들의 삶의 태도와는 달랐다. 유대인들은 결혼 잔치를 일주일 동안 계속 가지는 것이 통예였다. 그런데 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걱정과 근심이 생겼고 기쁨과 환희가 소멸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고 성경에도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시104:15)고 하였다.
2. 마침 그 자리에 동석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보고하면서 예수님이 모종의 도움과 기적을 베풀어줄 것을 기대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머님의 요구와 기대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관계없다는 것을 직감하시고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고 강조하신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사와 이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에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3.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곳에 놓인 돌 항아리 6개에 물(30갤런 x 6개)을 채우게 하셨다. 180갤런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다. 그 물이 포도주가 되어 연회석에 공급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3:1 또는 10:1의 비율로 물과 섞인 포도주를 축복의 음료수로 취급하였다. 연회장은 최상급 포도주의 맛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의 일상적인 능력으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4. 이제 표적이 베풀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보자.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이다. 기적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난다.
둘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고 하였다.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과 일치한다.
셋째, 예수님의 한없는 보혈의 능력을 예시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에 참여하는 성찬예식의 주체이며 포도주는 예수님의 대속의 보혈을 상징한다. 어린 양의 보혈로 인하여 성도는 구원을 받았고 또 그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는 보혈로 맺어진 한 몸이다.
*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라고 하신 말씀 중에서 “때”(hour)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죽음을 핵심적인 주축”으로 삼고 요한복음의 내용과 구조를 전개하여 나가는 중요한 방법론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1:29, 36)이라고 증언한 세례요한의 언급도 “예수님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님은 죽음과 직결된 사역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때”와 “죽음”을 하나로 연결된 사고구조로 보면 죽음 이전에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이 되며 임박한 죽음 앞에서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내용은 서론(1:1-18)과 결론(21장)을 제외하면 간결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이미 서론에서 언급하였다. 첫째 부분은 2-12장이며 둘째 부분은 13-20장인데 첫째 부분은 “때가 이르지 아니한 내용”이며 둘째 부분은 “때가 이른 내용”으로 보게 된다. 첫째 부분(2-12장)에서 예수님은 때가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표적과 설교를 통하여 계시하여 주신다. 그리고 둘째 부분(13-20)에서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으므로 “죽음 또는 영광의 때”를 맞이하신다.
1.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2:4; 7:6, 30; 8:20)
2: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7: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 “때가 왔다(이르렀다)”(12:23;13:1; 17:1)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3: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7: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기적(2:13-25)
1. 예수님은 말라기 3:1의 예언대로 “홀연히 그 성전에 임하심”으로써 시선을 집중시켰다.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난 때는 어린 양의 피로 새 생명 얻음을 주님 앞에서 확인하는 유월절 절기였다. 감사와 찬양과 예배가 그 절기의 중심을 이루어야만 하였다. 주후 70년의 기록을 보면 3백만 명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26만 마리의 어린양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2. 지중해 연안 각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희생양을 현지에서 구입하고 성전세를 내기 위하여 환전을 하였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성전을 교역의 장소로 내어주면서 타락과 부패의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3.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2:16)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성전복구 작업을 수행하신 것이다. 열심히 성전청결을 감행하는 예수님의 모습엔 누구도 항거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69:9)는 말씀을 상기하였다. “열심” (zeal)이란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질투심”과 똑같은 마음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보장하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19)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성전 파괴)에서 성전복구의 기적이 시작되며 부활과 더불어 새 성전인 교회(=성전 된 그리스도의 몸)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아졌다.
4. 예수님을 머리로 삼아 지체된 성도는 주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우리들의 몸이 정결하게 되며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몸을 이해타산의 도구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모신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켜야 한다.
* 요한복음 2장 22절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경위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 성전청결에서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2) 성전청결에서 제자들은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느꼈다.
(3) 성전청결에서 제자들은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