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복음 연구 (서론: 요한복음 1:1-18)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과 이유는 요20:30-31에 명시(明示)되어 있다.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 사복음서들 중에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 또는 “이적”(miracle)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어떠한”(what) 기적을 “어떻게”(how) 행하여 구원을 이루셨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공관복음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The Gospel of the King),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The Gospel of the Servant),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The Gospel of Man) 이라는 별칭이 부여되고 있다.
2.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일곱 가지를 선별하여 “표적” (sig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표적을 축으로 삼고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은 누구신가”(who)를 보여주며 예수님의 존재(being)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The Gospel of The Son God)으로 부르게 된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계시자 예수님”(Jesus, the Revealer of God)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여주고 있다. 이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친히 찾아오셔서 일대일의 관계를 맺어주시고 주님으로 섬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특성으로 인하여 요한복음을 읽은 독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고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는 사례가 발생한다.
3. 위에 나열한 요한복음의 목적(20:30-31)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삼단계의 용어가 나온다. 즉 “표적”(sign), “믿다”(believe), 그리고 “생명”(life)이다. 예수님이 행하여주시는 “표적”으로 인한 체험은 원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게” 하여주는 활동이 일어나고 결국은 죽음의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4. “표적”(sign)은 “기호, 신호, 표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행하여주신 “기적”을 대하게 되면 기적 자체를 보고 놀라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고 놀라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표적, 신호”(sign)가 된다는 논리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생생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모든 삶의 여정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표적(sign)이 된다. 표적이 지시하고 있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게 되어야 요한복음을 바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
5. 표적이 지적하는 예수님을 보고 만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believe) 움직임이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98회에 걸쳐 “믿다”(believe) 라는 동사(verb)와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결코 “믿음” (faith)이라는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은 결코 추상적인 사고나 사물이 아니며 살아서 생명을 주시는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다”(believe)라는 동사는 “신뢰하다”(trust) 또는 “의뢰하다”(rely on) 라는 관계를 형성하여 주는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내용이 발전하여 “믿는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결과를 가져오고 예수님을 인생행로의 동반자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구절에서 확인하고 있다. 표적(sign)을 믿는(believe) 결과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생명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It is the highest experience of which humanity is capable.)이라고 메릴 테니(Merrill C. Tenny)는 피력하였다. 생명을 누리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은 친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6. 그러면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들”(signs)은 무엇을 지적하고 표시하는 신호(signal)인가를 살펴보자. 이러한 표적들로 인하여 초월적인 일을 행하여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초월자이신 예수님을 보고 믿고 영접케 하여준다.
가. (요2장)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질적(質的) 차원을 초월하심.
나. (요6장)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심: 양적(量的) 차원을 초월하심.
다. (요4장) 왕의 신하의 병을 고치심: 원격치료로 공간(空間)을 초월하심.
라. (요5장)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시간(時間)을 초월하심.
마. (요6장) 물 위로 걸어오심: 자연질서(自然秩序)를 초월하심.
바. (요9장)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 운명(運命)을 초월하심.
사. (요11장)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심: 사망(死亡)을 초월하심.
* 요한복음의 내용과 구조는 “표적”과 “믿다”와 “생명”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예수님을 핵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어느 부분에서든지 “예수님 중심의 해석”(Jesus Centered Interpretation)을 하고 있다. 어느 단어, 문장, 구, 절, 단락 등을 대하더라도 예수님의 인격체와 직결하여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요한복음을 바르게 공부하게 된다.
1. 요한복음을 전체적인 윤곽으로 보면 예수님을 다음의 세 가지 요점으로 해설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독특하고도 온전하신 인간성과 신성이 표현되고 있음.
둘째,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이 구약의 약속과 예언 된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
셋째,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이 구약의 옛 언약에서 신약의 새 언약으로 성취되고 있음.
2. 요한복음은 서론(1:1-18)과 결론(21장)을 앞뒤에 놓고 간결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1:1-18): 예수님의 선재하심(pre-existence)을 사람의 몸(육신)을 입으신 말씀이 되었다(Word-become-flesh)고 선포하고 있음.
첫째 부분 (1:19-12:50): 이 부분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자신을 영접하지도 않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행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일곱 가지 표적에서 나타내신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일곱 가지 “나는 . . . 이다”(I am.)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 세례요한, 사마리아 여인, 모세,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자신의 증언과 사역, 성령님과 제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어떠하신 메시아로 설명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세 가지 사항에서 전개하고 있다.
가. 예수님은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시는”(descent-ascent) 메시아이시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에서 제시하는 기독론(Christology)의 핵심과 신성을 표현한다.
나. 예수님은 “보내심은 받은 아들”(the sent Son)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독특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는 메시아이시다.
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end-time)에 종말론적으로 나타나시는 “어린양-선생님” (shepherd-teacher)이신 메시아이시다. 구약 에스겔 34장은 여호와께서는 친히 오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다윗(과 자손)을 보내어 “어린양-선생님”의 사명을 완성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 (20:31)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1:41)고 증언하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고 외쳤다. 또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7)라는 고백을 하였다.
둘째 부분 (13:1-20:31): 이 부분은 새롭게 형성될 메시아 공동체(new messianic community)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요13-17장은 유명한 고별설교이며 특히 요14-16장은 보혜사 성령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행하실 사역을 설명하셨고 요1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신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아울러 부활의 영광을 향하여 가신다. 부활의 몸을 입고 나오신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 자”(the Sent One)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이제는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결론 (21:1-25): 새로 형성된 새 언약 공동체는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 요한복음의 말씀(the Word)과 잠언의 지혜(Wisdom)
요한복음 제1장 서론의 1-5절은 다음과 같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 예수님(그 분)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는 하나의 시적 표현(a poem) 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도 않고 “그가”(He, 또는 Him)라는 인격체를 지칭하면서, “그가 말씀이심,”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심,” “그가 곧 하나님이심,” “그가 태초에 계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됨,” “그 안에 생명이 있음,”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임,” ... 이런 스타일로 계속하여 9절로 넘어가서 “그는 참 빛임,” “그는 세상에 왔음,” “그는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임,” “그는 세상에 계셨음,” “그는 자기 땅에 왔음,” “그는 자기를 영접 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 “그는 육신이 되심,”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임,” “그는 은혜가 충만함,” “그는 진리가 충만함,”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음,” “그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심,” “그는 하나님을 보고 나타내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심”(17)이라고 하면서 “말씀”(Logos)으로 시작된 시의 구절들이 계속되다가 17절에 와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
2. 잠언8장에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지혜”는 어떤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엄연히 하나의 “인격체”로 나온다. 잠언8장 전장을 읽어보라. 놀라운 기록이라는 사실이 곧 마음에 닥아 온다. 몇 구절들(1-4, 11-13, 22-32)을 인용해본다.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 그(She)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3.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 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He, 하나님)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 요한복음 서두의 시상과 어떻게 그렇게 흡사할 수 있을가? 그는 (He=Jesus Christ)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할 수 있었겠는데 하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지혜” (sophia)는 “그 녀”(She)라는 여성명사이므로 남성이신 예수님에게 적용하기 곤란하고 “지혜”와 필적하는 남성 명사 “말씀”(logos)을 사용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제1장 서론의 1-5절에서 “말씀” 자리에 “지혜”를 도입하면 다음과 같다.
1. 태초에 지혜가 계시니라(In the beginning was the Sophia, and the Sophia was with God, and the Sophia was God). 이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지혜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2. 지혜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지혜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지혜 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지혜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4. 그런데 요한복음 서두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에서 지혜를 도입하여 “지혜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기록은 없지마는 이러한 히브리 사상 구조를 바울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24)고 고린도 전서에서 선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오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5. 이제 고린도전서 1:18-24; 2:1-8에서 지혜에 관한 언급을 살펴본다.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 예수님께서 지혜로 성장하고 지혜의 질의응답을 하셨다는 누가복음의 기록은 “말씀”(Logos)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셨음을 가리키는 중요한 사항이다.
눅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 1절에서, “태초에”(In the beginning): 헬라어를 사용하는 당시의 독자들이 요한복음 서두에서 “태초에”라는 말을 대하였을 때 즉시 그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 당시의 문화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내용들이었다.
1. “태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주생성과 만물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제일원인”(the first cause)에 대한 사고였다. 그러나 저자 요한에게 있어서는 요한복음 기록의 목적(요20:31)을 염두에 두고 일관된 작업을 하는데 몰두하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 요한은 히브리의 신앙체계를 헬라어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창세기 1:1을 염두에 두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이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는 선포를 하는 것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태초로부터 계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니 그 예수님을 “믿으라”는 선포다. 예수님이 태초로부터 계셔왔다는 것은 예수님은 곧 만물의 생성근원이 되신다는 뜻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 1절에서, 말씀(the Word, Gk. Logos)의 이해:
1.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태초에”라는 말 다음에 또 다시 “logos”라는 말을 대하면 즉시 철학용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즉 헬라의 철학적 개념으로 “로고스”(logos)라는 것은 사람의 “사고,” “생각,” “이성,” “뜻”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인(유대인)에게는 “로고스”라는 말이 헬라인의 개념과는 달리 “생각” 다음에 그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 “성취,” “이루어짐” 등으로 이해하였다. 예를 들어 본다. 하나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느니라”(사55:11), 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24:14) 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인에게 하나님의 말씀(logos)은 초월적인 힘으로 받아드려졌다. “빛이 있으라”(창1:3)고 선포할 때에 즉시 빛이 나타났고 “사람을 만들자”(창1:26-27)고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지어지는 행동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2.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러한 “로고스”의 이해를 더 뛰어 넘는 사실을 전개하며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생각(헬) -> 행동(히) 이라는 공식과 구조에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실체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하는 실체가 바로 “로고스”(말씀)이라고 하는 신비로운 논리(=성령님의 계시)를 전개하고 있다. “생각 -> 행동”을 가능케 하는 어떤 “청사진”을 만들어내면 그 후로부터는 그 청사진을 만든 자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그 청사진의 방법, 공식, 원리를 따라 얼마든지 그러한 결과를 반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생각 -> 행동”이 반드시 성립되지 않는 것은 “생각 -> 행동”이 있게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생각 -> 행동 -> 실체”를 포함한 “로고스”(말씀)을 독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3. 헬라의 “로고스” 사상을 적용할 때 “사람은 생각한대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가진 능력의 제한성 때문이다. 히브리(유대)의 “로고스” 사상을 적용할 때 “하나님은 생각하신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믿고 받아드린다. 그런데 히브리인의 문제점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생각하신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사도 요한의 증언을 배척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도요한의 “말씀”(Logos)은 예수님의 신성과 영원성과 창조주 되심을 선포하고 있으며 “로고스”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빛”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4. 이제 “로고스”는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로고스”(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생각”하고 “뜻”하신대로 죽은 나사로를 “깨우겠다(살리겠다)”고 하신즉 “로고스”가 “말씀”하신대로 나사로는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행동의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로고스 사역은 예수님만이 행하시며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기적(이적)이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만 가지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에 충분하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4).
5.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말씀(the Word, Gk. Logos)은 존재하셨다.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요한은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이 두 절에서 언급된 네 번의 “말씀”이라는 선포는 선재(先在)하신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므로 말씀(예수님)이 영원히 계신다”는 뜻이다. 요한은 말씀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며 창조주라는 사실을 3절에서도 언급하고 있거니와 그의 서신에서도 다른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일서 1:1-3을 본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6. 태초로부터 말씀으로 창조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믿음으로 듣고 받고 영접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고백하게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과 말씀의 사역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식들은 이렇게 양분되는 것이다.
* 1, 2절에서, 함께(with, Gk. pros):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그(예수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2)에서 “함께”라는 전치사는 일반적인 이해에 따라서 “접근하여,” “나란히,” “같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된다. 성경의 원어는 원어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뜻이 따로 있다. 여기서는 “뗄 수 없는 상호관계”(interrelationships)를 나타내며 “동반하다”(in company with)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God)이라는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삼위일체의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을 염두에 두고 하여야 한다.
* 1, 2절에서, 계시니라(was, 헬, en)의 이해:
1. “계시니라”(was)라는 헬라어 “en"은 과거형 동사가 아니고 헬라어의 동사 용법에서 ”to be"라는 미완료형(완료되지 않고 또 계속되고 있는 움직임과 형태를 나타내는 어법) 동사이다. 따라서 “계속적인 동작”과 “언제나 있는 존재”(continuous existence), 즉 “영원한 존재”를 의미하는 특수한 동사이다. 이 동사는 영원성과 현존성을 아울러 드러낸다. 따라서 1절이 이해되도록 번역한다면 “태초로부터 말씀이 영원이 계시고 있다”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글은 매우 어색하여 “계시니라,” “계셨다”로 표현하였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러하신 하나님이시다. 요한은 이 사실을 독자인 우리들에게 전하여주고 있다.
2.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던 살렘 왕 멜기세덱(창14:18)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존재한다(히7:2-3)는 설명은 바로 예수님의 신성(하나님 되심)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한 왕이며 해석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증언한다(히5:11). 예수님의 신성도 믿음 없이는 납득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을 수락하지 못하면 성도의 신앙은 파괴되고 만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1:15)고 하였고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고 말씀하여 주셨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있느니라”(I am)는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지만 아울러 영원한 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현재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 4절에서, 생명(Life, Gk. zoe)의 이해:
1. 요한복음에서 이 “생명”은 매우 중요한 용어로서 37회 사용하고 있고 그 중에서 17회는 “영원한”(eternal)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사용하면서 “영생”(eternal life)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생명”은 “영생”과 상호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17장) 중에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eternal life)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eternal life)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the life)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실 때 “생명”은 “영생”과 같은 뜻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속한 것이며 창조주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명은 창조주에게 속하였으므로 피조물의 생명은 창조주에게서 받았음을 깨닫게 된다.
2.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사도 요한이 증언하였고 예수님 자신도 “내가 곧 생명이라”(요14: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 “우리들의 형상을 따라 우리들의 모양대로 우리들이 사람을 만들자”(창1:26)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들”이라는 복수형 단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생명 창조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을 때에 흙이 생명체로 탄생되었다(창2:7). 하나님의 생기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숨결”(breath=호흡)이며 “더운 기운”이다. 하나님의 더운 숨결을 받고 사람은 숨을 쉬며 사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숨결”과 “영”(spirit)은 동의어로서 “neshama 숨결 = nepesh, ruach 영”으로 사용된다. 또 숨결의 움직임은 언어를 발생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일상생활과 언어생활의 기초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더운 기운으로 사람을 소생시키신다. 따라서 욥기의 저자는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만드셨고 전능하신 분의 숨결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욥33:4)고 말하였다.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말씀하셨다.
3.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므로 예수님 자신(=실체)의 “생각”과 입의 “말씀의 숨결”(언어행동)으로 야이로의 죽은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살려 내셨다. 예수님 자신도 죽었으나 죽을 수 없는 생명체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너는 믿느냐?”(요11:25)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의 생명은 아버지와 예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살며 기동하고 있다.
* 4절에서, 빛(the light)의 이해:
1.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또 “참 빛(the true light)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빛”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르다, 구별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다(창1:3). 이 빛은 태양 빛(피조물)과 다른 “창조주의 빛”이다. 거룩한 창조주의 빛은 만물보다 먼저 있고 만물이 없어져도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리 캄캄한 곳일지라도 그 곳에 창조주의 거룩하신 빛은 존재한다.
2. 하나님의 빛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고 하나님의 비취시는 빛으로 모든 생물이 생명을 유지한다(계22:5).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새 생명이 탄생하고 빛의 자녀가 된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청년 사울은 “해보다도 더 밝은 빛”(행9:3)을 받고 엎드려졌으나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새 생명을 가진 새 사람이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을 선전하는 빛이 되었다(행13:47).
3. 하나님의 빛은 열매를 맺게 한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엡5:8-9). 하나님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목격한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과 지극히 큰 영광을 친히 보았다(벧후1:16-17).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아름다운 덕을 전하여야 한다”(벧전2:9)고 하였다. 사도요한도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하면서 변화산에서의 체험담을 기록하였다.
4. 하나님의 빛은 영원히 비췬다. 우리들은 그 빛 안에서 보기도 하고 활동도 한다. 시편 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빛) 중에 우리가 광명(빛)을 보리라”(시36:9)고 하였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살던 우리들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후에 거룩한 백성, 영생의 자녀, 영광의 성도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은 한마디로 표현하여 주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우리들은 “로고스”(말씀)의 빛 안에서 사는 빛의 자녀들이다.
* 14절에서, 독생자(NIV, the One and Only; KJV, the only begotten)의 이해:
1. 사도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아버지의 독생자”(14),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8)이라고 불렀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독생자”(3:16), “하나님의 독생자”(3:18)라고 부르셨다. “독생자”라는 성경원어(Gk. monogene)는 “오직, 하나”를 의미한다. “오직 하나뿐인 아들”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독특한 과계”를 가지고 계신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1:15), 즉 “먼저 계신 자”로써 어떤 세대의 사람이라도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이 되셨다. 이와 같이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차원에서 생각하여야 바르게 이해된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나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도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아들과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예수님의 기도를 경청하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10:22).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큰 구원을 이루어 주셨음을 감격하고 감사하여야 한다.
*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the Word became flesh, 成肉身)의 이해:
1.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가르침이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이 되셨다는 놀라운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므로 인하여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된 것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육신”이라는 말(Gk. sarx: Heb. basar 또는 se'er)은 “몸”만을 의미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합한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실 때에 하나님이 사람으로 바뀐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제한하거나 축소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다. 또 몸은 사람이고 영은 하나님이신 반신반인의 기형인이 되신 것도 아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빌립보 2:7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고 기록한 것은 신성의 영광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모습(고후8:9)을 보여주고 있다.
2.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의 아들로써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뜻이 아들로 하여금 재림의 때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아셨을 때에 서슴치 않고 “그 날과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하시며 순종의 예를 보여 주셨다. 또 예수님은 죄와 결함이 전혀 없으셨으나 온갖 시험과 시련을 당하실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시험 받는 우리들을 능히 도와주시고 계신다”(히2:18; 4:17; 5:2,7).
* 18절, 나타내셨느니라(NIV, has made him known; KJV, declared him)의 이해:
1.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에서 “나타내셨다”는 단어를 “알게 하여 주셨다”(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 현대어 성경)고도 번역하고 있다.
2. 본래 “나타내셨다” 또는 “알게 하여 주셨다”는 원어(Gk. exegesato)는 “설명하다”(to explain), “계시하다”(to reveal), “해설하다”(to expound)라는 뜻으로 성경의 “주석” (exegesis)이나 “주해”(exposition)에 해당되는 말이다.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며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 그 목적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알게 되고, 계시되고, 설명되고, 해설되는” 것이다.
3. 요한복음 14:6-10의 구절에서 아버지를 계시하고 설명하는 예수님을 자세히 알 수 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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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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