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8일 화요일

14.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요구 (요13장)

 14.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요구 (13)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요한복음 전체에 반영되고 있다. 기록한 목적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따라서 요한복음은 첫째, 대중을 위한 사역(표적signs를 중심으로; 1-12)과 둘째, 제자를 위한 사역(수난과 영광을 중심으로; 13-21)으로 크게 둘로 나눈다.
 
1. 대중을 위한 사역(1-12)12제자들을 포함하여 각 개인과 대중을 대상으로 일곱 가지 표적들”(signs)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하였고 표적 하나하나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셨으므로 믿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나타내고 있다. 표적은 표적 자체의 중요성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표적을 수행하는 주체에 더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7가지 표적들(signs)을 하나씩 대할 때마다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묻게 되고 그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결론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2. 제자를 위한 사역(13-21)12제자들을 위한 사역이 아니며 12제자들이 행할 본분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스승과 제자는 목적을 달성하는 공동사역의 원칙에서 하나를 이룬다는 대명제 아래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6-17)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고 일러주셨다. 그러면 제자를 위하신 예수님의 사역(13-21)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핵심사항을 따라서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사역을 행하여야 한다.
 
. 13-21장의 후반부는 수난과 영광의 책이라고 이미 언급하였다. “수난과 영광의 참 뜻이 제자들에게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은 따로 떼어내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반드시 요1-12장의 표적중심의 사역과 맥을 맞추어야 한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표적을 행사신 예수님이실지라도 수난과 죽음으로 영광을 나타내신 생애를 사셨다는 것이다. 이 핵심은 제자들도 반드시 하나님에게 소속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드려야 한다는 엄숙한 요구를 하고 있다.
 
. 요한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13-17)와 예수님이 받으신 수난과 부활의 생생한 증거(18-21)를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수순과 진행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hour” 죽음과 부활의 때)라는 용어를 가지고 전개한 것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자기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그 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하여준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전반부(1-11)에서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2:4; 7:30; 8:20)을 누차 언급하셨다가 12:23에서 계시의 중요한 때(‘영광의 때’)가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이와 같이 ”(hour)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본문을 참고하여 본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7: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13: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17: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수난의 때라는 것은 죽음과 부활로 직결되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죽음 -> 부활 -> 생명이라는 도식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12 제자들, 마리아와 마르다, 유대인들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현세인도 믿지 못하고 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죽음 -> 부활 -> 생명의 도식으로 나타내 보여주셨다. 또 중요한 사실은 죽음에서 부활과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하나님의 영광(glory)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11:4).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심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보여주셨다. 무덤 앞에서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고 이미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썩은)가 납니다”(11:39)라고 말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니 아니하였느냐”(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고 말씀하셨다.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계시(revelation; 위로부터 내려주시는)와 은혜(grace;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되고 받아진다. 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러한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때를 몇 시간 남겨두고 예루살렘 성내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과 설교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감람산상의 설교(24-25)가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다락방의 설교(13-17)는 예수님의 작별인사라고 하겠다.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예수님은 생애 중에서 감추어져 있던 믿음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성도는 믿음의 비밀”(딤전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을 간직하고 있어야 아름다운 생애를 살 수 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제자들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고 또 기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달을 수 있기 위하여서는(2:2-3,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만 한다. 요한복음 13-17장의 내용은 바로 그 비밀을 알려주는 계시이다. 성경전체를 성소라고 한다면 이 부분은 성소내의 지성소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성소에서 하나님(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 예수님이 지니신 믿음의 비밀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목표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며 끝없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1. 요한복음 13-17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 기록하지 않은 독특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구체적인 말씀과 행위,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이후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성령님의 사역, 또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써의 중보기도 등은 매우 귀중한 기록이다.
 
2. 요한복음 1-12장에서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나타나지 않았으나 전 세계로 향한 사역을 위하여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시게 되므로 그들은 매우 중요한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협력자” (helper)였으나 앞으로는 예수님의 동역자”(partner)가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칭할 때에 애정이 담긴 용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여 주셨다. 이들 용어는 일반적인 관계를 초월하며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 “자기 사람들”(his own.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작은 자들”(little children.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친구들”(friends.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내게 주신 사람들”(the men You gave Me.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내가 가진 사람들”(those who are mine. 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 “내 형제들”(my brothers.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 “아이들”(children. 21:4-5.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3. 요한복음 13-16장의 말씀은 약속의 언어”(covenant language)라고 부를 수 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행한 고별설교(farewell discourse. 33-34)에서 부탁한 5개의 중요한 행위 동사(“사랑하라, love” “순종하라, obey” “살아라, live” “알아라, know” “보아라, see”를 연상케 한다. 예수님은 요14:15-24에서 이 5가지 사항을 강조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the new Moses)로 여기고 새로운 명령”(the new commandment)을 제자들에게 분부하는 형식으로 이 부분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13:34-355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4. 또 예수님은 새로운 여호수아”(the new Joshua)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미리 하늘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제자들이 지상의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들을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여 주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임제 가운데서 창세전의 영광을 다시 나타내시는 사역을 행하신다(4:8, 14; 6:20; 12:2; 14:2-3; 17:5).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7: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위에서 언급한 요한복음 후반부의 전체적인 윤곽의 이해를 중심으로 각 장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발 씻음의 교훈”(13:1-20)배신의 의미” (13:21-30)새 계명”(the new commandment)베드로의 배반”(Peter’s denials)이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 13:1.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Gk. telos)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인지, 세상 마지막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원어에서 가르치는 참 뜻은 가득한 지역또는 채워진 영역”(full extent)을 의미한다. “이나 마지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의 충만을 가리키고 있다. 요한복음 19:30에서 사용한 “telos”라는 헬라어와 같은 뜻을 지닌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Gk. tetelestai; It is finished. 19:3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은 예수님 자신이 다 이루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죄의 결과)라고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절규하셨을 때에 아버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다 이루었다는 선포를 하여주셨다. 예수님은 내가 모든 일을 끝내었다”(I am finished)라고 하지 않으시고 모든 일이 이루어져 있다”(It is finished)라고 선포하셨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이루어져 있는 영원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끝까지라는 말은 영원토록 채워져 있는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 13: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여기에서 사랑하다라는 말은 요한복음 3:16의 대명제 가운데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사랑하다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이라는 말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시기까지라는 뜻을 문장 자체 내에서 해설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독생자 예수님은 이처럼을 확장하여 끝까지사랑하는 모습을 나타내셨다. 영원한 사랑이 충만하여 이렇게까지 발도 씻어주시고 목욕도 시켜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 예수님의 사랑의 완성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고난과 죽음이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영광과 생명이다. 고난과 죽음이 없이는 사랑을 완성할 수 없고 또 고난과 죽음은 영광과 생명을 누리게 하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여 주신 예수님, 14장에서 우리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고 하신 예수님, 15장에서 우리들 안에 계시겠다고 포도나무의 비유를 주신 예수님, 16장에서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은 바로 제자들의 믿음의 비밀이시다. 제자들은 이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의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을 배운 것이다.
 
*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셨다”(13:4-6). “일어남 -> 벗으심 -> 두르심 -> 씻으심은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동기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대한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에 먼저 일어나셨다. 예수님은 높은 하늘 영광의 보좌에서라도 일어나시고 낮고 천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다. 또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셨다. 사람이 입은 겉옷은 그의 신분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볼 수도 없는 희고 빛나는 하나님의 옷을 벗어 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사람과 똑같이 되어주셨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수건은 봉사의 도구다. 예수님은 수건을 두르심으로써 죽기까지 복종하여야만 하는 종이 되셨고 섬기는 자가 되셨다. 그리고 나서 대야에 물을 담고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깨끗하게 씻고 닦아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구속의 은총을 베풀어주셨고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으셨다. 지금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1:3). 예수님의 이러한 겸손의 근거는 예수님이 가지신 올바른 지식에 기인한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5:19, 30). “나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8:5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사명을 따라서 살고 죽어야 한다는 지식은 예수님에게 겸손의 생애를 일관할 수 있게 하여주었다. 예수님은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고 분부하셨다.
 
* 예수님을 대적한 베드로: 겸손하신 자세로 자기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작업을 베드로는 막고 나섰다. 주님이 무슨 잘못이나 실수를 범한 것처럼 여기면서. 겸손을 막는 것은 교만이다. 겸손의 근원은 지식이며 교만의 근원은 무지이다. 겸손한 하나님을 대적하면 교만한 인간이 된다. 성도들이 겸손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상한 일을 처음으로 당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류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당시의 습관으로는 유대인의 종들은 자기 상전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 없었다. 하물며 주인이 종들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경험과 지식에 어긋나는 발 씻음의 일을 하셨다. 베드로는 참을 수 없었다. “주님, 주님이 나의 발을 씻어주시다니요?” “너는 나의 하는 일을 지금은 알 수 없으나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의 발을 절대로(결코) 씻기지 못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만일 베드로가 선생이었다면 그는 제자의 발을 절대로 씻어줄 수도 없고 씻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의 주장대로만 진행되었더라면 구원의 복음이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은 어떻게 하던지 더러운 우리 사람들과 상관을 맺기 위하여 겸손한 생애를 사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나설 때마다 그의 무지와 교만을 교정하여 주셨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고사실 때 반대하였고(16:21-23), 변화산에서도 예수님의 일을 자기가 나서서 조종하려고 하였고(17:1-8), 살과 피에 관한 교훈을 하신 후에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자기들 가운데 있는 가롯 유다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서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면서 호언장담하였던 것이 베드로였다(6:66-71). 그럴 때마다 베드로의 무지와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정되었고 하나님의 진리는 더욱 분명하게 들어났었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르는 겸손한 신앙인과 더불어 발전한다는 것과, 변화산상의 신앙적 체험을 마음속에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야 고난의 생애를 감수할 수 있다는 것과,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살과 피(생명의 말씀)를 먹고 마셔야 하는 신령한 생활의 필요성과, 구원과 속죄는 목욕함과 발 씻음과 같이 영원히 양립되어야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등등의 교훈이 무지와 교만을 시정하여 주실 때에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에게 들려지게 되었다. 베드로는 무지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기 위하여 노력했던 모습을 그의 서신에서 볼 수 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 목욕함과 발 씻음의 교훈: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은 실물교육 또는 시청각교육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밖에서 활동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먼지투성이와 동물분뇨의 고약한 냄새로 얼룩 진 발부터 씻는 것이 상례였다. 손님을 모실 때에도 발 씻을 물부터 내어 놓았다. 각자가 자기 손으로 자기 발을 씻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씻어주고 씻김을 받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습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발 씻음의 일을 하셨다.
 
1.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두 사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13:9) 하며 요청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 몸은 깨끗하다”(13:10)고 말씀하셨다. “목욕 한다는 것은 중생과 구원의 도리를 가리킨다. 죄인이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영접할 때 그는 목욕을 하고 온 몸의 씻김을 받는다. “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여 주느니라”(고전6:11; 3:3-7). 그때에 믿는 자의 죄는 씻어지고 용서함을 받음으로 모든 과거의 죄와 허물이 다시는 기억되지 않는 은총을 입게 된다(10:17). 그러나 아무리 구원을 받았더라도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성도는 세상의 먼지와 때로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더러움을 씻어내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더러움까지도 씻어내고 성도들과 교제를 유지하는 길을 마련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1:9)라고 약속하셨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를 보면 레위 족속에 속한 사람이 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성별될 때에 그 해당자는 반드시 목욕을 하여야 하였다(19:4). 그런데 그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가려면 먼저 성전 뜰에 있는 물두멍에서 그의 손과 발을 씻어야 하였다(30:18-21). 성별을 위한 목욕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으나 직무를 위한 씻음은 늘 반복되어야 하였다.
 
2.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중생의 씻음을 받고 성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입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날마다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들은 기도할 때마다 고백과 용서와 간구를 드리며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됨”(5:26)을 늘 받아야 한다. 가롯 유다를 생각해 보자. 그에게는 중생과 성결의 도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3:10)고 하시면서 가롯 유다와는 상관이 없음을 암시하여 주셨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고 않았기 때문에 비록 발 씻김을 받았으나 중생과 성결함을 받지 못한 불신자였던 것이다(6:64-71). 우리들은 거짓 없는 믿음으로 주님의 발 씻어주심을 감사함으로 받고 성결한 생활에 힘써야 한다.
 
*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질문하셨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행복한 생활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계신다.
 
첫째, 행복한 생활은 섬김과 봉사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섬기는 자가 되셨고 또 섬기는 생활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셨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작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6-27). 이러한 교훈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발을 씻김으로써 제자들에게는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산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행복한 성도가 될 수 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겸손한 생애를 빌립보서 2:5-11에서 총결산하여 기록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둘째, 행복한 생활은 속죄와 용서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 사이에는 불의의 교제가 없어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형제자매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행복한 성도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18:1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6:12)하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우리들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할 때에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상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참고. 발 씻음의 실물교육은 교회의 성례로 주시지 않고 성도의 생활규범으로 주셨다. 발 씻음은 제도나 형식으로 지킬 것이 아니며 우리들의 생활원칙으로 지켜야 한다.)
 
* 13:10-11(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 전혀 깨끗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음을 언급하셨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배신의 행위를 행하기 전에 미리 아심”(foreknosledge)을 피력하셨고 동시에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3:19)고 하시면서 다른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이 받으실 배반에 대하여 알려주셨다. 가롯 유다의 배반은 이미 구약의 말씀(시편 41)에 예언되어 있었다.
 
1. 요13:18(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     라)의 말씀에서 후반부의 인용은 시41: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의 말씀이다.
 
2. 시편 41편은 다윗의 시로써 자기 아들 압살롬과 신하 아히도벨의 배반과 반역을 당한 역사적인 사실(삼하16:15-23; 17:1-23)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반역을 일으킨다. 이때 다윗의 신하 두 사람(아히도벨과 후새)이 압살롬의 편에서 조언을 한다. 그런데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삼하16:23)고 할 정도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아히도벨은 자기가 일만 이천 명의 군사와 함께 출정하여 당일에 다윗을 쉽고 간단하게 죽일 좋은 방안을 제안하여 인정을 받게 된다.
 
. 그러나 압살롬은 후새라는 다윗의 신하의 조언을 듣게 된다. 후새는 압살롬이 다윗을 죽일 다른 묘안을 제안한다.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많은 군사를 모아서 다윗을 기습하여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하여 다윗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말고 전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후새의 제안대로 압살롬과 수많은 군사가 출정하게 된다.
 
.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삼하17:23)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13:18; 41:9)는 내용이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는 아히도벨과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가롯 유다를 평가하면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Judas left to go where he belongs. 1:25)라고 하였다. 유다는 예수님께 소속된 자가 아니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원하는 곳으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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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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