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 (요11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요한복음 11장의 중요한 요절과 용어들(생명, 죽음, 부활)
(1)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2)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3)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4)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이미 죽어서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시는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나사로를 살려주신 표적(sign)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7가지 표적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표적이며 표적(sign)의 정점(climax)을 이룬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요한복음에서는 “표적들”(signs)이라고 다르게 부르고 있다. “표적”은 “약속을 가지고 있는 신호”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호를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죽음(death)이 생명으로 부활되고 부활한 생명(life)이 영원한 삶(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은 매우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부활(resurrection)과 생명(life)”에 관하여서는 먼저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항이 있다. 이 용어들은 쉽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실상 그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부활과 영생”에 관하여서는 열두 제자들도 마리아와 마르다도 유대인들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현세인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를 나타내 보여주셨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과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glory)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11:4).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심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보여주셨다. 무덤 앞에서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고 이미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썩은)가 납니다”(11:39)라고 말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니 아니하였느냐”(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고 말씀하셨다.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계시(revelation; 위로부터 내려주시는)와 은혜(grace;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되고 받아진다.
*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life)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생명을 주는 자(giver)”라는 뜻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사역”(ministry of life)에 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하였다가 11장에 와서는 “죽음과 삶”이란 차원에서 어떻게 “생명”(life)이 나타나게 되는가를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11장 이전에서 나타난 생명을 열거한다.
제3장: 니고데모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the gift of eternal life).
제4장: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명의 물”(the water of life).
제5장: 38년 된 불구자에게는 “생명의 소생함”(the quickening of life).
제6장: 배고프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
제7장: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강같이 흐르는 생명의 물”(the rivers of living water).
제9장: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에게는 “생명의 빛”(the light of life).
제10장: 목자 예수님의 양들에게는 “풍성한 생명의 꼴”(the abundant life).
* “생명”(life)에 관한 용어 해설: 헬라어(Greek)에는 “생명”에 관한 용어가 두 개다. 하나는 “영적인 생명”(Gk. zoe)이며 다른 하나는 “육적인 생명”(Gk. bios)다. “생명”을 우리말 성경에서 읽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이 “zoe”인지 “bios”인지 혼동을 준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영의 말씀”이므로 “생명”이라는 용어는 거의 “영적인 생명”(zoe)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줄 안다. “그 안에 생명(zoe)이 있었으니 이 생명(zoe)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고 하였다. 예수님이 지니신 “생명”은 틀림없이 “육체의 생명”이다. 그러나 “영체의 생명”(zoe)을 공급 하신다는 특수성을 헬라어 원어를 사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할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는 사용된 용어 “생명”이 “zoe”인지 “bios”인지 Greek Text를 보고 확인해야 정확한 뜻을 말씀의 전후관계에서 새롭게 깨닫게 된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bios”는 11회만 사용되고 있고 그 외는 모두가 “zoe”로 표현되고 있다. “zoe”는 신약 전체에서 118회 사용되고 있다. 그 회수를 성구사전(concordance)에서 열람하면 다음과 같다. 마7회, 막4회, 눅6회, 요32회, 행8회, 롬14회, 바울서신22회, 히2회, 약2회, 벧전2회, 벧후1회, 요한서신13회, 유1회, 계15회. 저자를 중심으로 열람하면, 요한60회, 바울36회, 누가14회, 다른 저자8회다. 신약의 저자들이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일괄적으로 또 공통적으로 같은 개념을 가지고 사용하였다는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신 놀라운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일반문학에서는 “zoe”를 성경에서 “bios”와 구별해서 사용하듯 하지 않고 무분별적으로 혼동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 “bios”(생명)에 관하여: 신약에서 11회만 사용되므로 여기에 열거하여 참고하자. 이 모두가 영적 생명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 곧 판명되고 만다.
(1) 막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living)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2)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this life)”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3) 눅 8: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And a woman having an issue of blood twelve years, which had spent all her “living” upon physicians, neither could be healed of any,)(의사에게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소비함)
(4) 눅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And he divided unto them [his] “living.”)
(5)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which hath devoured thy “living” with harlots)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6) 눅21: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living)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7) 딤전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peaceable “life”)을 하려 함이라
(8) 딤후2: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life”)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9) 벧전4:3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생활)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For the time past of [our] “life” may suffice us)
(10) 1요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1) 1요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means of “life”)을 가지고(whoso hath this world's “good”)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부정적 차원의 내용들이다.
첫째, “bios"는 분명하게 임시적(temporal) 생명과 생활의 뜻을 보여주고 있다. (7)번과 (8)번을 보면 매일(하루하루)의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zoe”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둘째, “bios”는 외부적 형식을 표현하고 있다. (1)번과 (6)번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용 전체를 강조하였고, (4)번과 (5)번에서도 탕자의 생활재산이 탕진됨을 밝혔고, (11)번에서도 세상에서 사용하는 일시적인 생활비용이 형제사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고 하였다.
셋째, “bios”는 특별히 생활태도(manner of life)의 수단(mean)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10)번에서 “이생의 자랑”이란 교만하게 생명을 유지하다가 살아져버릴 존재를 그리는데 사용하였고 (2)번에서도 생활 내에 있는 염려, 재물, 향락 등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속에 포함되어 있도록 창조하여 주셨다. 그 생명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영생”(aionios zoe)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이러한 “생명”(zoe)의 사역을 계속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생명을 이해시키기 위하여서는 육체의 생명(Grk. bios)이 회복되는 것을 볼 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회복은 시한부적인 것이지만 영원한 영적인 실상을 설명하는 교재나 예화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Grk. zoen aionion)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Grk. zoen aionion, eternal life)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Grk. zoe)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Grk. zontos, living, 살아있는)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Grk. zoe)의 빛을 얻으리라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Grk. zoe)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4: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zoe)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죽음에 관한 해결책: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하여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나 죽음은 확실하게 존재하며 또 누구나 자기의 죽을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에 관한 사실은 일부러 숨기기도 하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대한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드리고 죽음에 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잠시 세상에서 육체의 삶(bios)을 살다가 계속하여 “zoe, 영적인 삷(생명)”을 사는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zoe”는 일시적이 아니고 영속적이며, 가변적이 아니고 불변적이며, 부정적이 아니며 긍정적이며,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며, 인간적이 아니며 신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제공하여 주신다. 성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zoe”를 믿음으로 받고 축복의 삶을 사는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성도는 차원이 다르고 수준이 높은 삶을 사는 하늘의 백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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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을 마지한 상항: 요한복음 10장의 끝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의 모든 일들을 마치고 유대 광야로 나가셨다.
요10: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1. 이렇게 유대 광야에 계실 때에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듣게 되셨다.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에 예수님께 오게 되었다. 이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이미 감지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사실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며 말씀대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4)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죽은 나사로의 집에 당장 갔다고 하더라도 죽은 지 이틀이 되는 것이다. 위급한 소식을 듣고서도 예수님은 그곳에 2일간 더 머물러 계셨고 나사로가 죽은 후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사랑하는 나사로를 왜 중병에서 신음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둘째, 위급한 소식을 들으시고도 왜 2일간이나 그곳에 머무르고 계셨을까?
셋째, 한 고관의 아들을 먼 곳에서 원격치료 하여주신 것처럼 하지 않으셨을까?
2.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온전케 하여주시는 사랑이다. 예수님과 우리들이 사랑을 나누는 관계는 질병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곧 해결하여 주시는 문제해결만을 위한 관계가 아니다. 사랑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모든 고난과 역경은 오기도하고 가기도하지만 사랑의 관계는 한 번 맺어지면 끊어질 수 없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신뢰와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실지라도 가난과 고난과 환난과 역경에서 성장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까지 하셨다.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질병과 고난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사랑 때문에 고난과 역경을 달갑게 받을 수도 있다.
3.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 가정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사로와 그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임하도록 하여주셨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지만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심으로써 큰 구원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는 성숙한 신앙인의 표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신앙인은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지도록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4.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의 시체는 이미 무덤에 넣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썩고(decomposition, 분해) 있었다. “나흘”(4일)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영혼이 죽은 육체에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초대한 3일까지는 기다리는 경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3일이 지나면 완전히 포기하며 그 실망감과 슬픔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흘 째” 오신 것도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역사적인 표적을 만민에게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셨던 것이다.
5. 예수님의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라며 베다니 여행을 만류하였으나 예수님은 죽는 한이 있더라고 나사로를 “깨우러” 가야만 하셨다. 이것을 잘 못 알고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고 말함으로써 나사로의 죽음과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두 죽음에 직면하는 상항에 빠지고 말았다. 이미 죽어있는 나사로로 인하여 살아계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에 들어가야 할까?
* 요한복음 제9장에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기적”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 제11장의 나사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의 대상으로 각각 다른 양상이라고 예수님은 설명하여 주셨다. “영광”이 나타날 배후에는 “고난”과 “십자가”가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영광”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나사로가 다시 생명을 받게 됨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다.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선포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난다. 죽은 나사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말씀하시신다. “나사로야, 나오너라!”(“Lazarus, come out!” 11:43). 생명이 없는 피조물 나사로는 생명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생명체로 다시 살아나서 움직인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2)라는 기도를 드리시면서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 생명창조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기 위하여 가셔야만 하는 유대지방에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진을 치고 있는 흑암의 동굴과 같은 곳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러한 위험을 피하면서 일하시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흑암의 세상에 뛰어 들어오신 분이며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따라서 일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성도는 빛 가운데에서 일하는 것이므로 악한 세력이 덮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위험 속에서 사역을 감당하여야만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셨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5).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시는 동기와 목적은 바로 이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들의 신앙부활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Deity, 신성)을 믿을 바로 그때에 일어난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12:39)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믿음을 보여주었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라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신앙도 유대인들의 배척과 박해로 인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다시 연약하여졌다. 이럴 때에 발생한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은 제자들의 믿음을 키워주는 기회로 사용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살려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나사로의 회생은 제자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구체적으로 모의하게 되었으나 이런 위험 속에서 제자들의 신앙은 굳게 다져졌다. 우리들은 질병과 죽엄, 재난과 위험, 환난과 핍박까지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부활은 흑암과 죽음을 정복하시는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유대인들은 그가 나사로를 무척 사랑하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분이 왜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눈물은 불가능을 보여주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불가능을 해결하신다. 예수님의 눈물이 없으면 질병, 죄악, 죽음이 해결될 수 없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일에도)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이지만 죄는 없으시다”(히4:15). 죄 없으신 예수님은 오직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들을 구원하시려는 유일한 목적 때문에 우리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히5:7). 이사야는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사53:3, 4)고 하였다. 우리들은 어떠한 슬픔을 당하였을지라도 우리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3.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어 생명과 부활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실증을 보이시며 모든 성도들에게 확고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하여야만 하셨다. 이것을 위하여 사랑하는 나사로를 도구로 사용하여야만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낙원에서 영생을 즐기고 있는 나사로의 영혼을 불러내어 죄와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다시 살다가 또 죽음을 당하게 하여야 한다는 슬픈 사실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흑암과 죄의 세력을 정복하기 위하여 당하여야만 하는 죽음이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이미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오직 한 번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무찌르셨다. 그런데 사랑하는 나사로를 두 번씩이나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하여야 한다는 데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으셨다.
4. 사람은 죽음을 항거할 수 없으므로 눈물만 흘릴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눈물을 흘리셨으나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맞아드리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그 부활의 능력을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심으로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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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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