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예수님을 따름과 승천과 영생 (요21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0:31).
1. 요한복음의 절정인 제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and my God! 20:28)라는 고백을 하였다. 이 기록으로 요한복음은 충분히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 하였다.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확고한 부활신앙에서 살아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2. 그런데 제21장이 후기(postscript, epilogue)로 추가된 이유는 무엇일가? 요21장은 저자 요한이 기록하지 않았고 후에 익명의 제자가 추가한 기록이라는 것은 이미 학계에서 인정하는 사실이다. 요21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요20장의 부활장이 결론이 될 수 없으며 요21장에서 승천(ascension)과 영생(eternal life)으로 결론을 맺어야하기 때문에 존재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요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째(21:14)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하였다. 성경기록에서 “3”이라는 숫자는 언제나 “완전, 완결, 완성”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째의 “나타나심”에서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세상에 “오심”(descend)을 시작으로 하여 하늘로 “올라가심”(ascend)에서 모든 결론이 이루신다는 결정적 사항을 보여주신다. 제자와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올라가심과 영생”의 귀한 결론을 맺어야 한다.
3.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우주만물에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계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심(descending)은 구원과 구원의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사역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crucifying)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resurrection)은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결론을 나타낸다. 그러나 진정한 결론은 천상적 차원에서 맺어져야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심(descending)으로 시작하였으므로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심(ascending)으로 결론이 맺어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4.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반드시 “하늘로 올라감”(ascending)으로써 믿음의 결론을 맺게 된다. 예수님께서 불러 세우신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성도), 즉 각 성도는 “하늘로 올라감”(ascending)으로 지상의 신앙생활을 종결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쳐주셨다”(21:19). 베드로는 각 제자와 성도를 대표하는 사도이므로 우리들의 죽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을 받고 “하늘로 올라감”(ascending)이 있는 결론을 맺어야 한다. “하늘로 올라감”(ascending)의 방법론은 요21:19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Follow Me!)라고 하신 말씀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름”으로 “올라감” (ascending)의 영광된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저변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항을 염두에 두고 요21장에서 보여주는 사건 하나하나의 내용을 요한복음을 기록한 전체의 전후관계(context)에서 일관된 해석을 하여야 한다.
5.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세 번째의 만남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예수님이 의도하시고 만나기로 약속한 만남이 된다. 부활의 날 천사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마28:7)고 하였다. 또 예수님도 친히 여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고 말씀하여 주셨다. 이러한 소식을 전하여 들었으나 제자들은 주님의 분부를 따르기보다는 자기들의 의향에 의하여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 밤을 새어가며 고기잡이를 하였다. 베드로의 이끌림에 의하여 다른 6제자들이 동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능력을 동원하여 실행한 고기잡이는 전적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기록에서 제자들의 대표자인 베드로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상항을 보게 된다.
1. 영적 지도자의 말 한 마디 또는 행동 하나가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다. 특히 “옛 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심사숙고 하여야 한다. 베드로가 자기 가족이나 동료 제자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합당한 구실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영적사역에 매진하는 제자 또는 지도자는 육적고난과 유혹을 극복하기 위하여 더욱 영성훈련에 매진하여야 한다.
2.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부름 받은 베드로와 제자들은 직업이 어부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는 약속을 하여주셨고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니라”(막1:18)는 말씀대로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거동락 하면서 영성훈련과 전도훈련에 매진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육체적인 동거를 하여주지 않았을 때에 실망과 낙담으로 다시 옛날 어부의 생활로 돌아간 행동은 너무나도 큰 실수를 범한 것이었으며 영성의 타락을 보여준 것이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았다고 느껴졌을지라도 영성훈련에 매진하여야 하였다.
3. 목양사역에서 필요를 채운다는 것은 목자가 어려운 상항에 처할수록 더욱 양들을 잘 먹여야 한다는 원칙론을 지키라는 것이다. 심도 있는 말씀연구와 끈질긴 기도생활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의 양식을 받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양들이 튼튼하게 성장하여서 번식률이 증가하며 많은 양떼를 이루는 결과가 이루어진다. 히브리서 저자와 베드로 자신의 권유를 보자.
히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벧전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 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영성의 독특성과 축복을 알고 깨달았으면 맛 본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늘 먹고 마시면서 그 영성의 세계 안에 들어가 살고 있어야 한다. 결코 뒤로 물러가지 말고 타락과 유혹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특별히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1)는 것은 제자들의 신앙회복과 아울러 신앙향상을 목적하고 만남의 장소로 갈릴리 바다를 택하신 것이었다. 주 예수님의 회복을 받은 후에 제자들은 기도에 힘쓰게 되었고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을 받게 된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된다. 그 어느 한 제자도 옛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가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은 고기(먹고 마시는 일에만)와 연루하지 않았고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Gr. zoe)을 공급하는 영적 사역에 생애를 바치게 되었다.
* 요21:1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나타내셨다”는 말은 요1:18에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사도요한은 서두에서 기록하였다. 이제 요한복음의 마지막에도 우리의 번역으로 “나타내었다”를 세 번씩이나(21:1에서 2회, 14) 사용하고 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에서 ”나타내셨다“(Gr. exegesato)라는 단어는 “알게 하여주다,” “설명하다”(to explain), “해설하다”(to expound)라는 뜻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 그 목적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게 하려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셨고, 설명하셨고, 선포하셨고, 해설하셨다”(NIV, has made him known; KJV, declared him) 것이다.
*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또 요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라는 기록에서 “나타내셨다”(NIV. appear, KJV. show)는 단어는 “ephanerosen"(Gr.)이다. 1:18에 나오는 “exegesato”(Gr.)와는 전혀 다른 단어다. 우리 말로는 “출현하다,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예수님 자신을 만나보게 하여서 직접 보고 만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신 “나타남”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해설, 알게 함, 설명”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확인하여 주시는 것이었다.
* 사도요한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과 또 예수님 나타나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타나심”과 “출현” 또 “보여주심” 등에서 “ephanerosen”을 여러 곳에서 사용하였다. 예를 보자.
요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요2: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1요3: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 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 요한복음 21장에는 “물고기”(fish)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고 있다. 개역개정에서만 살펴보아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물고기”(3), “물고기”(6), “물고기”(8), “물고기”(11), “생선”(9), “생선”(10), “생선”(13), “고기”(5) 등이다. 8회에 걸친 물고기(fish) 기록을 왜 이렇게 다른 말로 쓰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 이러한 의문점은 원어(헬라어) 연구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1) 3절의 물고기: 이것은 “물고기를 잡다”(Gr. halieuein; to catch fish)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그 이외의 단어는 명사로써 3단어가 쓰이고 있다. 모두 “물고기”(fish)라는 뜻을 지닌다.
(2) 6,8,11절의 물고기: 이것은 “물고기”(Gr. ixthus),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고기.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3) 9,10,13절의 생선: 이것은 “생선”(Gr. opsarion), 빵과 함께 먹는 작은 물고기를 의미한다.
21: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4) 5절의 고기: 이것은 “고기”(Gr. prosphagion; meat), 이 단어는 신약에서 한 번만 나온다.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고기”(Gr. prosphagion)라는 단어는 “고기”(meat) 또는 “생선”(fish)을 의미한다. 그러나 “빵과 함께 먹는 작은 생선”(something eaten with bread)을 의미한다. 원어에서 “pros"는 “. . . 와 함께"(with, in addition to)이며 “phag"는 ”먹는다“(to eat)이다. 합하면 “ . . . 와 함께 먹는 것” 즉 주로 먹는 음식은 “빵”(bread)이기 때문에 “빵과 함께 먹는 것”이 되며 그 당시에는 빵과 함께 먹는 것이 “작고 마른 생선”이었기 때문에 “고기”(fish, meat)로 통용된 단어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음식으로 먹을 고기가 있느냐?”고 질문하셨다. “잡았느냐?”가 아니다. 그런데 원어에서 보면 예수님은 부정형 질문을 하셨다. “고기가 없지, 그렇지?”라고. 제자들이 고기를 잡지 못한 상항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이다. 팔아서 돈을 벌만한 고기의 수확은커녕 자기네들의 배를 채울 먹거리 고기의 수확도 못한 상태를 알고 계신 것이다. 그들의 대답은 “없습니다!”였다. 처참한 상항의 표현이었다.
* “얘들아!”(5절): 특별히 예수님은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애쓰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얘들아!”(Gr. paidia; children)라는 말을 쓰셨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들을 부르는 칭호”다. 신약에서 오직 한 번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신 기록이다. 성경의 서신에서 보듯이 “청년들아!”또는 “장년들아!”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paidia"는 언어학에서 특별히 “작은 것을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존경하거나 높여주는 뜻은 전혀 없다. “아이들아, 너희들은 아직 배울 것이 있느니라”는 내용을 뜻한다. 독특한 뜻을 함축한 구어체이다. 이러한 부름을 받으면서 제자들이 배워야 할 사항은 무엇이었는가?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일평생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될 내용은 무엇일가?
(1)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새롭게 의식하는 특별교육이 필요하였다.
(2) 그들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의심과 믿지 못함이 더 이상 존재하여서는 안 되었다.
(3) 예수님은 어느 상항에서라도 그들을 가르치실 내용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 요21: 6, “그믈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많은 고기가 잡히는 기적의 원인이 여기에 숨어있다. “그물” 하나를 던졌다.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 한 개의 그물을 들 수 없었고(6),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되었으나 그 한 개의 “그믈”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 눅5장에서 한 개의 그믈이 많이 잡힌 물고기로 인하여 찢어진 사건과는 대조적이다. 그때는 불순종 이때는 순종이 있었다. 그렇게도 많은 고기가 아침에 잡힐 수 있었을까? 해답은 오직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한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제자들이 새롭게 인식하고 배워야하는 사항이었다.
(1) 예수님의 창조적인 능력(Jesus' Creative Power):
(2)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Jesus' Omnipotent Power):
(3) 예수님의 전지하신 능력(Jesus' Omniscient Power):
* 요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거기에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신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선”은 단수 명사다. 한 마리의 음식용 작은 물고기가 숯불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설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물고기를 이미 잡게 하여 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오른쪽에 던짐으로써 충분히 먹을 것(153마리)이 생기게 된 것이다. “153”이라는 “큰 물고기 숫자”의 뜻을 밝히려고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하여 여러 가지 해설을 하였으나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라는데 타당성을 두고 있다. 제자들은 밤을 새며 고기잡이를 하느라고 몹시 시장하였으나 예수님과 함께 좋은 아침의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배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어” “보여주는” 계획의 진행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제자들의 부활신앙은 굳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하였다.
* 요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였다. 첫 번 나타나심은 요20:19-23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주일 밤에 예루살렘에서 있었고, 두 번째 나타나심은 요20:26-29에 기록된 대로 부활 8일후 역시 예루살렘에서 주일 밤에 있었다. 세 번째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시기까지 베드로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는 과묵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숯불 앞에 둘러 앉아 식사를 나누는 좋은 자리에서도 조용하기만 하였다. 당연하다. 주님을 배반하고 배신의 언행을 하였던 자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이러한 주님과의 재회는 괴로움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 요21:15,16,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다. 베드로는 매번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처음 두 번은 “아가페”(하나님의 사랑)를 세 번째는 “필레오”(인간의 사랑)를 사용하셨다.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인간의 사랑)로 대답하였다. 이렇게 사용된 용어를 가지고 학자들은 그 이유를 규명하여 보려고 노력하였고 설교자들도 다양하게 해설들을 하고 있다. 사도요한의 기록 전체를 통하여 어떤 통일성이 발견되면 그 원인이 규명 될 것을 전제로 하고 연구한 결과는 매우 단순하였다. 요한의 기록에 있어서 “사랑하다”는 헬라어를 사용할 때는 어떤 원칙이 없이 혼용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왜 “베드로”라고 하지 않고 “시몬”이라고 부르셨는가? 사복음 연구에서 이 질문에 해당되는 해답은 명료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베드로”(또는 “게바”=아람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지어주셨고 “고귀한 영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몬”은 그의 본래 지음 받은 이름이고 “자연적 육성”을 가진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가 영성에 해당되는 언행과 질의응답이 있었을 때에는 “베드로”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나 육성이 강하게 나타날 때는 “시몬”이라고 불리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1. 여기 21장에서도 제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그의 육성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인간의 연약성을 이해하여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철저한 영성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늘 중보기도를 드리셨고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며 “더 이상 나와 사랑의 관계를 끊지 말자”는 제안이며 초청의 말씀이셨던 것이다. 예수님 편에서 먼저 제자를 사랑한다고 하시며 그 제자를 회복하여주시겠다는 고귀한 말씀을 주신 것이었다. 이러한 사랑의 주님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성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 16, 17)라고 세 번씩이나 같은 표현을 한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예수님이 자기의 연약한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중요한 핵심을 두고 대답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세 번째 대답은 근심하면서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21:17)라는 고백을 하였다. 우리 편에서는 아무리 예수님(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미흡한 결과를 나타낼 뿐이다. 예수님의 부탁의 말씀대로 우리 사람 편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21:19), “너는 나를 따르라!”(You must follow me! 21:22). 우리 성도가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하고 영생을 누리기까지 “따름”(following)의 신앙을 끝까지 경주하여야 한다.
* 예수님이 주신 명령과 부탁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내 어린양을 먹이라”(Feed my lambs. 15): “어린양”(Gr. arnia)은 말 그대로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작고 귀여운 양이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얘들아!”(Gr. paidia;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들을 부르는 칭호)하고 부르신 애정 어린 호칭으로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셨다. 헬라어 명사 뒤에 “-ia”라는 접미사는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부친다.
(2)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 16): “양”(Gr. probatia; little sheep)은 “어린양” 보다는 조금 더 자란 양이지만 아직 다 크지 못한 양이다. 따라서 귀엽고 사랑스런 호칭 헬라어 “-ia"를 접미사로 붙이고 있다. ”치라“(Gr. poimaine; take care of, shepherd; 보살피다, 기르다, 목양하다)는 동사는 목사(pastor)라는 단어의 출처가 되기도 한다.
(3)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 17): “양”(Gr. probata; sheep)은 일반적 의미의 양이지만 여기에서는 완전히 숙성한 양을 의미한다.
* 이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말씀을 종합하여 그 내용을 생각하여 보자.
(1) 모든 양은 “내 양들”이라고 하셨다. 모든 양은 예수님 소유의 양들이다. 베드로 소유의 양은 하나도 없다. 목자 장은 예수님이시며 베드로는 목자 장 수하의 한 목자다.
(2) 예수님의 양은 어떤 양이든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양이다. 예수님에게 속한 생명체를 목자 베드로는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3) 먹이라(Feed) 또는 치라(take care of, shepherd)는 동사는 현재 명령형이다. 헬라어의 명령형은 계속성과 영속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중단하여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하여야 할 목양사역은 “계속하여 끈질기게 하여야 하는 사명과 의무”(Keep on feeding Lord's little lambs)이다.
*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영적 축복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기로 결심하였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그러나 결과는 예수님을 배반하고야 말았다. 믿음과 사랑을 회복한 베드로는 그 약속대로 죽게 될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베드로는 로마 황제 네로 때(67 A.D.)에 자기 의지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를 당하였다.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과 같았다. 사도요한이 이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 때는 이미 20년 전에 베드로는 순교를 당하고 사라지고 난 때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회상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인정하여 주신 영광과 영원의 생애를 베드로는 살았던 것이다. 성도의 아름다운 죽음에는 승천과 영생이 보장되어 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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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의 말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글쓴이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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